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특집] 픽션과 논픽션, 기관과 개인, 이미지와 사운드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기획전, <씨네21>의 추천작 7편 리뷰

오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하는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작품 20편 중에서 선정한 <씨네21>의 추천작 7편을 소개한다. 그의 첫 장편 <티티컷 풍자극>부터 말년에 만든 픽션 <부부>까지, 영화예술의 온갖 경계를 휘저으며 현실을 탐색했던 거장의 장대한 필치를 조금은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부부 – 2022년 / 64분

텍스트와 이미지의 결합 혹은 괴리. 20세기 초엽부터 지금까지, 영화미학의 독자성을 둘러싸고 여전히 논의되는 화두다. <부부>는 이러한 화두에 와이즈먼식의 현답을 내놓는 우아한 시네마다. <부부>의 텍스트와 이미지는 각자의 자리에서 영화의 고풍스러움을 획책하고 교환한다. 주인공은 프랑스의 배우 나탈리 부테푸가 연기한 소피아다.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아내다. <부부>의 형식은 감독이 이전에 만들었던 픽션 <마지막 편지>와 유사하다. 와이즈먼은 실제 소피아가 남겼던 일기, 남편과 교환했던 편지의 내용을 각색하여 극 중의 소피아가 발화하게 만든다. 남편의 불안정함과 비도덕성으로 고통받았던 아내의 쓰림이 주내용이다. 노어로 쓰였던 텍스트를 불어로 발산하고, 사적으로 썼던 이야기는 공적인 픽션으로 전환된다. 그렇게 소피아는 실존 인물이며 한 픽션 속의 주연이자 이 픽션을 움직이는 총체적 주체, 자기 문학의 창작자로 격상된다. 소피아의 후경을 채우는 벨 일 섬의 풍광은 독립적인 섬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한편, 때로 소피아의 감정적 파고에 맞추어 영화의 동세를 조정하는 리듬으로 움직인다. 앙드레 바쟁로베르 브레송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를 평하며 언급했던 것처럼 문학적인 텍스트의 기술(旣述)과 영화적 내러티브가 보여주는 차이, 그리고 현실과 픽션 사이의 이질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예술 표현의 변성과 조합을 통해 <부부>는 그 이질감과 통일성 사이의 긴장을 지속한다. 작중 소피아의 말에 따라 “사랑이 탈선이고 허구”라면 <부부> 역시 문학, 영화 그리고 텍스트와 이미지를 오가는 온갖 탈선의 궤도로 가득한 픽션이다. /이우빈

티티컷 풍자극 – 1967년 / 84분

<티티컷 풍자극>은 기관(Institution)에 대한 영화의 출발점인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데뷔작이다. 영화는 매사추세츠주 브리지워터에 있는 교도소 부설 정신병원 수감자들의 생활을 기록한다. 영화는 뮤지컬 공연으로 시작한다. 병원에서 영화 원제와 동명인 연례 공연을 정기적으로 여는데 수감자와 직원들이 함께 참여한다. 아무런 정보 없이 이 장면을 바라보면 이들이 누군지 우리는 구분할 수 없다. 이후에 가혹한 수감 생활이 펼쳐지는데 마치 공연 참가자가 교도관과 수감자로 나뉘어 또 다른 연극을 상연하는 것처럼 보인다. 단순하지만 시작과 끝에 뮤지컬 공연을 배치함으로써 영화는 현실이 픽션보다 더 비현실적이지 않으냐며 반문한다. <티티컷 풍자극>은 한때 미국에서 상영 금지가 될 정도로 날것의 현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이자 공공기관에 대한 신랄한 풍자극이다. ‘관찰주의’ 영화라는 평가에 지속적으로 거부감을 보였던 와이즈먼의 말처럼 그는 데뷔작부터 관찰 그 이상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편집을 통해 와이즈먼은 기관에 대한 논평을 선보인다. 특히 나체로 등장한 수감자에게 음식을 강제로 먹이는 장면은 매우 충격적이다. 호스를 수감자의 코에 쑤셔넣고 음식을 넣는 모든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교도소의 폭력성을 폭로한다. 영화는 이 장면에 사망한 수감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장면을 교차편집하며 좀더 노골적으로 교도소를 비판한다. 수감자의 벌거벗은 신체(이미지)와 시종일관 떠들어대는 이들의 허무맹랑한 이야기(사운드)가 정신병원을 채운다. /오진우 영화평론가

법과 질서 – 1969 / 81분

<법과 질서>는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의 경찰관을 따라다니며 어떻게 법이 집행되고 질서가 유지되는지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범죄자의 사진들이 지나가고 시끄러운 경찰서 안을 비추며 영화는 시작한다. 경찰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사람들을 심문한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얼굴을 심하게 다친 한 흑인의 모습이다. 영화는 시장통 같은 경찰서 내부보다는 경찰차를 타고 거리로 향한다. 카메라는 경찰관과 함께 온갖 사건, 사고 현장을 기록한다. 교통사고, 폭력 사건, 성매매 단속, 흑인 청년들의 체포 등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 속에서 영화는 인종적 위계를 포착한다. 흑인 매춘부의 목을 필요 이상으로 조르며 제압하거나 옷 가게에서 총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흑인 청년들을 체포하는 장면에서 인종적 대립과 긴장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그렇다고 영화가 경찰관을 완전히 악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미아가 된 소녀를 경찰서로 데리고 와 친절함을 베풀거나 할머니의 가방을 찾아준다는지 경찰관의 선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경찰의 과잉 대응과 친절이라는 양극단 속에서 후자의 모습을 몇 장면 삽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경찰이란 국가 제도의 폭력성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효과를 만든다. 영화 후반부에는 리처드 닉슨의 선거유세 연설 장면이 삽입된다. 닉슨은 범죄율 증가를 언급하며 법과 질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후 차기 정권을 차지한 닉슨이기에 영화에서 봤던 경찰의 행태는 더욱더 강화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오진우 영화평론가

복지 – 1975년 / 168분

에릭 바누는 <세계 다큐멘터리 영화사>에서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영화를 일컬어 “부드러움, 잔혹성, 반감, 섬세함, 화려함, 성실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평한 바 있다. <복지>는 이러한 서술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작품이자,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대표작 중 하나다. 미국의 복지제도를 정면으로 기록하고 탈은폐하는 이 작품은 맨해튼에 위치한 한 복지센터에서 몇 주간에 걸쳐 촬영되었다. 삶의 벼랑 끝에 몰린 뉴요커들이 간절한 얼굴로 복지센터로 모여들고, 제도를 대변하는 센터의 직원들은 차가운 책상을 사이에 둔 채 그들의 빈궁한 이야기를 듣는다. 민원인들이 사력을 다해 자신들이 겪고 있는 불행과 굴곡진 삶을 증명하는 동안, 센터의 직원들은 그들의 삶을 계량화하고 수치로 변환하여 수혜자로서의 적격 여부를 판단한다. 카메라는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일그러진 사람들의 얼굴과 건조하고 경직된 관료들의 대비되는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교차시키면서 당시의 미국 사회를 구성하는 복지제도와 그 제도 앞에 굴종해야 하는 무력한 사람들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투명하면서도 집요하게 기록한다. 한편의 연극처럼 보이기도 하는 <복지>는 허공에 메아리처럼 분출되는 사람들의 말,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서류, 대기실에 앉아 하염없이 구원의 손길을 염원하는 낙담한 사람들을 위계 없이 담아내면서 미국을 아메리칸드림이 상실된 낯선 곳으로 탈바꿈시킨다. /문주화 영화평론가

센트럴 파크 – 1990년 / 177분

제도의 내부에 잠입했던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카메라는 1980년대에 이르러 도시의 풍경을 담아내는 야심적인 연구에 천착한다. 약 3시간의 러닝타임에 달하는 <센트럴 파크>는 그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뉴욕 맨해튼 중심부에 위치한 센트럴파크를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약 340헥타르에 이르는 이 광활한 영토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린 공공재로 기능한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일상과 여가를 누리며, 때로는 인생의 영화적인 순간을 만들어 뽐낸다. 그런가 하면 이곳은 반전운동과 프라이드 퍼레이드가 잇따르는 정치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일상적인 순간과 기념비적인 순간들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축적된 이 공원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이 함축된 거대한 랜드마크이다. 1858년에 착공한 미국 최초의 도시공원인 센트럴파크는 뉴욕 시민의 삶을 대변하는 공동체적 공간이자, 전세계의 관광객을 맞이하는 관광지이기도 하면서, 수많은 영화가 촬영된 매력적인 곳이다. <센트럴 파크>는 뉴욕을 제유하고 있는 거대한 연극무대이자 허구적 장치인 센트럴파크를 면밀하게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공간의 표면을 채우는 방문객들과 이 공간이 멈추지 않고 작동하도록 표면 아래에서 노동하는 직원들, 이사회의 진중한 회의 장면을 가로지르며 공원이 함의하고 있는 기능적 측면과 더불어 정치적 토대를 탐문한다. /문주화 영화평론가

마지막 편지 – 2002년 / 62분

<마지막 편지>는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후기 작업에 속하는 작품으로, 그의 희소한 극영화이기도 하다. 바실리 세메노비치 그로스만의 소설 <삶과 운명>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원작 소설은 1960년 탈고되었지만, 이듬해 KGB에 압수된 뒤 서방에서 암암리에 읽히다가 1988년이 되어서야 소련에서 공식 출간되었다. 영화는 유대인 여성 의사 안나 세미노바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의 한 챕터를 재현한다. 카메라의 비개입을 통한 리얼리티의 발굴을 줄곧 주창해온 와이즈먼은 <마지막 편지>에서 배우 카트린 사미의 신체를 빌려 픽션의 역량을 표출하는 과감한 변주를 택한다. 알랭 레네가 <밤과 안개>에서 홀로코스트의 현존하는 기억을 예외적으로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하여 기록했다면, 프레더릭 와이즈먼은 이와 반대로 치밀하게 설계된 데쿠파주를 바탕으로 한때 금지되었던 문학 속 비극을 영화의 프레임 안에서 연극적으로 재현한다. 영화는 나치에 살해당할 위험 속에서, 아들에게 쓴 마지막 편지를 낭독하는 유대인 여성의 모놀로그로 전개된다.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삶의 마지막에 당도한 한 여성의 얼굴 위로 소용돌이치는 절망과 존엄성을 동시에 담아냈다. 운명을 자각한 체념의 절규이자, 강렬한 유언장을 읊으며 역사를 증언하는 신체의 몸짓과 그림자들의 향연은 오늘날 페드로 코스타의 영화들과 조응한다. /문주화 영화평론가

복싱 체육관 – 2010년 / 92분

미야케 쇼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인상 깊게 본 관객이라면 <복싱 체육관>은 필관작이다. 제도화된 기관을 벗어나 와이즈먼의 시선을 사로잡은 곳은 텍사스주 오스틴의 로즈 복싱 체육관이다. 이곳은 단순히 선수 육성만을 목적으로 한 장소가 아니다. 아마추어부터 프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열려 있는 이 체육관엔 사람이 끊이질 않는다. 영화는 이러한 다양성을 품은 복싱 체육관에서 형성된 공동체의 활기를 기록한다. 관장과 상담하는 한 부인은 링에 선다는 게 어떤 건지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링에 올라가기 위해 반복된 훈련을 통해 한 단계씩 밟아 나아가는 것. 와이즈먼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복싱 하면 으레 떠오르는 사각의 링 안에서 벌이는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 관심이 없다. 대신에 영화는 사람들이 서로 도와 훈련하고 덕담을 주고받으며 일상을 공유하는 ‘사랑방’으로 기능하는 체육관의 모습을 포착한다. 이외에도 주목할 점은 사운드다. 리듬과 타이밍이 중요한 운동인 복싱을 영화가 체화한 듯이 와이즈먼은 체육관에서 나는 온갖 소리를 가지고 일종의 교향곡을 만든다. 타이머의 전자음과 사람들의 숨소리, 스텝, 줄넘기, 샌드백 그리고 스피드백이 만들어내는 마찰음 등은 소음으로 들리지 않고 영화를 보는 내내 귀가 즐거운 경험을 선사한다. 영화 말미에 2007년 버지니아 공과대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 하나의 콘텍스트로 등장하며 영화가 기록하는 복싱 체육관처럼 다양성을 포용하는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넌지시 조명한다. /오진우 영화평론가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