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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아이피>와 한국영화 속 ‘식구’끼리의 수컷어 사용 경향에 대하여

언어가 드러내는 ‘숨겨진 위세’

<브이아이피>의 촬영과 그 결과물에 대해 긴말 더할 생각은 없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 영화는 욕망이 필요를 압도한 전형이다. 인물의 악마성을 소개하는 단계에서 카메라는 신의주와 서울의 강간·고문·살해 피해 여성의 나신을 각각 납득할 수 없는 수직 부감으로 내려다본다. 카메라의 시선은 등장인물의 그것이 아닌, 인물의 정수리 위에서 줄곧 전지적 권능을 유지한다. 부감과 클로즈업이 수차례 반복된다. 희생자를 촬영한 증거 사진의 노출 역시 빈번하고 또렷하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이 살해되는 장면에서도 의도적 고문과 신체 훼손이 이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원칙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제작진의 취향은 악역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한 소용을 넘어 영화적 윤리를 지키지 못한다. 세상에는 하드고어 무비도 있고 포르노도 있으며 모든 건 관객의 선택이라고 눙쳐도 될까. 8월 28일 기준 이 영화의 전국 스크린 수는 886개로 현재 상영작 중 가장 많다.

언어에 담긴 젠더 인식

<브이아이피>의 화면에 대해선 꺼낼 만한 비평의 언어가 내겐 더이상 없다. 이 글에서는 <브이아이피>를 계기로 충무로 범죄 소재 영화의 대사에 대해 좀더 짚어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한국영화의 줄기찬 경향이 있다. 최근 몇년간 우리 사회에선 늦게나마 페미니즘과 관련한 논의가 상대적으로 성숙해가는 중인데, 충무로 제작진의 상업적 고려는 어떤 대사를 생산하며 나아가고 있는가. 이제는 작품의 경쟁력을 넘어 그 언어에 담긴 젠더 인식을 살필 때가 되지 않았는가. 널리 알려진 <친구>(2001)의 대사로 시작해보자.

“친구 아이가.”

“내는 뭔데? 내는 니 시다바리가?”

동수(장동건)는 ‘시다바리’의 첫 음절을 발음할 때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자신은 시다바리가 아님을 강조한다. 동수가 이렇게 열받은 이유가 중요하다. 준석(유오성)은 여자친구 진숙(김보경)을 상택(서태화)과 한방에 넣었다. “상택이한테 뭣 땜에 그리 하노?”라고 묻자 “니 묵으라고 부른 거 아이다”라는 답이 돌아온다. 준석에게 여성은 사나이의 우정을 위해 건네는 성적 소유물이다. 동수에게 진숙은 서열 2위인 자신이 차지할 차례였기 때문에 일인자에게 대들 만큼 열받았다. 짝짓기와 서열. 수컷들이 종족 번식과 개체 유지를 위해 가장 목을 매는 두 가지다. 1920년대에 유성영화가 등장한 이래 대사의 상업성이 중시되지 않은 적이 있었을까마는 <친구> 이후 21세기 충무로처럼 수컷들의 언어가 반복적이고 광범위하며 장기간에 걸쳐 상업적 고려의 대상이 된 경우는 드물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한국영화 속 남성성 가득한 언어들을 이 글에서 ‘수컷어(語)’라 칭하기로 하자.

대사만으로도 팬덤이 형성된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2013)에서 브로맨스 감성과 함께 주로 등장하는 것은 위세의 언어다. “드루와”(내 휴먼 스케일 반경 안으로 들어와 덤벼)와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목숨 구걸하지 않고 하늘이나 보며 죽어야겠네)가 그렇다. 많은 짐승이 머리나 입 부분을 커 보이게 하는 몸짓으로 위세를 드러내는 것처럼 남성은 위세의 언어로 담대함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이런 습성은 실제로 인류 역사에서 남성의 생존, 즉 서열과 짝짓기 경쟁에서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한 사회가 폭력에서 멀어질수록, 문명에 가까워질수록 이런 경향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다.

<브이아이피>가 수컷들의 조직을 완성하기 위해 인물에 부여한 대사의 기능은 간단한 표에 담아도 될 만큼 도식적이며 물리적이다. 채이도(김명민)가 소개되는 극 초반 경찰서장(최정우)과 대화하는 장면. 고상하게도 난초 키우기가 취미인 서장은 이 2분10초짜리 대화에서 “씨○”, “졸×” 등을 동반한 다채로운 욕설을 열 세 차례 섞어 말하며 총경 계급에 어울리지 않는 수컷어를 내뱉는다. 연구에 따르면 남성이 언어 위세를 부리는 대표적 방식이 표준어와 격식어를 버리는 것이다. 언어학자 매튜 J. 고든은 ‘위세 지향의 언어 변이와 변용’에 관한 연구에서 중·상류층 남성들이 위세를 보이기 위해 하류층의 발음과 어휘를 택하는 데 주목한다. 그런 위세의 언어가 “하류 계층의 이미지인 ‘남성다움’의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사회언어학: 언어와 사회, 그리고 문화>, 백경숙 외 지음). 한편으로 서장실에서 이어지는 이 대화는 그들이 ‘식구’임을 강조한다(유하 감독의 <비열한 거리>(2006)에서 조직원들이 모여 “식구가 뭐여. 같이 밥 먹는 입구녕이여”라고 읊는 그 ‘식구’ 말이다). 피터 트루질은 남성이 여성보다 비표준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현상을 계량화한 다음 “특정집단의 가치를 부각시켜 유대감을 표현함으로써 ‘숨겨진 위세’는 일상어로서 사회적 가치가 된다” (앞의 책)고 짚었다. ‘식구’끼리 수컷어를 사용하며 남성 사이의 유대의식을 제고한다는 뜻이다.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각본 박훈정, 2010)와 <베테랑>(2015)에 공히 등장하는 경찰 총경(천호진)은 이 지점에서 <브이아이피>의 서장과 그 기능이 같다. 조직 내 유대의식을 통해 함양되는 ‘우리가 남이가’식 비논리는,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1) 전반에 걸쳐 현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브이아이피>의 초반부 말끔한 정장 차림의 국정원 팀장 박재혁(장동건)과 동료(박성웅)가 나누는 대화 역시 같은 층위에 배치된, 욕설 가득한 장면이다. 제복을 차려입은 채이도와 서장의 대화 장면과 마찬가지로, 동료의 역촬영(reverse shot)에 욕설이나 남성적 비유 표현이 더 많다. 극 전개를 주도하는 채이도와 박재혁의 ‘식구’들이 대사로 인물의 위세를 확대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너나 내 모가지는 한여름 깨진 수박 되는 거야” 같은 대사는 그저 말장난이 아니라 이런 맥락에서 수컷어다.

뭐가 멋있나?

채이도는 서장과 대화를 나눈 바로 다음 장면에서, 박재혁은 동료와 대화를 나눈 직후에 부하 팀원을 호되게 조진다. 이로써 남성들의 극중 조직문화는 초반부에 완성된다. 부하들은 그 위계에 감히 토 한마디 달지 못한다. 채이도의 부하 형사(오대환)와 박재혁의 국정원 팀원(태인호)의 충성심을 보라. <부당거래>의 충직한 형사 대호(마동석)가 곧바로 연상되는 이 캐릭터들은 ‘형님’의 말이라면 어떤 불합리한 지시도 조건 없이 따른다. 개인 의견이나 사생활은 없다. 박훈정 감독이나 류승완 감독은 이걸 멋있다고 여기는 걸까? 분명한 점은 윤종빈 감독이나 유하 감독의 작품과 달리 “그 같잖은 대가리로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알았어?”라며 부하들을 짓누르는 채이도는 ‘멋있는’ 역할이다. 극중 팀원들의 부인이나 딸들도 그렇게 생각할지 의문이다.

8월 말 기준 올해 개봉한 한국 상업영화는 총 35편(영화진흥위원회 구분 다양성영화와 애니메이션, IPTV용 에로영화 제외)이다. 이 가운데 검·경·조폭이 등장하는 범죄 소재 영화는 전체의 40%를 차지하는 14편이다. 흥행 상위 10편 중에는 <공조> <더 킹> <프리즌> 등 6편이나 된다. 해마다 편차가 있거니와 내용상 경향에도 변화가 있지만, 충무로의 특정 소재 편중 경향은 수그러들 줄 모른다. 수사기관-범죄 집단 특유의 남성 언어가 한국영화 제작의 지배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내 상영관의 절반에서 수컷어들이 울려 퍼지고 있다. 언어와 세계관이 서로의 꼬리를 문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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