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개에겐 지옥이 없다> 유치장에서 한 남자가 풀려난다. 그는 철로에 누었던 일로 감금되었던 것. 남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30분이다. <생명줄>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와 잠자고 있다. 세상은 온통 고요와 적막함에 덮여 있는데 아기가 덮은 이불에서 조금씩 피가 배어난다. <만년의 시간 속에서> 카메라는 브라질 지역의 원시부족인 우르유족을 찾아간다. <실내-트레일러-밤> 한 여배우가 트레일러에서 10분간 휴식을 취한다. <트로나까지 12마일> 한 남자가 약물과용으로 병원을 찾는데 마침 휴무중이다. <우린 도둑맞았다> 미국 대통령 당선이 결정되기 전 고어와 부시의 득표차는 급속하게 좁혀졌다. <깊이 숨은 100송이 꽃> 할아버지는 이삿짐센터 직원들과 꽃동네에 도착한다. 이곳에 있는 것은 달랑 나무 한그루뿐이다.
■ Review
“시간은 강물, 모든 창조물의 막을 수 없는 흐름. 사물은… 오직 사라지기 위해 존재한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의 한 구절은 <텐 미니츠 트럼펫>의 연결고리다. <텐 미니츠 트럼펫>은 단편영화 모음이다. 일곱명의 감독이 약 10여분의 단편을 한편씩 작업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연출자들이다. 열거하자면 리스트가 길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빅토르 에리세, 베르너 헤어조그, 짐 자무시, 빔 벤더스, 스파이크 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첸 카이거다. 국적도 서로 다르고, 만든 영화도 천차만별이다. 이들이 만든 영화가 과연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단편모음을 억지스럽지 않게, 하나의 색깔로 묶어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텐 미니츠 트럼펫>을 보면서 풀어야 할 어려운 숙제 같은 것이다.
눈에 띄는 몇 작품을 이야기해보자. 먼저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생명줄>. <남쪽>(1982) 등의 영화로 칸영화제에 소개되었던 빅토르 에리세 감독은 영화평론가이기도 하다. 그는 지나친 과작(寡作)의 감독으로 칭해지는데 서구 비평가들에겐 ‘거장’으로 추앙받는 존재다. <생명줄>은 한폭의 그림 같은 영화다. 아기는 잠에 빠져 있고 엄마 역시 아기 옆에서 평화롭게 잠잔다. 카메라는 느리게 주변 풍경을 스케치한다. 밖에선 일하는 농부들이 있고 소년은 손목에 시계모양을 그린 뒤 초침소리를 듣는다. 꼬마들은 정지한 자동차에서 장난친다. 침묵과 부동으로 일관하던 영상은 동시에 불안함을 간직한다. 인서트로 끼어드는 장면에선 아기를 덮은 이불이 핏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이다. <생명줄>은 작은 사건으로 인해 깨어지는 침묵, 그리고 평화의 회복을 스케치한 단편이지만 무성영화를 연상케 하는 영상은 역사적 비유를 품고 있다.
그리고 <실내-트레일러-밤>은 짐 자무시 감독작. <천국보다 낯선>(1984) 등의 짐 자무시 감독은 미국 인디영화계의 대표적인 연출자다. 영화를 전공한 인텔리답게 지적이면서 영화사적 전통에 능통한 것이 자무시 감독의 작품세계라고 할 만하다. <실내-트레일러-밤>은 휴식에 관한 영화다. 여배우가 잠시 휴식시간에 트레일러에서 휴식을 즐긴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담배를 피우면서 수다를 떤다. 차례로 영화 스탭들은 배우의 이것저것을 체크한다. 의상과 사운드, 그리고 헤어스타일 등. 이 짧은 단편은 영화에 관한, 즉 영화제작에 관한 소품이다. 그렇지만 영화에 관한 자기반영적 작품이 흔히 그랬듯 촬영현장이 아니라, 휴식의 현장이라는 것이 위트 있다. 소품 마지막의 빈 공간에 관한 그윽한 응시는 거장 오즈 야스지로의 영향을 감지토록 한다.
이밖에 <텐 미니츠 트럼펫>은 영화감독의 개성과 차별성을 요약한다. <개에겐 지옥이 없다>에서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예의 서늘한 블랙 유머와 냉소주의를 담는다. <만년의 시간 속에서>의 베르너 헤어조그 감독은 변함없이 아마존 오지를 미친 듯 방황하면서 다큐멘터리풍의 단편을 촬영했다. <트로나까지 12마일>의 빔 벤더스는 근작인 <밀리언 달러 호텔>(2000)에서 그랬듯 뮤직비디오와 백일몽, 그리고 드라마의 결합이라는 희귀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우린 도둑맞았다>의 스파이크 리는 또한 <똑바로 살아라>(1989) 시절의 뛰어난 정치의식을 살려 미국 선거전 현장에 발을 딛는다. <패왕별희>(1993)의 첸 카이거는 중국적인 오리엔탈리즘으로 어떻게 서구인들을 매료시킬지 여전히 고심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이 에피소드 모음은 감독의 전작을 챙겨본 사람이라면 어느 소품이 어느 감독작인지 짐작케 한다.
(왼쪽부터 차례로)♣ 첸카이거의 <깊이 숨은 100송이 꽃)은 지나간 시간과 추억에 대한 판타지다.♣ 짐 자무시의 <실내-트레일러-밤>은 촬영중인 여배우에게 허락된 10분의 휴식을 따라간다.♣ 빅토르 에리세의 <생명줄>은 역사적 비유를 품고 있는 시적인 영화다.♣ 정치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일관해온 스파이크 리는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우린 도둑맞았다>는 미국 대선을 돌아보는 인상적인 다큐멘터리.
아마도 <텐 미니츠 트럼펫>의 공통 키워드는 시간과 음악으로 볼 수 있겠다. 모든 에피소드들은 특정한 시간대와 (그것은 역사적 사건을 암시하기도 한다) 제한된 시간 내에 전개된다. 아우렐리우스의 표현에 따르면 시간의 변화에 따른 존재의 있음과 없음, 에 관한 영화인 셈이다. 둘의 상관관계가 어떻게 발생하고 역전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영화는 <우린 도둑맞았다>를 제외하면 영화음악이 전면에 배치된 소품이다. <실내-트레일러-밤>의 바하의 피아노 음악, <트로나까지 12마일>의 모던록, <생명줄>에서 어느 시골 아낙네가 부르는 민요에 이르기까지. <텐 미니츠 트럼펫>은 단편영화가 영화감독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작품에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게 되는지, 그리고 연출자의 창작욕구가 어떤 경로를 밟아 조용하게 샘솟게 되는지를 지켜볼 수 있게 한다. 그것은 창작의 비밀을 노출하는 체험이다. 2002년 칸영화제 초청작. 김의찬/ 영화평론가 garot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