- <패스트 라이브즈>의 오스카 캠페인 도중 <트론: 아레스>의 오디션 제안을 받았다고.
처음엔 <트론>시리즈와 내가 딱 들어맞는 배우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주저했다. 이유는 명백하다. 전작인 <패스트 라이브즈>가 고요한 작품인 동시에 나와 닿은 부분이 많은 독립영화였고,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연기를 요했으니까. 완전히 다른 영화에 출연하자니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런데 지난 연기 인생을 돌아보면 예상치 못한 선택을 할 때 늘 사건이 벌어졌다. 그 경험을 믿으며 시나리오를 읽어나갔다. 우선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유서 깊은 시리즈에 아시안 여성이 주인공으로 선다는 의미가 컸고, 이 정도 스케일의 작품을 해본 적이 없어 관심이 갔다. 마침 몸을 쓰는 연기를 갈망하던 차였다. 그래서 오디션을 보러 갔다. 다른 배우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겠지만 나는 오디션 보는 걸 꽤 즐긴다. (웃음) 오디션이야말로 감독이나 제작자와 함께 캐릭터의 방향성을 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기 때문이다. 모처럼의 오디션이라 신나게 임했고 이후 작품에 합류했다.
- 촬영에 들어간 다음 발견한 작품의 장점이 있다면.
나도 이브처럼 여동생이 있어서 그런지 작품 속 테스와 이브가 맺는 감정적 유대를 배역에 불어넣는 게 어렵지 않았다. (기자 뒤를 가리키며) 저기 앉아 있다. <트론: 아레스>는 거대한 세트와 라이트 슈트, 라이트 사이클 등 스펙터클 못지않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진짜 이야기’가 중심에 있어 좋았다. 그리고 나인 인치 네일스의 사운드트랙이 나를 움직였다. 다들 선공개된 사운드트랙을 얼른 들어달라. 촬영 내내 머릿속에서 그들의 음악이 맴돌았고, 영화의 분위기를 지탱해주는 내적 장치로 자리했다. <챌린저스>를 정말 사랑하는데 그 영화의 흥행에 나인 인치 네일스의 스코어가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위대한 뮤지션의 음악이 내 작품에도 나온다는 사실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 인공지능 학계의 거장 페이페이 리가 배역의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고 들었다. 그와 어떤 시간을 보냈나.
아, 정말 많은 이야길 나누었다. 사실 우리 두 사람이 나눈 말만 따로 떼어내도 한편의 영화가 될 정도다. 페이페이 리 박사님은 지금껏 만난 사람 중 가장 출중한 사람이다. 이미지넷의 창립자이자 인공지능의 대모 같은 존재니까. 하지만 아주 인간적인 차원에서 페이페이와 연결될 수도 있었다. 이 작품이 박사님의 연기 데뷔작이다. TED 강연 장면에 감독님이 특별 출연했기 때문이다. 촬영을 들어가기 직전까지 내게 너무 긴장된다고, 슛 들어가는 게 두렵다고 털어놨다. 박사님이 어떤 정상회의에 발제자로 섰을 때도 함께 참여한 배우에게 연기 팁을 들었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 배우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였다! 그래서 우리 영화는 무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에게 연기 레슨을 받은 인공지능의 거장이 출연하는 작품이다. (웃음)
할리우드적 모먼트에 존재하기
- 아레스(재러드 레토)는 이브에게 당신을 믿어도 되냐고 두 차례 질문한다. 하지만 이브는 확답을 주지 않는다. 이에 관한 당신의 해석이 궁금하다.
둘은 함께 여정을 떠나면서 서로를 알아간다. 이브가 아레스를 미션의 파트너로 직접 고른 것이 아니지 않나. 둘의 관계는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파트너십이다. 하지만 이 뜻밖의 동맹을 통해 두 사람은 연결되고, 공동의 경험으로 인해 결국 여정의 노선이 변한다. 이브는 아레스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나 같아도 인류 역사상 최첨단 기술을 가진 군사용 기업 프로그램을 쉽게 믿지는 못했을 거다.
- 둘이 로맨틱한 관계로 이어지지 않아서 좋더라.
동의한다. 그래서 재러드와 함께 영화사의 여러 상징적인 콤비플레이를 떠올리며 둘의 관계를 상상했다. 결국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의 보니(페이 더너웨이)와 클라이드(워런 비티)에 가까워졌다.
- 영화 초반 아레스는 이브와 결투 도중 이브의 얼굴에서 모종의 반응을 읽어낸다. 그날의 현장을 떠올려본다면.
밴쿠버의 부두에서 촬영한 장면인데, 무척 추웠다. 그리고 꿈만 같은 순간이었다. 머리 위로 헬리콥터 두대가 날고 있었고, 여섯대 정도의 카메라가 우리를 찍고 있었다. 정말 전형적인 ‘할리우드적’ 모먼트였다.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를 뚫고 배우들과 대사를 주고받는데 이런 순간에 내가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 이브의 또 다른 ‘반응’이라고 하면 그가 딜린저 그리드의 특정 스테이지에 처음 입장했을 때 얼굴에 스치는 경이감을 말할 수 있겠다. 대사 없이 모든 언어를 담는 당신의 표정연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두려움과 불신의 균형이 필요한 와중에 그 안엔 엄청난 기쁨도 숨어 있다. 그리드에 들어가는 건 이브 같은 보통 인간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물론 그는 천재적인 컴퓨터프로그래머이며 게임디자이너이지만 자신이 이론적으로 너무나 잘 알고있던 걸 직접 경험하는 건 다른 차원이다. 이브가 느낀 환희는 곧 나의 흥분과 겹쳐졌다. 나 역시 그리드 속으로 들어가게 된 거니까. 픽셀화된 모래나 물 같은 것들을 집어들며 거대 세트에서 연기하는 순간들이 내겐 엄청난 즐거움이었다.
- 그리드 내부에서의 이브와 현실 세계의 이브 사이에 외양 차이를 둔 것도 흥미롭더라.
이브가 입는 라이트 슈트는 입는 순간 연기에 도움을 준다. 옷도 함께 연기를 하는 셈인데, 입는 순간 캐릭터의 존재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평소처럼 걷거나 앉을 수 없는 의상이다. 그래서 제작진이 배우들을 위해 삼각대 위에 자전거 안장을 얹은 듯한 특수 의자를 제작해주기도 했다. 라이트 슈트를 입는 동안 아테나로 분한 조디 터너스미스와 눕는 자세를 새로 만들었다. 마치 베개위에 몸을 던지는 자세라고나 할까. 몸을 굽힐 수 없으니 신체 일부를 살짝 비틀어야 잘 쓰러질 수 있다. 이런 제약들이 오히려 캐릭터로서 현실 세계와 그리드를 구분해 연기하는 데 도움을 줬다.
- <트론: 아레스>는 당신의 바이크 액션을 만끽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카 체이싱 장면이 영화 초반의 흥미를 추동하는 만큼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을 텐데.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캐스팅 당시에는 웃을 수 없었다. ‘진짜 근육질 몸을 만들어야지’, ‘턱걸이를 200개는 해야지’ 하는 식의 고민으로 머릿속이 복잡했으니까. 일단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액션을 경험한 브리 라슨에게 조언을 구했다. 브리의 팁을 듣고 최고의 선생님과 훈련에 돌입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전직 네이비 실 출신의 트레이너고 심지어 브래드 피트까지 훈련시킨 적 있는 분이다. 그와 운동을 하니 사람이 저절로 겸허해지더라. (웃음) 식단까지 단백질 위주로 재편해 살던 중 감독님에게 연락이 왔다. “있지, 이브는 그냥 인간이야.” 결국 평범한 인간의 몸짓으로 액션을 구현하는 게 내가 풀어야 할 과제였다. 영화에서 보이는 액션을 한번이 아니라 수십번을 반복하며 지치지 않아야 했다. 특히 지구력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축제의 끝이 아닌 시작
- 이브는 아레스에게 인간으로 사는 일은 끝내주는 동시에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이 대사를 당신의 배우 커리어에 빗댄다면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 그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배우로 살게 하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오나.
“강건한 등과 온화한 가슴을 지녀라.” 배우로서, 예술가로서, 인간으로서 좌우명으로 삼는 문장이다. 평정을 유지한 채 세상을 연민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격언인데, 나의 지난 삶은 물론 지금껏 연기한 배역들을 관통한다고 느낀다. 나는 자기 분야의 최정상에 선, 강인한 여성을 연기하길 즐긴다. 이번 <트론: 아레스>에서도 플린사의 CEO이자 일류 엔지니어를 연기했으니까. 하지만 모든 강한 것의 이면에 숨은 취약성을 발견하는 일에도 못지않게 매혹돼 있다. 돌아보면 나의 모든 삶이 외유내강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었다. 오늘처럼 서울에서 당신과 만나 인터뷰하는 배우 그레타 리의 자아에도 그 연약한 속살이 스스로를 드러낸다.
- 당신은 수차례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안타운을 배경으로 한 시리즈의 대본을 집필 중이라고 밝혔다. 근래엔 당신이 모니카 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장편영화에 연출로 데뷔한다는 기사도 보도됐다. 작가, 감독으로서 만드는 작품에 배우로서의 자아가 반영된다고 보나.
그 둘은 서로에게 1천퍼센트 영향을 미친다. 두 자아가 분리된다면 좋겠지만 둘이 서로와 헤어질 때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 안 간다. 왜 연출을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나와 같은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일에 의무감을 느낀다고 답하고 싶다. 10대나 20대 시절, 내가 할리우드에서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 소수자 배우로서 갖지 못했던 기회 말이다. 동료들을 도우며 선구자의 왕관을 기꺼이 짊어지려 한다. 누군가를 위해 문을 열어주고, 그 문을 계속 열어두려 한다.
- 지난 삶에서 얻은 교훈인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언젠가는 세상이 변할 거라며 손놓고 있으면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다. 물론 업계의 분위기가 꽤 진보하긴 했다. 지금 나를 보라.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가 투자한 블록버스터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전세계를 돌며 작품을 홍보 중이다. 이건 놀라운 사건이다. 2025년 현재 K팝을 위시한 한국 문화 전반이 세계를 끌어안는 풍경을 실시간으로 목격한다. 흥분되는 이벤트지만 여기서 끝나면 안된다. 이 축제가 끝이 아닌 시작이어야 한다. 아직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행운이 무궁무진하다.
- 당신의 필모그래피에서 <패스트 라이브즈>를 빼놓을 수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체감하는 이 작품의 진가가 있다면.
죽는 날까지 <패스트 라이브즈>는 나의 대표작으로 자리할 것이다. 이번에 한국에 오면서도 공항에서 나를 알아본 팬들이 눈물을 글썽인 채 “<패스트 라이브즈>를 선택해줘서 고마워요”, “안녕, 나영?”과 같은 인사를 건넸다. 많이들 그 작품을 사랑해주시는 만큼 울림이 남다르다. 나는 평생 <패스트 라이브즈>에 빚지고 살 거다. 영화를 향한 사랑을 다시 불어넣어준 작품이니까. 영화는 모두의 것이고, 모두와 연결될 수 있다는 진리를 <패스트 라이브즈>가 일깨워줬다. 이때 얻은 감화는 <트론: 아레스>는 물론 세상에 미처 알리지 못한 나의 전작들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영화의 힘을 믿는다.
- <트론: 아레스>의 포스터에 “남은 시간 단 29분”이 캐치프레이즈로 적혀 있지 않나. 당신의 삶에 29분만 남았다면 무얼 할 텐가.
지루한 답이 되려나. 그래도 나는 29분만 주어진다면 바비큐 파티를 열겠다. 고기를 굽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지인들을 초대해야지. 시간이 되면 오고 못 와도 괜찮지만 최선을 다해 방문하라고 경고할 거다. (웃음) 놀러오시라. 나는 숯불 앞에서 집게를 들고 핫도그, 아니 햄버거를 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