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디스토피아로부터
시인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문강형준(영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마이자 2018-01-11

짐 자무시 감독의 영화 <패터슨>은 시를 쓰는 버스 운전사의 일상을 그린다. 뉴저지주의 소도시 패터슨에서 버스 운전을 하는 패터슨은 매일 아침 6시 언저리에 일어나 출근하고, 점심시간는 홀로 도시락을 먹으며 시를 쓴다. 집에 오면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개를 산책시키고, 바에서 맥주 한잔을 먹은 후 다시 잠든다. 정해져 있는 일상은 반복된다. 극적인 사건은 발생하지 않으며,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상의 반복을 뒤흔들지 않고 따라간다. 일상은 그 단어가 원래 말하듯, 그런 반복의 연속이다.

패터슨은 일상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노트 하나를 가지고 다니며 시를 쓰는데, 시를 쓰다가 버스 운전을 할 때가 되면 얼른 노트를 덮고 운전대를 잡는다. 흔히 ‘시’는 ‘일상’의 지리멸렬함을 넘어서는 어떤 곳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곤 한다. 뮤즈의 영감을 받은 시인이 열정에 넘쳐 밤새 시를 쓸 때 일상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 영화의 버스 운전사는 일상을 부정하고 시에 모든 것을 바치는 낭만주의적 시인이 아니다. 그는 운전하지 않을 때만 시를 끄적이고, 그가 쓰는 시는 그가 사는 일상에서만 출발한다. 미국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소아과 의사로 살며 시를 썼고, <패터슨>이라는 시집을 냈다. 영화 속의 패터슨이 윌리엄스를 좋아하는 건 아마 그에게서 자신의 삶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상과 시가 하나되는 삶. 같은 얼굴에 같은 옷을 입고 나란히 앉아 있는 쌍둥이들이 영화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그건 어쩌면 위대한 시인 윌리엄스와 한권의 시집도 내지 못한 버스 운전사 패터슨도 사실 쌍둥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상당히 다른 정조를 가진 이창동의 영화 <>와 자무시의 <패터슨>은 공통적으로, 시를 쓴다는 일에 ‘자격’이 필요치 않음을 보여준다. 손자의 죄가 낳은 업보를 대신 짊어지려 하는 할머니와 버스 운전 중간중간에 아내 외에는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는 운전사는 모두 시를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본다. 시는 삶의 매개이고, 그게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공들여 쓴 시작 노트를 키우는 개가 물어뜯어 망가뜨렸을 때 패터슨이 반응을 자제하는 건, 그에게는 삶과 시가 죽을 때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시’ 자체가 아니라 ‘시적인 삶’이다. 시집을 출판하는 게 아니라 삶의 순간들에서 시를 만들어내는 것, 자신의 일상을 열심히 살면서 시를 읽고 쓰는 행위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일터에서 돌아와 셰익스피어를 읽는 저녁을 꿈꿨고, 베냐민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 자신의 삶에서 창조적인 가치를 만들어 스스로 기업이 되라고 닦달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그저 좋아서 시를 쓰고 거기에 만족하는 버스 운전사를 그리는 이 영화는 가장 조용하고 관조적인 방식으로 이 세상의 법칙에 반기를 드는 셈이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