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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속스캔들>부터 <미지의 서울>까지, 박보영이 통과한 이름들
남선우 2025-07-15

박보영 필모그래피의 핵심 이미지들

<피끓는 청춘>

딸기밭 주인은 미지로 분한 미래의 이름을 자꾸만 다르게 부른다. 미희, 미영, 민지…. 입술을 붙였다 떼며 발음하는 글자를 전부 내뱉을 기세로 실수를 거듭하다 마침내 미래를 미래라 부를 수 있게 된 남자처럼, 우리는 박보영이 지나온 배역들을 하나씩 되새기면서 비로소 ‘박보영’이라는 이름이 가진 밀도를 알아차린다. 그가 배우로서 쌓아온 지층들이 모두 한 사람의 몫이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감탄하면서. 2006년 청소년 드라마 <비밀의 교정> 속 2학년 5반 학생 중 한명으로 등장한 순간부터 2025년 <미지의 서울>을 1인2역으로 채운 최근까지, 배우 박보영의 필모그래피를 형성해온 핵심 이미지들을 여기에 펼쳐본다.

도시와 먼 곳으로부터

<늑대소년>

색조 화장이라고는 한톨도 올리지 않은 듯한 이목구비. 길게 늘어뜨리거나 질끈 묶어버리기를 택한 머리칼. 나름대로 멋을 부려봤지만 묘하게 예스러운 옷차림. 영화 <과속스캔들> <늑대소년> <피끓는 청춘>으로 기지개를 켠 박보영은 도시의 세련과 거리를 둔 매무새로 관객과 인사했다. 인물들의 이름도 친근하기 그지없었다. 연예인 아빠를 만나러 서울에 온 제인은 ‘황정남’이라는 가명을 써서 <과속스캔들>의 문을 열었다. 이후 <늑대소년>을 감싼 건 순이, <피끓는 청춘>으로 첫사랑을 향해 돌진한 건 영숙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이름들에는 세월을 견뎌온 어떤 근성 같은 게 배어 있다. 그걸 그대로 이식받은 캐릭터들이 말간 얼굴을 하고 말했다. “미혼모라도 하고 싶은 거 많아요.”(<과속스캔들>) “기다려, 나 다시 올게.”(<늑대소년>) “그런데 왜 난 안 꼬시는겨?”(<피끓는 청춘>) 예쁘게 보일 필요 없는, 아니 예쁘게 가꾼 것이 어색해 오히려 귀여워지는 인물들. 박보영은 그들에게 접속하면서 배우로서 자신의 첫인상을 만들어갔다.

기타를 든 소녀

<과속스캔들>

데뷔 초 박보영은 자주 노래했다. 기타를 튕기며 스스로 반주했다. 전문적인 뮤지션 역할을 맡은 적은 없지만 O.S.T에도 여러 번 참여했다. 대중에게 각인된 무대는 <과속스캔들>에서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거야”라고 읊조린 장면이었을 테다. 성인이 되어서야 만난 아버지에게 앙칼지게 으르렁거리던 제인은 결연하게 첫 소절을 소화한 뒤 고음으로 나아가는 후렴까지 담백하게 마무리한다. 망가진 관계를 회복하려고 애쓸 때 겪어야 하는 것들, 이를테면 원망이나 미련 같은 감정들이 기교 없이 부른 한곡에 담겼다. 반면 <늑대소년>에서 박보영은 “내가 그리던 왕자님”을 향한 설렘을 가창했다.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년을 위해 소녀는 동화를 구연하듯 멜로디를 이었다. 이야기가 어디로 갈지 안다는 듯, 지금 이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또박또박. 그렇게 박보영의 음성은 그 기분을 말로 다할 수 없어 노래하고야 마는 인물들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그는 이후에도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 영화 <너의 결혼식> 삽입곡을 불렀다. 지난 6월에는 팬미팅에서 들려준 음원 <너의 얼굴을 보면>을 발매하기도 했다. 마음을 보여주는 게 낯설다는 가사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팬들을 향한 박보영의 단단한 진심으로 막을 내린다. “너의 사랑이 닿을 때면 무엇도 두렵지 않아.”

괴력, 빙의, 환생, 그다음은?

<오 나의 귀신님>

박보영과 판타지는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스크린에서 주로 활약해오던 그가 처음으로 장편 드라마 주연으로 나선 <오 나의 귀신님>에서부터 그랬다. 서툴고 소심하던 주방 보조 봉선은 음탕한 처녀 귀신에 빙의되고부터 대담해진다. 짝사랑하던 셰프에게 요리를 배우는 동안 욕정도 이리저리 뻗어본다. <힘쎈여자 도봉순>은 말 그대로 괴력의 소유자. 조상 대대로 그러했기에 태생부터 용감했다. 자신을 경호원으로 채용하려는 회사 대표에게 생리휴가가 있는지부터 묻는 봉선은 그게 없다는 답을 듣자마자 입술을 오므리며 눈을 흘긴다. “으음~ 열악하네요~.” 특유의 앙증맞은 강단을 뽐내며, 봉선과 봉순은 여자들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동시에 남자들의 호감도 사버렸다. 환상이 깃든 로맨틱코미디 두편으로 16부작 주인공의 존재감을 분명히 한 박보영은 어느새 현실감각 있는 판타지의 주역으로 자리 잡았다. <어비스>에서는 영혼 소생 구슬을 쥐고 환생했고,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에서는 신비한 존재와 손잡고 시한부 운명을 뒤집어보려 했다. <조명가게>에서는 죽다 살아난 뒤 귀신을 보게 되었다. 어딘가에 있을 법하지만 어디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마스크 덕분일까. 가끔 모든 게 지루해진 것처럼 뚱한 표정을 짓는 박보영을 보면 궁금해진다. 괴력, 빙의, 환생, 그다음은?

바닥에 붙은 청춘

<미지의 서울>

<미지의 서울>에는 방문을 굳게 닫은 청년들이 살고 있다. 부상 후 육상선수로서의 앞날을 포기한 미지, 일터에서 부당한 대우를 감당해야 했던 미래, 그보다 먼저 힘든 길을 걷다 집 안으로 숨어버린 미래의 선임 수연. 그들은 각자의 진실을 안고 낮게 숨 쉰다. 침대에서 한 발자국 떼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미지의 한때를 지켜보며 박보영이 연기한 아픈 여자들이 뇌리를 스쳤다. 어려서부터 폐질환을 키운 주란(<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뇌종양 진단을 받은 동경(<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불안장애와 우울증으로 인해 간호사에서 환자가 된 다은(<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까지 말이다. 싱그러운 미소가 트레이드마크인 배우임에도 심신이 병든 젊은 여성을 줄곧 연기해온 박보영은 10년 전 영화 <돌연변이>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에서도 험난한 세상에 던져진 사회 초년생의 초상을 보여줬다. 방구석 키보드 워리어(<돌연변이>)와 연예부 수습기자(<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가 구르는 현실의 간극이 그리 커 보이지 않은 까닭은 시대와 시절의 분위기를 캐릭터에 부여할 줄 아는 배우의 해석력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폭언에 가까운 꾸중을 들은 신입 기자가 스치듯 던지는 대사에 그 분노가 집약돼 있다. “적어도 저한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해주셔도 되는 거 아니에요?”

고통과 돌봄의 사이클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그리고 언제부턴가 박보영의 인물들은 고통과 돌봄의 사이클을 돌고 있다. 연달아 간호사 역을 받아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들은 이미 무너져봤기에 타인의 붕괴를 알아차리고, 상대를 고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또다시 무너져내린다. 그럼에도 옆에 선 누군가를 위해 품을 데우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건 순한 여자들이 연애할 때 빠지는 굴레와는 다른 차원의 운명이다. 내가 속한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내가 만난 사람을 더 편한 상태로, 내가 간직한 희망을 공동체의 것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의지가 미약하게나마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조명가게> <미지의 서울>에서 박보영이 분한 캐릭터들에게 기본값으로 부여돼 있다. 그 태도를 답답하게 여기는 반응들에 박보영은 수천겹의 번뇌가 뭉친 눈빛으로 응수한다.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선을 설득하겠다는 듯이 차분하게. 그 속내는 주인공 곁 주변인들에게 먼저 닿은 뒤 관객을 위로한다. 그리하여 박보영과 아픈 여자들은 긴 시간 서로를 마주 본 끝에 이해한다. “인생은 끝이 있는 책이 아니라 내가 직접 채워야 할 노트라는 걸.”(<미지의 서울>) 이는 2026년 데뷔 20주년을 맞이할 박보영의 필모그래피에 관한 비유이기도 하다.

박보영이 출연한 영화·드라마

2025 드라마 <미지의 서울> <멜로무비>

2024 드라마 <조명가게>

2023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2021 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2019 드라마 <어비스>

2017 영화 <너의 결혼식>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

2015 영화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돌연변이>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

2014 영화 <피끓는 청춘>

2012 영화 <늑대소년> <미확인 동영상: 절대클릭금지>

2008 영화 <과속스캔들> <초감각 커플> <울학교 이티> 드라마 <정글 피쉬>

2007 드라마 <왕과 나> <달려라 고등어> <마녀유희>

2006 드라마 <비밀의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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