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백수건달 봉구(김승우)는 예비군 훈련이 있던 날 뜻밖의 사고를 당한다. 조직폭력배 두목 철곤(차승원)이 주머니 탈탈 털어 산 일회용 라이터를 집어가버린 것이다. 온갖 수모와 모욕 끝에 유일하게 손 안에 남았던 ‘300원짜리 일회용 라이터, 빨간색, 새거’. 봉구는 라이터를 되찾기 위해 철곤의 뒤를 따라 부산행 기차에 올라타지만, 철곤 역시 그보다 힘센 국회의원 용갑(박영규)으로부터 받아내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다.
■ Review
<라이터를 켜라>의 장항준 감독은 촬영 전 가진 인터뷰에서 남의 시나리오로 데뷔하는 부끄러움에 관해 농담조로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 역시 <박봉곤 가출사건> <북경반점>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였기 때문이다. 코미디가 장기였던 장항준 감독이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의 박정우 작가와 일하려면 약간 망설일 수밖에 없었을 것. 그러나 너무나도 사소한 소재를 미끼로 액션과 웃음을 레일처럼 밀고나가는 <라이터를 켜라>는 작가와 감독의 자석 같은 만남이라고 할 만한 영화다.
<라이터를 켜라>는 그저 코미디를 표방했던 작가의 전작들보다 훨씬 황당한 설정에서 출발한다. “가진 것 없는 자의 분노가 그런 식으로 터져나올 수 있다”는 감독의 설명도 기댈 데 없는 변명처럼 느껴질 정도다. 라이터를 잃어버리기까지 봉구의 며칠, 아버지한테 두들겨맞고 친구한테 조롱당하고 추운 겨울 점심을 때우려던 우동 그릇마저 박살나는 일상을 지켜보기 전까진 그렇다. 짧고 현실적인 순간들을 겹겹이 쌓아 한순간의 영화적 에너지로 끌어올리는 성실한 연출. <라이터를 켜라>는 기차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한꺼번에 예닐곱명의 대사가 쏟아지는 정신없는 상황을 선택했는데도, 난감한 장애물 앞에서 머뭇거리는 대신 자신있게 순간순간을 밀고나가는 것이다. 봉구가 기차 지붕 위에서 앞뒤로 방향을 바꾸는 속도를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패배와 결단의 상반된 감정이 느껴지는 장면은, 액션 속에서 웃음이 배어나오는 이상적인 조합의 한 예다.
여기에 힘을 보태는 다른 한 요소는 배우들의 연기다. 김승우는 촬영현장에서 “처음 대사연습을 할 때 내가 못 올 데 온 것 같았다. 코미디 연기라면 누구 못지않은 배우들이 모여 시나리오를 읽으니까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두 주연을 비롯해 <공공의 적>의 이문식과 성지루, <신라의 달밤>의 유해진 등은 가끔 비집고 올라오는 무리한 설정을 몸에 밴듯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호흡을 보여준다. 웃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섞여드는 웃음. “유머감각 있는 감독이 코미디를 만드는 편이 좋다”고 말했던 장항준 감독은 그 자신감에 걸맞은 데뷔작을 완성해낸 듯하다.김현정 parad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