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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수 좌파 감독 켄 로치의 영화세계
2002-05-30

명랑 소녀, 어떻게 노동자로 성장하는가

켄 로치는 영국뿐만 아니라 현대 유럽을 대표하는 좌파감독이다. 1962년 의 견습감독으로 영화경력을 시작한 그는 1968년 첫 극장용 장편영화 <불쌍한 소>(Poor Cow)를 만든 이후, 한편으로는 검열과 싸우고 또 한편으로는 부족한 제작비 마련을 위해 분투하면서 일관되게 자신의 영화에 노동자 계급의 목소리를 담아왔다. 그의 비판적 시선은 ‘자본’과 보수당을 넘어 제도화된 노동당을 겨냥하고 있을 만큼 철저한 것이었지만 그의 영화세계는 결코 어둡거나 무겁지 않으며, 오히려 밝고 경쾌하다. 그만큼 노동자 계급과 하층민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늘 따뜻한 것이었고, 그의 작품들은 ‘인물의 내면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기록’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한편 그의 영화세계는 30년대 스페인내전을 다룬 95년의 <랜드 앤드 프리덤> 이후 영국 노동자 계급의 일상을 벗어나 ‘세계화’된다. <빵과 장미>는 이러한 그의 영화경력이 온전하게 담겨 있는 작품이다.

성·언어·계급, 세 개의 장벽

<빵과 장미>는 생존을 위해 미국으로 밀입국한 멕시코 처녀 마야가 LA의 고층 빌딩 청소부로 취업하여 노조 결성 투쟁에 가담하면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계급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인 미국의 대도시 LA. 그곳에서 불법 이민한 멕시코 빌딩 미화원 처녀인 마야는 성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그리고 계급적으로도 철저하게 약자이다. 그녀에게 여러 겹의 장애물은 어찌 보면 필연인 셈이다.

그녀가 첫 번째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은 성적 착취의 위험이다. 그녀는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남미 출신 남자들에게 인신매매당한다. 마야는 대담한 기지를 발휘하여 이 위기를 벗어나는데, 그 기지의 비밀은 적의 무기를 역이용하는 것이다. 자신을 범하려는 남자에게 한술 더 뜨는 노골적인 추파를 보내 남자의 경계심 무력화시키기. 남자가 감금의 도구로 사용한 열쇠를 빼내어 탈출의 무기로 삼기. 강한 자를 바보로 만드는 약자의 지혜(이러한 모습은 이후 인종적, 계급적 장애물을 넘어서는 과정에서도 반복된다).

마야가 두 번째로 통과해야 하는 장애물은 인종의 장벽이다. 밀입국자인 그녀는 쉽사리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다. LA의 한 고층 빌딩으로 당당하게 청소하기 위해 들어가는 언니와 남미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마야. 서성이는 그녀를 쫓아내며 흑인 경비원은 “내 말(영어)을 알아듣느냐”고 묻는다. 언어(인종)적 구획이 곧 계급적 구획이 되는 미국사회. 그 장벽 앞에서 곤경에 처해 있는 마야를 위해 지나치던 동료 남미인은 경비원이 알아듣지 못하는 스페인어로 그를 욕함으로써 통쾌한 복수를 해준다. 약자인 남미인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사장과 싸우기 위해 영어를 배워야” 하지만, 강자인 미국인들은 그들의 언어를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보가 되는 것이다(이러한 통쾌한 복수극은 나중에 경찰에 연행된 남미 출신 노동자들에 의해서도 반복된다. 이름을 묻는 경찰에게 노동자들은 태연하게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영웅들- 멕시코 농민혁명의 지도자인 에밀리아노 사파타, 판초 비야 주니어, 니카라과 민족해방투쟁을 이끈 아우구스토 산디노-의 이름을 둘러대며 즐거워한다).

언니 로사의 도움으로 꿈에 그리던 빌딩 미화원으로 취직하게 된 마야가 부딪히는 세 번째 관문은 계급적 장벽이다. 취업의 대가로 첫 월급의 상납을 요구하는 중간 관리자. 법적으로 보장된 최소한의 권리인 의료보험 혜택도 받지 못하며, 한번의 지각만으로도 해고될 수 있는 ‘미조직 노동자’의 암담한 현실. 마야로 하여금 이러한 계급적 장벽을 극복하도록 이끄는 힘은 두 가지이다. 미조직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지원/지도하는 인권변호사 샘. 그녀에게 노동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며, 자신의 해고를 감수하면서까지 동료를 배신하지 않는 의연함을 보여준 선배 노동자들. 이들은 다시 한번 약자의 지혜를 발휘하여 노조 건설 투쟁을 승리로 이끈다. LA에서 가장 유력한 건물의 소유주와 그 건물의 가장 잘 나가는 입주자인 연예인 전문 변호사들. 이들의 최대 약점은 ‘체면’이다. 노동자들은 건물주의 평화로운 아침식사 자리에 불쑥 나타나 골탕을 먹이고, 변호사들의 합병 파티에 청소도구를 들고 밀어닥쳐 엉망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고용주인 청소용역회사에 압력을 넣어 승리를 이끌어낸다.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에 집중

가장 암담한 현실에 놓인 한 인물의 이야기를 이토록 밝고 경쾌하게 풀어내어 보편적인 재미와 감동을 이끌어내는 켄 로치 감독의 화법. 그는 정치적 일관성만큼이나 그러한 화법으로 인해 독특한 감독임에 틀림없다. 켄 로치 감독이 특정한 계급의 이야기를 일관되게 다루면서도 보편적 정서를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에 집중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진정한 노동자 계급의 목소리가 담겨 있지만, 섣부르게 적개심과 분노를 선동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에서 ‘적’은 전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빵과 장미>에서 진정한 적인 ‘미국 자본’(청소용역회사 엔젤사의 자본가)은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싸움은 그 대리인(남미인 중간관리자, 흑인 경비원)들과 이루어지며, 그들이 공략하는 것은 중간층(연예인 변호사들)이다. 진정한 적인 미국(자본)은 전면에 나타나지 않으며 그 우아함을 잃지 않은 채 대리전을 펼칠 뿐이다(절도죄로 기소된 마야를 구속하지 않고 국외 추방시키는 미국식 온정주의! 그러나 이 온정적 주인인 미국은 20세기 초반 미국 이민 노동자들의 투쟁 구호였던 “빵과 장미”를 21세기 이민 노동자들이 여전히 외치지 않을 수 없도록 내버려둘 만큼 그렇게 게으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 투쟁의 과정은 치열하지 않고 밝고 경쾌하기까지 하다. 그 대리인들은 철저히 웃음거리로 만들면 족한 상대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정치의식의 불철저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변혁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의 근본적인 ‘건강성’이며, 그는 따뜻한 시선으로 노동자들이 살얼음판 같은 자본주의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그 건강성을 잃지 않고 자신의 주체성을 확보하는지를 진지하게 추적해간다. 하지만 그는 그 건강성을 거짓된 환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일상 속에서의 노동자들은 대개는 불완전하고 나약한 존재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동료를 배신하며(<빵과 장미>에서의 마야 언니 로자), 자신의 목적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레이닝 스톤>에서 실직자들의 절도와 간접 살인, <빵과 장미>에서 마야가 저지르는 절도). 그러나 감독은 생존을 위한 그들의 배신과 범죄는 정치적으로 용서될 만한 것(<빵과 장미>에서 마야와 동료 노동자들은 배신자인 로사를 따뜻하게 받아들인다)이며, 심지어 종교적(도덕적)으로도 용서될 만한 것(<레이닝 스톤>에서 천주교 신부는 자신의 죄- 간접 살인- 를 고백하는 실직자에게 그것이 죄가 아님을 설득한다)임을 가장 감동적인 방식으로 그려낸다.

이러한 점은 각각 반파시즘 투쟁과 반제국주의 투쟁을 다루고 있는 <랜드 앤드 프리덤>과 <칼라 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랜드 앤드 프리덤>에서 적으로서의 파시스트들의 모습은 제대로 나타나지 않으며, 단지 전선 너머에서 총성과 포성, 야유를 보내고 있을 뿐이다. <칼라 송>에서도 적으로서의 미국은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콘트라 반군의 잔학상은 칼라의 회상장면을 통해서만 언뜻 비칠 뿐이다. 다시 말해 그는 적과의 싸움을 통한 극적 긴장감의 힘을 빌려 이야기를 끌어가는 쉽고 편한 길을 택하지 않으며, 주체들이 어떻게 자신의 내부에 드리워진 적의 그림자를 극복하며 성장하는가를 끈기있게 추적해가는 어렵고 힘든 길을 택하고 있다. 그것은 일견 맥빠져 보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의 진정성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계급적 성숙

<빵과 장미>에서 그의 진정성은 노동운동가 샘과 노동자들의 관계 속에서도 나타난다. 노동운동가 샘은 실수로 자신의 강의 메모를 현장에 남기는 불철저함을 보이며, 그로 인해 고참 노동자 베레타는 해고된다. 그의 불철저함이 낳은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것은 동료의 생존을 위해 부당해고 철회투쟁에 합류하는 동료 노동자들의 힘이다.

영화 속에서 가장 극적이며 감동적인 장면은 배신을 질타하는 마야에게 하는 언니 로사의 고백장면이다. “집 나간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서, 동생 마야의 일자리를 위해서 몸을 팔았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로사. “가족과 동생을 위해 남편과 자식들에게 배신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은 결코 ‘배신자’라는 말이 두렵지 않다고 절규하는 로사. 그 고백을 듣는 순간 마야는 샘이 “나는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일하는 샘”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순간 로사가 왜 “나는 로사를 위해 일하는 로사”라고 당당하게 맞받아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한다. 그리고 그만큼 인간적으로 성숙해진다. 출국당하는 마야를 배웅나온 로사를 맞이하는 동료 노동자들의 따뜻한 시선, 차창 밖으로 쫓아오는 언니를 화해의 눈물로 응시하는 마야의 시선. 그 속에는 진정한 계급적 성숙의 빛이 담겨 있다.

골수 좌파감독 켄 로치가 그려낸 멕시코 소녀 마야의 이야기는 최근의 인기 TV드라마 <명랑 소녀 성공기>만큼이나 밝고 경쾌하며 희망적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곳곳에 세상의 모든 허위의식과 맞서 싸우고자 하는 그의 고뇌가 스며 있고, 그래서 그만큼 ‘깊은 슬픔’이 배어 있기도 하다.변성찬/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