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부는 바람>(2014)은 <달팽이의 별>(2012)을 찍었던 이승준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다. 두 영화는 공통점이 많다. 첫째는 시청각장애인의 일상을 찍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장애를 통해 인간의 감각에 대해 사유케 한다는 점이고, 셋째는 장애에서 출발하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던진다는 점이다.
빛도 소리도 없는 예지의 세계
<달에 부는 바람>은 예지 엄마의 일기를 비추며 시작된다. 일기에는 예지가 무엇을 느끼는지 관찰한 내용들로 빼곡하다. 예지는 시각도 청각도 없이 태어났다. 이제 청소년이 된 예지는 어떻게 세상을 느끼고 인지할까. 예지의 세계는 어떤 것이며, 엄마는 어떻게 예지와 소통할 수 있을까.
예지는 숟가락으로 밥을 먹을 줄 알고, 혼자 신발을 신을 줄 안다. 처음부터 알았던 것은 아니다. 헬렌 켈러의 전기영화 <미라클 워커>(1962)나 인도영화 <블랙>(2005)을 보면,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가장 기초적인 사회화 훈련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예지의 변화를 꼼꼼히 기록하며, 예지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엄마의 일기는 과학자의 연구노트 같다. 엄마는 예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나 다른 장애인 부모를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만나지 못했다. 2010년에 <달팽이의 별>을 촬영하던 감독을 처음 만난 예지 엄마는 2013년에 감독이 다큐멘터리 촬영을 제안하자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예지의 상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거나, 앞으로 예지와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 생긴다면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예지 엄마의 생각은 전인미답의 길을 가는 학자의 심정과 흡사하다.
장애와 비장애인 사이의 차이보다 큰 장애인들 사이의 차이
그런데 이상하다. 19세기에 태어난 헬렌 켈러는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는데, 왜 예지 엄마는 예지의 교육을 의논할 데가 없었을까. 첫째는 같은 시청각장애인이라 하더라도 장애의 정도와 장애 발생 시기에 따라 굉장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회적 환경의 차이 때문이다.
헬렌 켈러는 생후 19개월에 시각과 청각을 잃은 중도장애인이다. 생후 18개월 전후로 언어발달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는데, 헬렌 켈러의 경우 장애를 입기 전에 언어의 개념이 생긴 것이다. 설리번을 만난 7살 때의 헬렌 켈러는 집 안에서 간단한 수화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했다. <달팽이의 별>의 조영찬씨는 태어날 때 아주 약한 시력을 가지고 있어서 사물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청력도 점차 잃어 현재는 전맹에 고도난청이다. 그러나 조영찬씨는 훈련을 통해 말할 수 있으며, 점자책을 통해 많은 지식을 쌓았다. 현재는 문자를 점자로 출력해주는 단말기 ‘한소네’를 통해 문자 텍스트를 읽으며, 가까운 사람과는 손가락 위에 점자를 두드리는 점화를 통해 대화한다.
<달팽이의 별>에서 영찬씨가 보여주었던 시청각장애인의 세계는 고요하고 명상적인 것이다. “사람의 눈, 귀, 가슴은 최면 또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거나 자아의 늪에 빠져 세계를 전혀 모른 채 늙어간다. 그런 눈과 귀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나처럼 우주인이 되면 된다.” 영찬씨의 자작시는 시청각장애인이 결핍과 무능의 존재가 아니라, 일반인과 전혀 다른 감각을 지닌 채 우주의 본질에 다가서는 존재로 보이게 한다. 영찬씨는 나무를 끌어안고 천천히 나무 냄새를 맡는다. 손끝으로 빗방울을 느끼며, 물과 모래 속에서 평안한 몸의 감각을 느낀다. 촉각과 후각으로 사물을 인지하는 영찬씨는 한번 악수한 사람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낸다. 영찬씨는 아내의 도움으로 히브리어와 신학을 공부하며, 시와 수기를 쓴다.
같은 시청각장애인이라고 하지만 헬렌 켈러나 영찬씨가 경험하는 세계와 예지가 경험하는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태어나서 한번도 사물을 본 적이 없고,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예지는 언어에 대한 개념이 없다. 엄마는 교육 시기를 놓친 것을 안타까워한다. 복지기관과 교육기관은 서로 떠넘겼으며, 시각장애인학교와 청각장애인학교도 서로 떠넘겼다.
시청각장애인들은 19세기 헬렌 켈러가 살던 미국보다 지금의 한국이 시청각장애인들이 교육받고 소통해나가기에 훨씬 열악한 환경이라고 말한다. 한국에는 미국의 헬렌 켈러 국립센터(HKNC)와 같은 시청각장애인을 지원하는 국가기관도 없고, 일본의 ‘전국시청각장인협회’와 같은 법인 단체도 없다. 2006년에 영찬씨가 일본에서 열리는 시청각장애인대회에 참가하여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2007년에는 국회에서 시청각장애인 교육과 재활을 위한 국제세미나가 열렸다. 2008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교육부 장관과 복지부 장관에게 시청각장애아동에 대한 실태조사와 교육정책 수립, 전문교사 양성 등을 권고했다. 그때 나온 것이 전국의 교육시설에 있는 시청각장애아동 수가 30명에 이른다는 집계였다. 그러나 외국의 자료 등을 참고하면 국내에 약 5천명의 시청각장애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정확한 실태조사나 교육정책, 전문교사 양성 등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2012년 <달팽이의 별>이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개봉하면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는 듯했지만, 정책은 여전히 답보상태다.
언어 이전의 소통, 그리고 사랑
<달팽이의 별>은 장애에 대한 영화인 동시에 로맨스영화였다. 영찬씨와 호순씨가 연애결혼에 이르게 된 과정은 어떤 멜로물보다 순정이 넘친다. 서로의 손을 포개 피아노를 치듯 점화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온기는 보는 이의 부러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달에 부는 바람> 역시 장애에 대한 영화인 동시에 가족애에 대한 영화다. 예지 엄마는 식물 키우기를 좋아한다. 식물은 시각도 청각도 없지만 매만지고 돌보는 손길에 따라 천천히 자라나 꽃을 피운다. 카메라는 서서히 자라는 식물의 성장을 빠르게 돌려 보여준다. 예지 역시 엄마의 손길을 받으며 조금씩 자란다. 예지는 엄마 품에 안겨 엄마 냄새를 맡으며 뽀뽀하길 좋아한다. 예지는 엄마, 아빠, 언니, 선생님 등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인지한다. 따로 사는 언니가 가끔 집에 올 때, 예지는 환하게 웃는다. 촉각과 후각만으로 화목한 공기를 느끼는 것이다. 영화는 기적처럼 전작을 불러낸다. 월경전증후군으로 짜증내는 예지의 손에 엄마가 손가락을 맞대고 두드리자 금세 평안해진다. 영찬씨 부부의 대화수단인 점화가 예지와 엄마에게는 ‘언어 이전의 언어’로 소통된 것이다. 세 식구가 여행 간 해변에는 달팽이 세 마리가 호를 그리며 지나간다. 더듬이와 느린 움직임을 지닌 달팽이는 시청각장애인의 상징이다. 기묘한 오마주이자 우연의 화답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예지 엄마가 다른 장애인 엄마들과 갖는 회식 장면을 담는다. 한 엄마는 장애를 가진 아이를 돌잔치에서 공개하는 게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니 옳은 결정이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 다른 엄마는 “아이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단단한 말을 들려준다. 이것은 다큐멘터리라는 방식을 통해 예지의 장애를 공개하며 예지의 느린 성장을 포기하지 않는 예지 엄마의 심정을 정확히 대변해준다. 노래방에서 예지 엄마는 노래한다. “눈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조심조심 징검다리 건넌다~ 눈 감고 두손 모아 널 위해 기도하리라.” 감독과 예지 엄마는 나중에 영화에서 이 노래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직접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 대신 말해주기도 하고, 작정하지 않아도 무심결에 흘러나오는 게 진심이다. ‘언어 이전의 소통’이라는 것도 바로 이런 이심전심의 상태가 아닐까. 영화는 소통에서 언어보다 중요한 것은 존재를 이어주는 공감의 끈이라는 깨달음을 나지막이 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