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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어쩔수가없다>만의 특이점은 이렇게 완성됐다, <액스>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와의 전격 비교
정재현 2025-09-25

“이 소설을 무릇 월급쟁이라면 다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의 국내 번역판에 담긴 박찬욱 감독의 추천사다. 박찬욱 감독은 오랫동안 <액스>를 영화화하고 싶다고 밝혀왔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은 <액스>를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과 오랫동안 소통해왔다. 그렇게 탄생한 <어쩔수가없다>는 <액스> 또는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와 얼마나 다를까. <어쩔수가없다>만이 지니는 특이점을 네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봤다.

#만수의_표적들

유만수(이병헌)는 자신과 유사 경력을 지닌 취업 경쟁자의 프로필을 입수하기 위해 유령회사인 ‘레드 페퍼 페이퍼’를 세운다. 소설 <액스>와 영화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에 등장했던 ‘B. D. 산업용지’ (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버크 데보레’, 영화의 주인공 이름은 ‘브뤼노 다베르’다)가 어쩌다 ‘YMS 제지’가 아닌 ‘홍고추 제지’가 되었는지는 영화를 통해 확인하길 바란다. 소설과 영화에선 총 7명이었던 주인공의 표적은 <어쩔수가없다>에선 구범모(이성민), 고시조(차승원), 최선출(박희순) 세명으로 압축됐다. 선출은 소설과 영화 속 꿈의 직장 ‘아카디아’의 반장과 유사한 궤적을 걷는다. 이에 반해 범모와 시조는 남은 여섯 인물의 속성 중 흥미로운 구석을 나누어 배합된 동시에 자기만의 드라마까지 보유한다. 이를테면 범모가 지닌 음악 애호가로서의 모습이나 시조가 자아내는 애처로움은 분명 <어쩔수가없다>만의 개성이다. 원작을 읽은 후 여섯 남자의 서사를 범모와 시조가 어떻게 나누어 가졌는지 정리해봐도 재밌을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선출과 범모, 시조가 “만수가 지닌 일면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리했다. 세 캐릭터가 은연중 내뱉는 대사가 만수를 거쳐 어떻게 변주되는지에 주목해보자.

#가브라스에게_헌정된_영화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

“이 작품을 코스타 가브라스에게 헌정합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어쩔수가없다>는 영화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를 연출한 프랑스 영화감독 코스타 가브라스에게 경의를 표한다. 실제로 박찬욱 감독과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은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오픈토크를 통해 대화를 나눈 바 있다. 박찬욱 감독은 당시로선 할리우드 프로젝트로 기획했던 영화의 비전을 소개하며 훗날 <어쩔수가없다>가 될 미지의 영화를 “나의 대표작으로 삼고 싶은 작품”이라고 어필했다. 그뿐만 아니라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과 그의 아내 미셸 레 가브라스, 그의 아들 알렉상드르 가브라스가 이 영화의 프로듀서”라고 덧붙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영화의 제작자 크레딧에 가브라스 모자의 이름이 등장한다.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는 원작 소설을 충실하게 각색한 작품이다. 가령 소설이 지닌 일인칭주인공시점의 내면 서술 방식 그대로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 또한 브뤼노 다베르(호세 가르시아)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적극 활용하는데, <어쩔수가없다> 는 내레이션 없이도 관객이 만수의 여정을 웃고 울며 따라갈 수 있게 만들어졌다.

#인상적인_여성_캐릭터들

인정하자. 원작 소설 속 버크의 아내 마저리는 온전한 캐릭터로서 살아 숨 쉬지 못한다. 마저리에게 할애된 긴 대사는 부부 상담실에서의 고백뿐이고, 그는 평생 사건의 진상을 모른 채 버크의 곁을 지킨다. 위 문장은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의 마를렌(카린 비아르)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어쩔수가없다>의 미리(손예진)는 다르다. 미리에겐 테니스, 댄스 교실 등을 즐기는 자기의 삶이 있고 무엇보다 원인도 모른 채 걷잡을 수 없이 기류가 변하는 가족관계를 자력으로 바로잡으려는 의지가 형형하다. 사건과 상대에 따라 미세한 감정의 결로 달리 반응하는 손예진의 연기에 힘입어 미리는 만수가 행하는 일에 육체적, 감정적으로 깊이 관여하며 작품의 명백한 ‘여성주인공’으로 자리한다. 무엇보다 만수는 절대 미리를 이길 수 없다. 염혜란이 분한 아라 또한 확실한 개성의 보유자다. 원작의 개럿 블랙스톤의 아내(이름조차 없다)로부터 각색된 아라는 범모와의 지난 추억을 먹고사는 낭만파이고 자기의 꿈이자 재능인 ‘연기’로 위기를 돌파해내는 지략가다. 뱀을 쫓는 데 그쳤던 소설과 프랑스영화 속 여성이 박찬욱 월드에선 그 뱀을 가지고 어떤 명장면을 만들어내는지 주시하라. 끝으로 만수와 미리의 딸인 리원(최소율)이 있다. 대학에 진학한 관계로 집에 잘 오지 않는 소설 속 큰딸이나 별 대사가 주어지지 않는 프랑스영화 속 큰딸과 달리, 차녀로 설정된 리원은 만수와 미리 부부의 자랑이자 근심거리다. 특히 영화 후반 리원이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는 장면은 <어쩔수가없다> 에 애수를 더한다.

#동시대_대한민국의_이야기

1990년대. 각각 미국과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액스>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와 달리 <어쩔수가없다>는 2020년대 동시대적 대한민국을 반영한다. 공중전화 대신 스마트폰과 휴대폰으로 소통하고 긴축 재정을 위해선 케이블TV 해지가 아닌 넷플릭스 구독 취소가 중요한 세상이다. 한편 우체국의 ‘사서함’을 통해 유령회사의 지원서를 받는 설정은 <어쩔수가없다>에서도 동일하게 유지된다. 입사 지원을 온라인으로 하는 시대에 이 무슨 복고냐고? 그럴까봐 만수가 미리 대사로 선수를 친다. “원서는 경기도 모처 사서함 76호로 보내주세요. 인터넷 접수는 거부합니다. 우리가 종이를 안 쓰면 누가 쓸까요?” 소설과 프랑스영화에선 주인공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버지가 독일군 장교로부터 빼앗은 루거 권총으로 일을 저지른다. 만수 또한 아버지의 권총을 무기로 사용한다. 만수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베트남전쟁 당시 죽은 베트남군으로부터 권총을 빼왔다.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실상 그 권총의 국적을 알고 나면 <어쩔수가없다>가 21세기 한국사의 어두운 면까지 은연중 아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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