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범한 오후, 주희(김주령)는 병원에서 유방암 가능성을 진단받는다. 같은 증상의 10명 중 1명은 암이라는 정보와 “그래도 9명은 (암이) 아니지 않냐”는 위로가 뒤섞인 진찰실에서 주희는 혼란을 떠안는다. 여전히 머릿속에는 암에 대한 진위 여부가 잔상처럼 남아 있지만 그는 자신의 일상을 이어나갈 대학 연구실을 찾는다. 연구비 지원과 사학연금 확인. 슬픔에 몰입할 새도 없이 처리해야 할 현실이 그 앞에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명씩 그의 연구실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는 주희가 연구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배우로서 미래가 불투명하더라도 요리사로 섰던 부엌으로 다신 돌아가지 않겠다는 졸업 예정자, 행사 진행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무용과 교수, 성적을 올려 달라고 조르는 재학생, 사랑의 의미를 묻는 제자까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만남이 주희를 반기고, 주희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본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를 오마주한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는 20대 젊은 배우인 클레오를 배우 일을 그만둔 40대 중년 여성으로 전환하면서 시야를 넓게 확장한다. 무엇보다 주희와 이혼을 앞둔 남편 호진(문호진)의 단독 이야기를 통해 주희를 들여다보는 독특한 방식을 취한다. 극단을 지휘하는 단장 호진은 어린 배우를 육성하며 때로는 날카로운 말로, 때로는 진실된 독려로 연극 무대를 이끌어간다. 하지만 단원들 사이로 진실 같은 소문이 하나 흘러들었으니 바로 연극 내용이 호진과 주희의 사연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호진 파트와 주희 파트를 완전히 분리해 진행하기 때문에 극 중에서 두 부부의 전사를 유추할 여지를 주지 않지만, 주희 부부가 어떤 갈등을 거쳐 이혼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는지 호진의 연극 내용으로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는 서사를 정직하게 나열하기보다 그림 전체를 상상할 수 있는 주요 조각을 내세우면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영화는 40대를 한창 지나는 주희에게 변곡점보다는 반환점을 준다. 새롭고 흥분되고 자극적인 터닝 포인트가 아니라 조용하고 차분하고 섬세한 마침표에 가까운 시간이다. 성장 욕구를 지닌 개인으로서, 가족 구성원으로서, 직업인으로서 뭉툭하게 정리되었던 각 구간을 날렵하고 세밀하게 조명한다. 다소 투박한 장면 전환이나 극을 늘어뜨리는 흐름이 아쉬움을 남기지만, 생애 중간 결산을 앞둔 초로의 여성을 통해 세대 보편적인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특히 주희의 미묘한 표정을 명료하게 잡아내는 배우 김주령의 연기가 무척 안정적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드라마가 존재해요. 기승전결처럼 끝이 종결되는 것도 있지만 어떤 관계는 열린 결말로 남거든. 해피 엔드나 언해피 엔드가 되는 게 아니야. 그냥 넓은 구멍 같은 거야. 그 속이 시커멀지 찬란할지는 아무도 모르지.”
CHECK POINT
장건재 감독과 김주령 배우가 함께한 첫 장편영화. 이제 막 2년차 연애에 접어든 커플 주희(김주령)와 현수(김수현)는 작은 임대 아파트에 삶을 꾸린다. 각자 손에 쭈쭈바를 쥔 산책이나 밤 자전거 라이딩 등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키워가는 둘에게도 동상이몽에서 비롯한 고민이 시작된다. 실제 인물을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장건재 감독 특유의 현실성이 인상적이고 김주령 배우의 앳된 발성은 풋풋한 간지러움을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