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마루에 누워 막대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 빨간 줄무늬 티셔츠와 초록색 고무줄 치마를 입은 채 맨발로 해변을 걷고 싶다. 음악 시간에 배운 합창곡을 소리내어 불러보고 싶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를 보며 우리는 어딘가 다른 곳으로 떠나는 꿈을 꾼다. <요시노 이발관>(2003), <카모메 식당>(2006), <안경>(2007),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2012)로 이어져온 영화들이 슬로 라이프 무비, 힐링 내지 치유계 영화라 불려왔던 이유다.
달콤한 환상계에서 비정한 현실계로
5년 만의 신작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2017)는 치유계 판타지에서 제법 진지한 리얼리즘쪽으로 감독의 세계가 살짝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사이 <NHK> 드라마 <낭독가게>를 만들기는 했지만 고립된 공간에서 나카하라 주야의 시 낭독을 통해 상실감을 치유해나가는 방식은 전작들과 연장선상에 있었다. 싫어하는 세계를 떠나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는 전작들과는 분명 차별적이다. 왕따, 젠더 차별, 육아 방치, 노인 돌봄 등 일본 사회가 가진 문제가 영화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젖꼭지가 살살 아파올 나이, 11살 소녀 토모(가키하라 린카)는 때때로 육아를 방치하는 엄마의 가출로 인해 외삼촌 마키오(기리타니 겐타)에게 의지한다. 마키오는 연인인 린코(이쿠타 도마)와 동거 중인데, 그녀는 성전환을 한 트랜스젠더다. 토모와 마키오·린코 커플의 동거는 정상가족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고 불편하다. 안 그래도 가난한 한부모가정 출신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위축되어 있던 토모는 퀴어 커플과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완전한 왕따로 낙인 찍힌다. 한편 자신이 바라는 여성의 몸으로 태어나지 못한 린코는 성전환 수술 후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린코는 주로 다른 여성들에게 노골적 멸시를 받는데, 토모의 친구 엄마, 토모의 친모, 병원 간호사 등 그녀에게 적대적인 세력은 여성들, 특히 엄마들이다. 토모와 린코가 번뇌와 슬픔을 다스리고 자신을 수련하는 방식은 뜨개질이다. 린코는 성전환 수술 후 뜨개질을 시작했고, 만들어놓은 작품이 108개가 되면 이를 태우고 호적을 여성으로 바꿀 결심을 한다. 린코에게 뜨개질을 배운 토모도 억울하고 화날 때 뜨개질을 하기 시작한다. 뜨개질을 한다는 것, 그것은 마음속 부처를 만드는 일이자 내면에 성전을 짓는 일이다.
코뮌주의적 상상력이 부재하는 폐쇄계
그런데 뜨개질의 의미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린코에게 뜨개질은 자신이 버린 남근에 대한 공양의 일환이며, 토모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모성에 대한 갈망의 행위다. 영화는 포근한 스웨터나 목도리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이 뜨는 것은 남근과 유방의 모양이다. 이는 부재의 대상이자 갈망의 대상, 때로는 애증의 대상이다. 린코는 없는 유방을 갈망하였고, 있던 남근을 제거하였다. 어린 토모는 엄마의 폭신하고 따스한 가슴을 갈망한다. 그런데 뜨개질은 명상의 방식으로 영화 <안경>에도 등장한 바 있다. “뜨개질이란 공기도 함께 짜는 것”이라는 타에코(고바야시 사토미)의 대사를 기억해본다면, 색(色)을 상징하는 남근과 유방은 공(空), 즉 공기로 가득한 부재에 가까운 것일지 모르겠다. 전작 <안경>이 산이 아닌 해변에서 하는 템플스테이영화라 평가받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에도 불교적 상징이 도저하다. 자기 수양을 통해 번뇌에서 해탈한다는 것. 이는 배타적 사회와 인간관계의 모순에 맞서지 않겠다는, 나아가 토론과 대화가 아니라 자기 처벌에 가까운 묵언수행의 태도로 모순을 묵인하겠다는 태도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기억해보자면 오기가미의 영화는 시민사회에 무관심하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기꺼이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시민사회의 자율성보다는 개인 영혼에 안식을 주는 명상과 초월의 방식을 택해왔다. 가령 <아메리칸 퀼트>(1995)의 퀼트나 <야근 대신 뜨개질>(2015)에서 뜨개질이 여성노동 공동체가 수행하는 부드러운 저항의 방식이었다면,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의 뜨개질은 색즉시공의 불교적 수행을 통해 모순을 망각하는 방식인 셈이다. 방식의 윤리적 정당성을 따지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이번 영화가 다루는 젠더 차별, LGBT 정체성, 육아 방치, 돌봄 노동, 집단 따돌림 등의 사회현상은 내면에의 몰두를 통해 해소되는 갈등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불교적 상징이 도저한 무성애적 퀴어영화
육아 방치를 다루고 있기에 서구권에서 이 작품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2004)와 동반 언급되곤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복지 사각지대 문제를 다룬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1991), 게이 액티비스트를 다룬 <그가 없는 8월이>(1994) 등 다큐를 제작했던 시절에 품었던 문제의식을 극영화로 전환한 후에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왔다. 아동과 노인에 대한 돌봄 노동에 대한 오기가미 감독의 입장은 그저 심정적 감상주의에 머물고 있는데, 특히 린코의 직업이 요양간호사라는 설정에서 이는 더 두드러진다. 마키오는 요양소에서 모친의 몸을 닦아주는 요양사 린코에게 첫눈에 반해 연애를 시작했다. 린코는 노모를 돌보고 조카를 양육하는, 늘 먹을 것과 잠자리를 챙기는 전형적인 돌봄 노동의 주체다. 영화에서 그녀가 연인에게 품고 있는 갈망은 성적인 것이라기보다 그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모성적 열망뿐이다. 한편 이 영화는 동성애자와 유사가족을 이룬다는 설정에서 이누도 잇신의 <메종 드 히미코>(2005)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누도 잇신의 작품은 육체성과 욕망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코뮌적 연대의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오기가미는 인물 각자가 모순의 자리에 처한 지점에서 영화를 끝맺는다. 이는 열린 결말이기보다 마음수련에 몰두하며 모순을 회피하는 자세에 가깝다.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는 한층 진지한 태도로 현실적인 문제에 골몰하는 듯 보인다. 결과적으로는 육체성이 소거된 지극히 위생적인 무성애적 퀴어영화로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완고한 뉴에이지적 명상주의를 견지하고 있다. 오기가미의 영화들이 유연한 일탈 혹은 관용의 영화라기보다 완고한 고립주의의 영화로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기가미 감독은 현실의 공간을 떠난 무중력적이며 평화롭고 팬시한 공간을 창조해왔다. 요시노마을, 헬싱키, 요론섬 그리고 고양이로 가득한 주택가. 순풍이 불어와 코끝을 간질이고, 부드러운 햇살이 굳은 마음도 누그러뜨릴 듯한 장소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오기가미 감독은 가르치거나 논쟁하지 않았다. 격리된 공간으로 떠나서 영혼의 평안을 누리면 되기 때문이다. 고독한 일상을 탈출하는 오기가미 특유의 백마술적 판타지는 어쩌면 현실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을 위안하는 플라시보 같은 것이 아닐까. 엉뚱하고 유연하며 느긋한 삶의 태도는 어쩌면 세계에 대한 완고하고 경직된 반응은 아닐까. 모호하게 일어났던 의문을 중심으로 오기가미의 신작 영화를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