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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무엇이 마틴 스코세이지를 매혹시켰나’, <플라워 킬링 문>의 배우 릴리 글래드스턴과 영화 전후의 실제 역사 알기
정재현 2023-10-26

시네마 호걸 마틴 스코세이지는 정의의 신 디케가 되어 손수 저울을 든다. 그가 저울 왼편에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로버트 드니로를 올린 후 우매한 백인 남성들을 206분간 가차 없이 골리는 사이, 저울 오른편에선 압도적인 존재감을 선보이는 한 여성 배우가 혀를 끌끌 차며 끈질긴 생명력과 영원한 사랑을 현현한다. 낯선 얼굴과 이름을 가진 이 배우는 홀로 저울에 서도 현대 미국영화의 얼굴과도 같은 두 남성배우를 합친 존재감을 자랑하며 무게의 평형을 이룩한다. <플라워 킬링 문>을 통해 전세계가 주목하는 배우, 릴리 글래드스턴을 소개한다. 한편 <플라워 킬링 문>은 실제 오세이지 원주민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알고 보면 더욱 재밌을, 영화 전후 오세이지 부족에게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도 정리해보았다.

릴리 글래드스턴에 주목하라

<플라워 킬링 문>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는 일견 남성배우들의 얼굴로 기억되지만 곰곰이 돌아보면 여성배우들에게도 새로운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한마당이다. 엘런 버스틴은 스코세이지의 유일하고 명백한 페미니즘영화 <앨리스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1974)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케이트 블란쳇은 <에비에이터>(2004)에서 캐서린 헵번 특유의 까끌한 속사포 악센트를 감쪽같이 구현해내며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샤론 스톤과 캐머런 디아스는 각각 <카지노>(1995)와 <갱스 오브 뉴욕>(2002)에서 폭력의 세계에 발 붙이고 사는 강인한 여성을 배우 특유의 이미지를 캐릭터 내부에 보존한 채 연기해냈고, 미셸 파이퍼위노나 라이더는 <순수의 시대>(1993)에서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연기한 아처의 존재를 조근조근 무력화했다.

스코세이지의 신작 <플라워 킬링 문>에서 군림하는 자는 단연 아메리카 원주민 몰리로 분한 릴리 글래드스턴이다. 영화를 본 이라면 공동 주연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공언한 “릴리가 영화 전체를 견인한다” (<버라이어티>)가 함께 공연한 배우를 치하하는 발언 이상의 진실임을 체감할 것이다. <플라워 킬링 문> 속 글래드스턴의 연기가 놀라운 점은 그가 지구력마저 연기해낸다는 데 있다. 남편인 어니스트가 치료를 빙자해 그의 몸에 극물을 주입해도, 소모성 질환이 육신을 잠식해와도, 목숨이 경각을 다투어도 몰리는 지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부족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길 멈추지 않는다.

<어떤 여자들>

글래드스턴은 몬태나주의 원주민 보호구역인 블랙피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배우가 되기 이전엔 발레리나를 꿈꿨고 최초의 원주민 출신 프리마 발레리나인 마리아 톨치프를 동경했다. 2012년 아르노 데스플레생의 연출작 <지미 P.>로 데뷔한 글래드스턴은 첫 스크린 진출작에서부터 베니치오 델 토로에 밀리지 않는 중량감을 내뿜었다. 글래드스턴이 <플라워 킬링 문>을 만나기 전 스크린 속에서 빛났던 순간은 단연 켈리 라이카트의 세계에 존재할 때였다. 라이카트와 <어떤 여자들>(2016), <퍼스트 카우>(2020)로 두 차례 호흡을 맞춘 글래드스턴은 특히 <어떤 여자들>을 통해 잊을 수 없는 얼굴을 관객의 뇌리에 새겼다. 글래드스턴이 연기한 계절 노동자 제이미는 우연히 벨프리 지역의 야학을 방문하게 되고 이곳에서 법대생 강사 베스(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만나 그에게 매료된다. 다이너에서 햄버거를 우걱우걱 먹는 베스를 골똘히 응시할 때, 일부러 읍내로 베스를 찾아간 후 다시 벨프리로 돌아갈 때 글래드스턴은 대사 없이도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찰나가 제이미의 인생에서 가장 격동하는 순간임을 입매의 미세한 떨림에 담아냈다. 글래드스턴은 <어떤 여자들>에서의 명연으로 총 20곳의 비평가협회상 조연 부문 후보에 올랐고, 이중 LA비평가협회를 포함해 총 8개의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또한 글래드스턴은 시나리오작가로도 재능을 보였다. 그는 2022년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영화제에서 공개된 <디 언노운 컨트리>(2022)에서 주연배우이자 원안 작가로 참여해 호평을 받았다.

<디 언노운 컨트리>

글래드스턴은 2020년 <플라워 킬링 문>의 캐스팅 디렉터 러네이 레인즈(레인즈는 미국 원주민 배우 캐스팅 전문가다.-편집자)와 엘런 르위스로부터 동시에 러브콜을 받았다. 글래드스턴은 그길로 셀프 오디션 비디오를 찍어 스코세이지에게 보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며 영화산업이 멈추자 답신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역병과 무더위가 동시에 창궐하던 2020년 8월, 글래드스턴의 통장 잔고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배우로서 수입원이 끊긴 글래드스턴은 생계를 위해 <플라워 킬링 문>을 잠시 마음에서 접어두기로 결심한다. 글래드스턴은 데이터 분석 전문가 양성과정을 신청했고, 벌 덕후인 본인의 특기를 살려 미국 농무부 주관 말벌 퇴치 계절 사업에 동참할 계획이었다. 이때 스코세이지로부터 캐스팅을 위한 미팅 제안을 받았다. 스코세이지와 디캐프리오 그리고 글래드스턴은 화상 3자대면을 가졌고, 운명처럼 몰리 카일리의 실제 생일인 12월1일 글래드스턴은 수화기 너머로 캐스팅 확정 소식을 들었다. (디캐프리오는 글래드스턴의 캐스팅에 대해 “마티와 수차례 작업했지만 그가 릴리를 만난 후 ‘1분도 지체할 수 없어!’라며 캐스팅을 서두르는 모습은 처음 봤다”고 밝힌 바 있다.)

만드는 작품마다 화제 일색인 명장의 영화에 주연으로 캐스팅된 글래드스턴은 데뷔 이래 가장 주목도가 높은 한철을 보내고 있다. 영화 한편으로 미국 원주민 전체를 대표하는 얼굴이 되고, 이르지만 오스카 주연상 후보 지명은 물론 수상 가능성도 점쳐지는 지금 글래드스턴은 본인의 연기처럼 담담한 소감을 전한다. “2020년대에 와서 미국 전역이 미국 원주민이 만든 원주민의 서사에 관심을 갖는 현상이 흐뭇하다. 나를 포함한 원주민 배우들은 수년간 ‘당신들은 특정 관객에게만 소구되는 타입이라 범대중에게 먹히기엔 무리가 있다’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내가 속한 사회의 사람들은 나를 보며 신나 한다. 미디어에서 자신들의 얼굴을 한 배우가 자신들의 서사를 재현하고 있어 즐거운 것이다. 친구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나도 덩달아 즐겁다.” 글래드스턴과 그의 친구들이 즐거워할 일은 어쩐지 계속될 것만 같다.

오세이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플라워 킬링 문>

릴리 글래드스턴은 <플라워 킬링 문> 속 오세이지 원주민 묘사에 관해 “석유로 축적한 막대한 부를 누리는 오세이지 원주민의 모습을 미디어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이 미국 원주민에 관한 인식을 바꾸길 바란다”고 말했다. 당시 오세이지 카운티에 살던 이들이 석유로 벌어들인 돈은 19세기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때의 금 수확량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고 전해진다.

오세이지족이 석유 부호가 된 과정은 상당히 어수선하다. 본래 오세이지족은 미주리주, 캔자스주를 포함해 서부의 로키산맥까지 미국 중서부 전역의 영토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하지만 19세기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오세이지족에게 영토의 일부를 국가에 반환할 것을 강권했고, 오세이지족은 평생 살아온 1억 에이커(약 1224억평)의 영토를 포기한 채 캔자스 남부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이주민들이 오세이지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주민들은 무력으로 오세이지족의 땅을 차지하고 무덤을 약탈했다. 오세이지족은 새로운 땅을 찾아 또다시 강제 이주의 길에 올랐다. 이들은 캔자스 남부의 체로키 지역을 새로 사들이지만 미국 정부는 오세이지족의 주요 식량인 버펄로 멸절 정책을 펼치고, 원주민들에게 백인 문화에 동화한 삶을 살 것을 강요했다.

이 무렵 오세이지족은 문화 혼돈의 급류에 휘말린다. 이 시기는 <플라워 킬링 문>의 오프닝 시퀀스에 흐르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속 “아이들은 백인에게 가르침을 얻고 우리의 방식은 모르게 될 것”이라는 한탄이 나올 시절과 맞물려 있다. 정부는 원주민들을 백인 문화에 동화시키기 위해 배당금 지불을 중단하는 등 강제적 방법도 불사했다. 이후 루스벨트 정부는 백인 동화 정책을 강화하며 토지 분할 정책을 펼치고, 오세이지족 보호구역의 땅을 분할해 새로 만들 오클라호마주에 편입할 계획을 세운다. 오세이지족은 정부와 얼마간 협상을 벌인 결과, 자신들이 분할한 땅에서 나온 자원은 모두 오세이지족의 소유가 된다는 계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그 땅 아래엔, 젖과 꿀보다 유용한 석유가 흐르고 있었다.

백인들에게 땅을 팔아넘겨도 오세이지족은 땅 아래 자원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었으므로 누구보다 부유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플라워 킬링 문>의 원작 논픽션 <플라워 문>에 따르면 당시 오세이지족은 “산을 인구수로 나눴을 때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라 불렸다. <플라워 킬링 문>은 오세이지족과 정부의 계약 체결 이후 오세이지에 몰려든 백인들이 얼마나 원주민들을 조직적으로 괴롭히고 연쇄적으로 살인하며 이들의 부를 앗아가려 했는지 통렬히 그린다. 좀처럼 진척이 없는 연쇄살인을 수사하기 위해 당시 미 법무부 산하 수사국의 국장 에드거 후버(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2011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작 <J. 에드가>에서 에드거 후버를 연기한 적이 있다. 그가 <플라워 킬링 문>에서는 후버의 수사 표적이 되는 어니스트를 연기한다는 점은 여러모로 공교롭다.-편집자)는 수사관 톰 화이트를 파견보내 오세이지의 원주민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하도록 한다. 수사국은 사건 해결에 성공하고, 이들의 공로는 훗날 미 연방수사국, 즉 FBI의 창설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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