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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유> 사이버 공간에 펼쳐진 남성 중심의 낡은 연애담
2002-06-14

변장한 귀족청년이 시골처녀 농락한 얘기네

● 폴 발레리였나? 맞다. 폴 발레리였다. 하여간 이 남자가 언젠가 흥미로운 낙서를 한 적 있다고 한다. 정확한 인용은 어렵지만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꿈속에서 하나의 직선을 봤는데, 직선 위에는 A와 B라는 점이 있었다. 발레리는 그들에게 오르탕스와 앙리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다음과 같은 간단한 법칙을 만들었다. 앙리는 오르탕스가 가까이 있을수록 더욱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오르탕스는 앙리가 멀리 있을수록 그를 더욱 사랑한다는 것이다. 가끔 나는 이 간단한 법칙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약간의 변수를 뿌린 뒤 어떻게 되는지 관찰하고 싶어진다. 잘하면 작가 따위의 귀찮은 매개체 없이도 괜찮은 러브스토리가 나올지도 모른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발레리가 오르탕스와 앙리에게 붙여준 간단한 성격이다. 그가 자신의 로맨스에 대한 남녀의 일반적 반응이라고 믿었던 것을 여기에 대입했다고 믿어도 될까? 다시 말해 남자는 상대방의 육체적 현존이 강할수록 더 강한 애정을 느끼고 여자는 상대방이 로맨스의 대상으로 추상화되었을 때 더 강한 애정을 느낀다는 법칙 말이다.

<후아유>에서도 이런 법칙은 그대로 통용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인주/별이와 형태/멜로는 오르탕스/앙리 커플과 거의 똑같은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인주는 눈앞에 있는 형태보다 얼굴도 볼 수 없는 멀리 있는 존재인 멜로를 더 좋아한다. 하지만 형태에게 진짜로 관심이 있는 존재는 인터넷상의 별이가 아니라 그의 눈앞에 존재하는 인주다. 물론 우린 이들의 다른 반응이 가지고 있는 정보차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전 조건을 다르게 입력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만약에 인주가 처음부터 이런 사각관계의 정체를 꿰뚫고 있는 쪽이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가 관심을 가지는 쪽은 멜로였을 거다. 왜? 그게 로맨스의 재미있는 점이다. 우린 로맨스와 로맨스의 대상을 이상화시키고 순수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섹스나 결혼과 같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대상보다 로맨스 자체에 더 신경을 쓰는 사람에겐 이런 경향이 강하다. 이게 정말 성적 차이인지는 모르겠다. 인주 & 형태와 반대되는 경우도 꽤 많이 봤으니까.

멀수록 더 자극적인 로맨스도 있다

로맨스에 더 치중하는 사람들에겐 원거리 로맨스가 더 자극적이다. 원거리의 로맨스는 당사자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며, 우리가 가진 불쾌한 단점들을 사전에 봉쇄한다. 애정 표현의 전달 과정이 불편하면 불편할수록 이들의 로맨스는 더 ‘순수해지며’ 그 결과 더 강도도 높아진다. 19세기까지 가장 화끈한 러브스토리의 반 이상이 서간체였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 시대에서는 인터넷의 가상세계가 굼벵이 편지를 대신해 이런 순수화의 필터가 되어준다. 인터넷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의 육체처럼 불쾌한 것들을 사전에 제거해주면서도 은근히 기능이 많다. 아니, 요새 같은 브로드밴드 시대엔 순수주의자들을 불안하게 할 정도로 기능이 많다. 몸을 직접 부딪히지 않을 뿐이지, 데이트에서부터 섹스까지 할 수 없는 게 없으니까. 물론 익명성도 이제는 선택이다.

<후아유>의 세상은 선배영화 <접속>의 세계와 다르다. <후아유>의 연인들은 이제 육체를 가지고 있다. 디지털 정보들로 구성된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에 불과하지만 분명 육체는 육체다. 다행히도 이 육체는 화장실에 갈 필요도 없고 잘 때 코를 골지도 않고 쓸데없이 몸을 부대끼며 옆사람을 귀찮게 하지도 않는다. <후아유> 게임의 아바타는 컴퓨터의 전원만 끄면 사라진다. 인주/별이에게는 딱 좋을 정도의 존재감이다.

<후아유>에서 인주의 이야기는 비교적 전통적이다. 약간의 갈등을 겪는 동안 인주는 가상 캐릭터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실제 인물에게서 사랑을 찾는다. 비교적 건강한 결론이다. 물론 건강하다는 것은 인주라는 사람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좋은 선택이라는 이야기지, 특별히 절대적으로 옳은 일이라는 말은 아니다. 왜 건강함이 늘 유일하게 올바른 선택이어야 할까? 물론 건강한 선택이 나쁘다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인주의 삶은 이전보다 평탄해질 것이며 그 사람의 삶도 비교적 현실적인 단계로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형태/멜로의 이야기는 그것과 다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형태는 별이에게만 만족할 수 없다. 가장 큰 이유는 형태가 인주라는 자연인에 대한 정보를 훨씬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형태는 자기가 온라인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 화장품 모델 같은 미모에, 구식 순정만화에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성격과 과거를 지닌 전직 수영선수라는 걸 안다. 이걸 알면서도 이 친구가 과연 도시 저편에서 조종받는 이미지 조각에 만족해야 할까? 천만의 말씀이지.

잠깐, 여기 우리가 쉽게 놓치는 것이 하나 있다. 형태가 자연인 인주에게 별 문제가 없는 건 특별히 형태가 현실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닌 것 같다. 암만 봐도 인주에게는 이상적인 로맨스에 특별히 대단한 방해가 될 만한 불편한 요소가 적다. 성격에서부터 외모에 이르기까지, 인주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은 로맨스에 맞게 얌전하게 재단되어 있다. 처음부터 인주는 로맨스를 위한 버추얼 캐릭터다. 특별히 필터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인터넷의 필터는 인주라는 인물과 로맨스를 트는 데 방해가 된다. 시치미를 뚝 떼고 무장 해제된 상대방한테서 여벌 정보를 끌어내며 수작을 거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걸 빼면 말이지만. 결국 이런 식의 기성품 로맨스는 버추얼 게임일 수밖에 없다. <후아유>의 러브스토리가 소재가 가지고 있던 가능성에 비해 약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이 영화가 모범적인 장르물이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모범적인 장르물인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니지만 현실과 가상세계의 갭을 다루는 영화에서 현실의 힘이 약하다면 그건 꽤 큰 문제다.

<접속> <유브갓 메일> <후아유>의 밥맛 없는 남자들

지금까지 내가 본 세편의 온라인 러브스토리인 <접속> <유브갓 메일> <후아유>에서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게 초반이건 중반이건 결말이건, 늘 한쪽이 다른 쪽의 정체를 먼저 알아내고 그것을 관계맺기의 무기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또 무슨 우연인지, 세 영화 모두 그런 무기를 쟁취한 사람들이 모두 남자다.

이 세 남자들 모두가 나에겐 상당히 밥맛으로 보였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내가 케이틀린 켈리였고 막판에 내 인터넷 데이트 상대가 조 폭스였다는 걸 알았다면 ‘당신이기를 바랐어요’ 따위의 간드러진 고백 따위를 하는 대신 그 남자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방 날리고 나왔을 것이다. <접속>의 동현도 짜증나기는 마찬가지. 멀리서 수현을 바라보는 그 친구의 모습은 거의 간접 추행처럼 느껴진다.

형태는 어떻게 보면 그중 가장 악질이다. 조 폭스와 동현의 연애담은 적어도 시작할 때는 공평한 게임이었다. 그들이 상대방의 정체를 먼저 알아낸 것도 그렇게 음모의 결과는 아니다. 하지만 형태는 게임 시작부터 자신의 사각관계를 꿰뚫고 있었다. 나중에 이 친구가 공식을 따라 ‘진지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도 이 관계의 악독함을 특별히 가려주지는 않는 것 같다. 하긴 그게 죄책감이라는 드라마의 도구를 제공해주긴 하지만 <후아유>는 그렇게까지 캐릭터의 내면이 깊이있게 묘사된 영화도 아니다.

형태가 인주에 비해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그가 이들의 연애장소인 <후아유> 게임의 개발자였기 때문이다. 형태가 몇달째 땡전 한푼 못 만지는 친구라는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들의 세계에서 유산계급이다. 그는 그들이 만나는 세계를 통치하고 그 세계의 신민들인 베타 테스터들의 모든 온라인 자산을 관리한다. 어떻게 보면 인주와 형태의 관계는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관계보다 더 불공평하다. 결국 <후아유>의 이야기는 외양이 어찌됐건 변장한 귀족 청년이 가난한 시골 처녀를 농락하는 이야기와 특별히 다르지도 않다. 물론 내가 인주였다면 형태의 정체를 알자마자 주먹부터 날리고 봤을 것이다. 정말 그랬다면 형태에게도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형태의 정체가 밝혀지자 분노한 인주는 외친다. “이게 너에게는 게임이니?” 흠… 인주는 논점 근처에는 갔는데, 논점의 정곡을 찌르고 있지는 않다. 게임이라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애당초부터 이들의 연애 무대인 <후아유>는 게임이고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게임 파트너였다. 순수한 연애라는 것도 사실은 게임이다. 전통적인 연애담에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주인공인 두 연인들이고, 진지하게 인생을 생각하는 쪽은 여자주인공이 억지로 결혼해야 하는 나이든 뚱보 아저씨다. 두 연인들이 자기네 감정이 주는 쾌락을 좇는 동안 그 뚱보 아저씨는 후손을 낳아줄 실팍한 엉덩이의 젊은 여자와 결혼에 따른 감세 효과를 진지하게 계산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여러분이 두 진실한 연인들을 경박하다고 밀어붙이지도 않을 테니, 게임이 게임이라는 이유로 박해당할 이유는 없다.

진짜 문제는 이 러브스토리가 불공정 게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공정함이 지젤과 알브레히트 때와 특별히 다르지도 않은 성적 권력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건 더욱 불편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대비할 방법이 있다. 사랑과 전쟁은 모든 것들이 용납되는 게임판이다. 결국 여기서 처참하게 망가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끌어올 수 있는 소스는 모두 가져와 활용해야 한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진지한 연애를 할 생각이라면 그 세계에서 단순히 소극적인 사용자로 안존하며 만족하지 말기를. 방심하다간 언젠가 디지털 알브레히트에 넘어가 디지털 윌리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여러분이 예쁘게 디자인된 텔레비전 광고에 혹해서 순식간에 상대방의 모든 것을 용서해버리는 단순한 성격의 사람이라면 이런 경고도 필요없겠지만. 듀나 djuna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