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영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서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로 이야기가 옮아갔다.
가장 가깝게는, 지난 추석연휴에 이미 새롭고 다양한 한국영화들이 설 땅을 잃는 상황은 예견됐었다. ‘새롭고 다양한’이라는 아주 모호한 형용사를 사용한 것은 그 영화들을 예술영화나 작가주의 영화라는 개념으로 묶어버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눈 있고 귀 있는 사람은 보고 들으라고 정좌한 채, 관객에게 말걸기를 거부하는 실험실의 영화들도 거기 없었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들이 외면당한 것이냐를 많은 사람들이 다시 생각하게 된 것, 그것이 올 가을 한국영화가 거둔 수확인 성싶다. 배급의 문제가 새삼 재발견됐고, 이같은 영화를 옹호하는 ‘운동’이 발생했다. 인천에서 <고양이를 부탁해>를 재개봉하고, 서울 센트럴6에서 네편의 영화를 다시 틀고, 스카라극장에서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재상영하는 일들. 이 낯선 일들을 반기는 이들에게 문화적 귀족주의의 혐의는 없는지 감시하는 시선도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거론된 영화들이 숨쉴 공간이 이 정도로 없다는 건 말 그대로 한국적 특수성. 이 ‘운동’은 근본 대책을 세우기 전에 급히 사용되는 심폐소생술일 뿐이다.
‘대중영화’가 호응을 얻는 이유를 외면하지 말라는 지적도 있다. 옳은 말이다. 폭력적이고 부패한 사회에 대한 불만을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조폭 마누라>를 거쳐 이런저런 ‘조폭’ 변주곡이 터뜨려주었다는 데도 동의한다. 그러나 부글거리는 분노와 불만에 조응하는 데서 끝나는 영화, 나아가 그것을 대중동원의 동력으로 삼되 억압과 부패의 원천을 함께 밝혀내지 못하는 영화, 심지어 한바탕 야유 끝에 체념과 순응을 다시 선사하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필요하다. 대중성을 문제삼자는 것은 아니다.
영화와 관객의 이런 진득한, 때로는 격렬한 대화를 위한 대화법을 찾는 것. ‘나’는 그 숙제를 아둔함과 게으름 때문에 아직도 하지 못했다. <씨네21>이 관객의 볼 권리를 지켜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어느 독자의 항의전화를 받았다. ‘나’는 게을러도, <씨네21>의 한 사람 한 사람은 게으르지 않기에 “우리도 할 일을 다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독자들을 만나던 짧지 않은 동안 얻은 확신 때문이었다.
이제 작별인사를 드릴 시간이다. 허문영 새 편집장이 “다 썼느냐”면서, 빙긋 웃고 내 책상을 들여다보고 간다. 독자 여러분들 사이에서 읽게 될 331호가 정말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