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머니 속의 가족
거장에게 첫 장편은 어떤 의미인가.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호주머니 속의 주먹>은 금기를 위반하는 방식으로 부르주아 가족의 붕괴를 그려내고 있다.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은 이 작품 안에 사적인 경험과 이탈리아의 한 시대를 동시에 담았다고 밝혔다. “<호주머니 속의 주먹>에는 내 인생의 가장 큰 경험이 조금씩 집약되어 있다. 동시에, 이 영화는 이제는 사라져버린 과거 이탈리아 사회를 가리키는 일종의 지표다.” 고향 에밀리아 로마냐에서 시작한 그의 영화 세계는 로마로 향한 뒤에도 첫 장편에 담았던 가족 드라마를 그려냈다. “로마에서 살기 시작하며 만든 <허공으로의 도약>에도 가족 내 대립 구도를 재현했다. 살해당한 어머니를 성인으로 만들려는 가족의 시도를 그린 <내 어머니의 미소>(2002)도 첫 장편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로마나 다른 지방을 배경으로 한 영화도 그 뿌리는 가족의 역학 관계를 다루고 있다. 심지어 내가 휴가를 보내던 마을 보비오에서 찍은 일련의 영화들도 내 형제자매를 반영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가족과 고향으로의 순환이라는 이 작업은 평생 내게 영감의 원천으로 남을 것이다.” <호주머니 속의 주먹>에서 시작됐던 가족을 향한 사적인 고백들은 형의 죽음을 고백했던 다큐멘터리 <마르크스 캔 웨이트>(2021)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 내부에서 중요한 자전적 모티프로 자리한다.
치유와 무의식의 바다, 마시모 파지올리라는 이름
이탈리아의 정신분석학자 마시모 파지올리.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은 1977년 4월 15일 그의 정신분석 세미나에 참여한 뒤로 <허공으로의 도약>부터 <나비의 꿈>(1994)에 이르기까지 파지올리의 정신분석학 사상을 자신의 영화 녹여 냈다. “파지올리의 사상에서는 치유라는 개념이 있다.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인간의 존재가 순응하지 않고 변화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이 나를 매료시켰다. 이는 정치적 유토피아에서 내가 찾으려 했던 급진적인 차원의 변화였다.” 이를 대표하는 한 장면은 <허공으로의 도약>에 등장하는 바다의 이미지다. 마시모 파지올리는 무의식을 조용한 침묵의 바다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허공으로의 도약>에서 등장하는 잔잔한 바다는 파지올리적인 개념이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탄생은 단순한 탄생이 아니라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살 모든 가능성이다. 오히려 삶 그 자체가 우리의 창의성, 상상력, 자유를 훼손한다. 따라서 어머니 안에서 아이가 고요함을 느끼는 태아의 상태처럼 고요한 무의식의 바다라는 이미지가 그래서 중요했다.” 마르코 벨로키오는 파지올리의 정신분석학을 접한 뒤에 <호주머니 속의 주먹>의 관점을 뒤집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세미나 이후 어머니와 형제를 죽이는 것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호주머니 속의 주먹>의 그 관계를 <허공으로의 도약>에 이르러 뒤집을 수 있었다.” 한편 파지올리와 마지막으로 협업했던 <나비의 꿈>은 마르코 벨로키오의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기도 했다. 진행을 맡은 정성일 평론가는 <나비의 꿈>이 유일하게 마르코 벨로키오의 영화 중에 단 200여 개의 숏 개수로 이뤄졌다는 점을 언급했다 “파지올리가 직접 각본을 썼던 <나비의 꿈>은 나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인데 현저히 적은 숏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온전히 파지올리적인 작품이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 속 상황에서는 더 많은 성찰의 시간이 요구됐다. 같은 숏 안에서 더 많은 묘사가 필요했기에 그렇게 많은 숏이 필요하지 않았다.”
정치와 인물의 교차점에서
마르코 벨로키오의 영화에서 이탈리아의 근현대사는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중국은 가깝다>에서는 이탈리아의 마오주의 확산을 포착했고, <승리>(2009)는 무솔리니의 파시즘적 전향의 시기를 다룬다. 마르코 벨로키오는 1978년 벌어진 알도 모로 납치 사건을 단편 <부서진 끝>(1995), 장편 <굿모닝, 나잇>, 시리즈 <익스테리어, 나잇> 세 편에 걸쳐 다뤘다. “알도 모로 암살은 이탈리아 정치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장편 두 작품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굿모닝, 나잇>은 알도 모로가 납치된 그 작은 감옥 속에서 진행된다면, <익스테리어, 나잇>은 이탈리아의 비극을 외부에서 경험한다.” 그의 영화가 정치와 역사를 소재로 하기에 그의 영화가 정치적이라는 이야기를 하지만,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은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사적인 것이 곧 정치적이다. 우리의 사적 영역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 정치와 사회 변화에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나의 영화는 점차 사적인 영역으로 향했다. 결국 정치와 개인의 관계, 역사와 개인의 관계가 중요하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역사와 정치를 향한 태도를 하나의 영화에 빗대어 표현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폭군 이반>(1944)를 만들었을 때 그는 역사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물을 창작했다. 나도 항상 현실에 발을 두되 상상력의 자유를 인정받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