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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역사의 불가분한 관계, 빅토르 에리세 감독론과 전작 소개

<클로즈 유어 아이즈> 촬영 현장. 아나 토렌트 배우와 빅토르 에리세 감독(왼쪽부터).

내향적이고 적요한 세계 안에 역사의 여파가 밀려온다. 내전으로 깊은 내적 상흔을 입은 어른들은 대체로 과묵하고 간혹 말을 하더라도 자신의 슬픔에 대해선 입을 다문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깊은 골을 알지 못한다. 다만 어느새 감지한다. 그들이 속한 세상의 메마른 공기와 잔혹함을 접한다. 그 세상 속에서 아이들은 외로움을 느끼고 심하게 앓는다. 그리고 때로는 유령 같은 존재를 만난다. 빅토르 에리세에게 유령 같은 존재는 곁에 실존하는 존재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같은 비중으로 혹은 더한 비중으로 인물들의 육신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에리세의 인물들에게 과거란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시간이며, 회한이 아니라 격정의 시간으로 다가온다. 격정은 감정의 파고가 극렬하게 드러나는 표정과 과격한 몸짓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외려 미니멀한 구도, 차분한 톤과 무드, 인물이 느릿한 행동을 취해 변화시키는 사물의 상태, 절제된 화면 속에서 일어나는 빛의 변화. 무엇보다 오래된 아픔, 시간이 흘러도 메울 수 없는 구멍, 외면하고 지내다 들여다보면 더 커져버린 마음의 구멍을 안고 사는 인물들의 무기력한 모습에서 큰 물결로 인다. 이 물결은 역사에서 굽이쳐 온다.

에리세는 스페인 내전을 직접 다루지 않되 그 여진을 여실히 담는다. <벌집의 정령>은 아름다운 동화처럼 시작하지만, 실은 잔혹한 내전의 역사와 고립된 인물들의 오랜 슬픔을 다룬다. 스페인 내전과 빅토르 에리세의 영화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스페인에선 좌파 인민전선 정부(공화파)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우파 쿠데타군(국민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고, 국민파가 승리했다. 많은 공화파 시민이 내전 후 처형되거나, 숙청당하거나, 망명했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 나오듯 프랑스는 제1망명지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 외 종교는 모두 탄압했던 스페인을 떠나온 사람들과 공화파 인물들이 모였다. <벌집의 정령>에서 아나(아나 토렌트)의 엄마 테레사(테레사 짐페라)가 옛 연인에게 쓴 애끓는 편지를 더이상 보내지 않고 모닥불 속으로 집어넣을 때, 그 편지봉투에도 프랑스 니스의 적십자사 주소가 적혀 있다.

<남쪽>은 내전의 역사를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내밀화한다. 소녀 에스트레야(손솔레스 아랑구렌/이시아르 보야인)와 아버지의 관계를 그들의 심장을 비추듯 보여주고 들려주는, 혹은 그런 인상이 들게 만든다. 부유한 국민파 할아버지를 과감히 등지고 살고 쉽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도 상관치 않던 공화파 아버지가 그토록 경멸하는 가톨릭 교회에 갔을 때, 아침부터 사냥총을 쏘아대며 분을 삭이고 난 후 사랑하는 딸의 첫 영성체를 보러 갈 때, 공적인 역사와 사적인 서사는 묘한 교합을 이룬다. 아버지가 끝내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사냥총을 자신에게 겨누었을 때, 그리고 에스트레야가 끝내 아버지가 자라고 다시 돌아가지 못한 ‘남쪽’으로 향할 때 <남쪽>은 개별적이고도 공적인 서사가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스페인의 극사실주의 화가 안토니오 로페스 가르시아의 작업 과정을 화가의 화풍처럼 담되 엄숙하고 유희적이며 신비롭기까지 한 다큐멘터리로 완성한 <햇빛 속의 모과나무>(1992), 역사적 시각과 고유의 미학을 드러내는 다수의 단편과 옴니버스영화를 거쳐 <클로즈 유어 아이즈>로 돌아온다. /홍은미 영화평론가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전작들

<벌집의 정령>(1973)

1940년대 스페인 고원 지대의 어느 외딴 마을에 이동식 영화 트럭이 도착한다. “영화가 왔다!”라고 소리치는 아이들 사이엔 주인공 소녀 아나가 있다. 1931년 만들어진 공포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본 아나는 문득 영화 속 괴물의 죽음에 대한 고심에 빠진다. 언니 이사벨은 “영화는 모두 거짓말”이라며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사실은 정령이자 우리 주위에 있다고 말한다. 이내 아나는 정령을 찾아 마을 외곽 곳곳을 돌아다니고, 아나의 행적 주위로 무너져가는 스페인이란 국가와 가정의 모습이 겹친다. 한 아이의 클로즈업에 시대의 풍경을 담아낸 빅토르 에리세의 첫 장편이자 20세기 영화사의 걸작. 아나 역을 맡은 아나 토렌트는 50년 만에 <클로즈 유어 아이즈>로 빅토르 에리세와 재회했다.

<남쪽>(1983)

1950년대 프랑코의 독재가 횡행하던 스페인, 에스트레야가 자신의 아버지와 영원히 이별하게 됐음을 고백하며 그와의 과거를 회상한다. 영적인 힘을 갖고 있는 듯한 아버지는 평생을 가정에 제대로 발붙이지 못한 채 다른 여자를 그리워했다. 아버지와의 이별 이후, 에스트레야는 심리적, 물리적으로 멀게만 느껴졌던 했던 스페인의 남쪽을 향해 비로소 떠난다. 단출하고 차분한 이야기와 톤 앤드 매너 속에서 강조되는 빅토르 에리세 특유의 회화적 구도가 빛나는 작품이다. 빅토르 에리세는 제작비 문제로 <남쪽>의 후반부를 완성하지 못했으며, 이때의 좌절감이 <클로즈 유어 아이즈>라는 영화의 최초 아이디어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영화의 ‘미완성’이 삶과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햇빛 속의 모과나무>(1992)

스페인의 화가 안토니오 로페스가 본인의 집 마당에 있는 모과나무를 그림으로 옮기는 과정을 찍은 다큐멘터리다. 배우도 대본도 제대로 된 예산도 없이 진행한 빅토르 에리세의 예외적인 작품이다. 화가 안토니오는 모과나무를 그리기 위해 수없이 많은 밑그림을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데생과 채색, 수평과 수직, 신선함과 부패성, 달과 해의 빛, 실재와 그림자 등 모과나무의 현상에 얽힌 온갖 사유와 검증을 거치며 그림을 다시 그려간다. 즉 <햇빛 속의 모과나무>는 빅토르 에리세의 소품인 듯 보이면서 한편으론 그의 열렬한 창작론을 한명의 화가에게 빗댄 주요작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우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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