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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
2001-03-23

<검사와 여선생>에서 <내마음의 풍금>까지, 배우 박광진의 단역인생 50년

봄비였을까? 마천동, 5호선 열차가 몇 안 되는 승객을 내뱉고 잠시 쉬어가는 종착역. 남한산성 아래 있다는 그의 집을 찾는 길에, 비가

내렸다.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부터 최근작 <내 마음의 풍금>까지, 태동하던 이 땅의 영화가 나고, 옹알이를 하는 모습, 걸음마를 떼는

순간, 갈 길 몰라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거쳐 든든한 청년이 되기까지. 긴 세월,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한국영화의 성장을 지켜보았던 배우 박광진(77)은,

그러나 더이상 청년이 아니다. 마치 손자에게 키를 나누어 주어 점점 키가 줄어든다 했던 <축제>의 동화 속 할머니처럼….

초등학교를 따라 뻗은 길, “이리 오라”며 손짓하는 한복차림의 노인의 볼은 먼 길을 찾아온 손님에 대한 반가움 때문인지 오랜만에 홍조를

띠고 있었다. “배우집이라 부잣집일 줄 알았을 텐데…, 이런 누추한 곳에서 두 노인네만 살아요.” 몇개의 골목을 지나 들어선 곳은 붉은

벽돌의 빌라 지하방. 손자가 만든 조잡한 종이 카네이션 뒤에 송파구 배드민턴대회에서 탄 금메달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는 그의 집은 50년

넘는 세월 동안 배우로 살아왔던 삶을 보상하기엔 턱없이 초라했다. 그러나 프림, 설탕 가득한 다방커피 대신 헤이즐넛향나는 신식 원두커피를

내어오는 그에게선, 영화가 로맨스고, 영화가 멋이었던 시대를 통과해 온 사람 특유의 대책없는 낭만이 여전히 늙지 않은 채 숨쉬고 있었다.

“남은 건 이거밖에 없어, 자식 손주들에게 줄 것도, 이거밖에 없어.” 한장한장 넘길 때마다 묵은 먼지가 이는 누런 사진첩과 함께, 그의

빛바랜 기억을 불러오는 작업은 “그게 뭐였더라” “어이구… 기억이 잘 안 나네…”란 말이 수시로 이어지는 난해한 퍼즐 맞추기 같았다. 일흔일곱의

삶 동안 몇 조각은 달아나기도 하고, 장롱 밑에 숨기도 하고, 몇몇은 색이 바래 가물해지기도 했지만, 그렇게 모아놓은 조각들은 마치 한폭의

민화처럼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925년

을축년. 한강 대홍수 발생. 조선총독부 완공. 나운규 주연의 <심청전> 조선극장 개봉.

전국 극장수 27개. 전국 인구 1952만명.

1925년 9월21일 율면, 경기도 이천에서도 한참 들어가야 하는 ‘깡촌’. 농사짓던 부모님의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박광진(본명 방상옥)은

지금은 징용 끌려가 소식없는 작은형과 6·25 이후 소식끊긴 철원의 작은 누이와 함께 자랐다. “종국엔 이걸 하려고, 배우하려고 그랬는지,

학교 댕길 때도 꼭 연극운동이 있으면 나갔어. 박수소리가 좋았던가봐.” 사람들 앞에 나서고, 재주부리는 게 마냥 즐거웠던 소년은 5년짜리

중학을 졸업한 16살이 되던 해, 직장을 잡기 위해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서울에 올라와 본 진짜배우들이 나오는 연극은, 배우들의 기찬

연기와 함께 장중한 세트로 학생연극만 봐왔던 시골소년을 압도해왔다. “시대물 같은 거 하면 정말 찬란했어. 그 뭐야, 황철 선생 나오는

<바람부는시절>부터 청춘좌(당시 동양극장 전속 극단)에서 하는 연극은 안 본 게 없었지.” 일할 곳을 찾던 소년은 “좋은 음성 덕에” KBS라디오

성우일을 시작했고 지금은 월북한 호규서 아나운서와 함께 <세계일주>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리고 성우로 일한 인연으로 극단 <아랑>의

<산적>이라는 연극에 참여하면서 연극계에 첫발을 디뎠다. “꿈에 그리던 황철, 서일성, 김선영, 고설봉 같은 대배우와 얼굴을 맞댈 수 있다니!”

비록 작은 역이지만 죽을 힘을 다해 하고 싶어졌다.

#1945년

8월15일 해방. 미군의 등장과 함께 생겨난 댄스홀 대유행.

좌익이 주도권을 잡은 조선영화동맹 결성.

해방은 되었지만 연극계는 여성국극의 인기와 함께 점점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명치좌(시공간, 이후 국립극장)를 거쳐, 당시 극단 청춘극장에

속해 있던 박광진은 <동명성왕>의 주인공인 ‘동명왕’ 역을 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지만 지방을 전전하며 공연을 해봐도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얼마 없었다. 배고프고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때 청춘극장 단장과 친했던 영화감독 윤대룡이 “어디 쓸 만한 배우없냐”고 물었고, 단장의

추천으로 그는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6mm 무성영화로 영화사에 기록될 작품 <검사와 여선생>(1948)이다.

탈옥수를 숨겨준 일로 남편의 오해를 산 여선생이 실수로 남편을 죽이고 법정에 선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검사는 바로 이 여선생에게

은혜를 입었던 제자. 여기서 박광진은 주인공 영애를 잡아가는 형사로 출연한다. “뭔지도 모르고 그냥 감독이 시키는 대로 했지요. 카메라가

뭔지. 어디를 찍고 있는 건지. 온몸으로, 발가락 하나까지 연기하던 연극배우가 쭉 땡겨서 잡는 ‘압뿌샷’(타이트샷)이 뭔지 알 길이 있나.”

# 1955년

모래 찜질의 명소 만리포해수욕장 개설.

50년대 후반 육체파 여배우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수영복 입은 여배우가 등장하는 해수욕 장면이 자주 출몰.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 중앙극장 개봉.

이규환 감독 <춘향전>의 히트와 함께 사극영화 중흥기를 맞음.

한번의 영화출연을 제외하고, 연극무대를 떠나지 않았던 그도 이제 서른. 짝을 만나 결혼을 해야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배우라는 직업은 늘

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라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굿하는 무당이 점지해준 사람이야, 그 사람이.” 무당의 소개로

만난 여자는 의외로 연극배우라는 직업에 호감을 표했다. “내가 그땐 연극에 주인공을 도맡아 하니까, 멋있어 보였나봐, 다른 세계 사람 같았겠지.”

그렇게 그해 결혼을 하고 나니, 이제 낭만이고 멋이고 ‘진짜 생활인’이 되어야 했다. 연극판에 비하면 당시 한국영화의 제작은 활발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1957년 김소동의 <아리랑>에서 박광진은 미친 영진의 친구 역으로 출연했다. “데뷔를 잘했어야 했어. 바쁘고 힘드니 단역이고 주연이고

가릴 상황이 되나, 그냥 역할이 있으면 가리지 않고 출연한 게 지금까지 단역으로 굳어진 것 같아.” 청춘극장 시절의 동기이자 친구인 신영균이

주연으로 서서히 인기를 끌며 따뜻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가던 시절, 그는 춥고 배고픈 단역배우의 길로 접어들었다. “새벽 5시쯤 충무로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먹고 나면 ‘수타다방’, ‘신천지’, ‘청맹’ 같은 다방에서 ‘오시뗑’(단역배우들을 실어나르는 트럭) 오기만을 기다리는 거야.”

그렇게 멀리서 ‘오시뗑’이 터덜대며 오는 소리가 들리고 포장 안 된 길을 따라 상계동이며 남한산성, 북한산성으로, 촬영장을 향해 달려가면,

그의 진짜 하루가 시작되었다.

“영화에서는 출세하려고 해도 못해. 주인공하는 배우들은 일단 ‘그림’이 우리랑 다르거든. 누가 봐도 잘생기거나 특출한 개성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같이 평범하게 생긴 사람은 힘들지.” 그러나 카메라의 오랜 애무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는 비록 단역이지만 최대한 타이트한

샷으로, 최대한 오랫동안 나오기 위해 여러 번의 ‘무모한 시도’를 감행했다. <의적일지매>(1961)를 찍을 때였다. 카메라가 달려오는

배우 한명한명을 비추다가 쭉 빠져 풀샷이 되는 장면에서 그가 제일 앞에 서게 되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는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계속 카메라를 보며 따라 돌았다. 감독은 “미친 놈, 뭐 하는 짓이냐”고 불호령을 내렸다. “죽을 만큼 야단맞았지.

그래도 그땐 왜 그랬는지, 그렇게 욕심을 내고 싶더라고.”

시대물이 주를 이루던 시대라 단역배우에게 말타는 것은 필수사항이었다. 이장호 감독의 <일송정 푸른솔은>을 마지막으로 그만두기는 했지만 말다루는

솜씨는 늘 그의 자랑거리다. “그땐 스턴트맨, 그런 것 없어. 우리가 직접 말을 타야 돼. 내가 말타는 솜씨가 끝내줬거든. 고삐 놓고 말등에서

총을 쏠 정도였지. 가끔은 내가 탄 말이 주연배우 말보다 앞으로 나가서 NG난 적도 많았지.” <세종대왕>(1964) 촬영장에서 박광진의

역할은 말탄 장수. 그에게 안현철 감독은 말을 타고 달려오다가 맞은편 장수의 말로 ‘붕’ 날아가서 목을 조르라고 지시했다. “등에 줄 매고

그런 거 하나없이 사람이 어떻게 붕 하고 나르나, 몇번 시도를 해봤는데 자꾸 떨어지는 거야. 그 컷 찍기 시작한 게 10시였는데 저녁 5시까지

죽기 살기로 그짓을 했어. 그때는 감독이 하라면 죽는 시늉까지 했던 때거든, 지금 애들 보고 하라 그러면 도망갈걸. 결국 그렇게 찍고 나서

나중에 영화를 봤는데 어느 놈이 어느 말에 탔는지도 안 보일 만큼 풀샷인 거야. 허허, 물론 그림은 멋있지. 그래도 다시는 그런 짓 안

한다고 했어.”

# 1965년

정부, 양곡을 원료로 사용하는 증류식 소주의 제조를 금지.

새해 벽두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개봉.

고은아를 스타덤에 오르게 한 <갯마을> 개봉을 필두로 문예영화 붐.

영화제작이 활발해지면서 이른바 신영균, 최무룡, 신성일, 최은희, 도금봉, 문정숙 같은 스타들이 탄생했지만 영화제작편수에 비하면 이른바

‘장사되는’ 스타의 수는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형편이었다. “날라리 제작자들이 많았거든.” 당시 영화제작자들은 주연급 배우를 데려다놓고

하루이틀 만에 스틸사진을 찍어서 서울이나 지방의 흥행사(당시 지역의 판권을 쥐고 있던, 지금으로 말하면 배급업자)를 찾아가서 배우의 얼굴을

걸고 영화를 미리 팔곤 했다. 하여 주연급 배우는 열몇편의 영화를 동시에 찍을 수밖에 없던 시절. 지금의 ‘제작부’와 다르게 그때의 ‘제작부’는

힘깨나 쓴다는, 이른바 ‘주먹’들이었다. 배우를 차지해야 그날 촬영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제작부들간에 벌어지는 몸싸움은 살벌했다. “주먹

센 놈이 무조건 주인공을 데려오는 거야. 쌍말이 오가고, 차 앞에 벗고 드러눕고, 난리도 아니었어.” 주연배우 없이는 촬영을 못하니 단역배우들까지

합세해 팔걷어붙이고 싸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만 터진 거지. 그렇게 한바탕하고, 이기면 다행인데 지면 새벽 6시부터

수염붙이고 기다렸던 게 다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거야. 다른 촬영약속도 못 지켜서 욕은 욕대로 먹고…. 기분이 참 더러워. 촬영도 못하고

분장 지우다 보면 이걸 왜 하나, 씁쓸하지, 슬프기도 하고….”

# 1975년

제2남침용 지하땅굴 발견. 55일 동안 17명을 연쇄살해한 김대두사건.

박정희 긴급조치 제9호 선포,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방 금지.

TV 보급으로 영화제작 부진, 영화산업 위기. 이만희 <삼포가는 길> 작업중 45살 나이로 타계.

대학의 낭만을 그린 <바보들의 행진>제작,

그러나 한편에선 <영자의 전성시대>로 이어지는 호스티스영화 대량 생산.

누군들 외도를 꿈꾸지 않았으랴. “딴 일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지. 한편에 3천원 하는 출연료로는 살기가 빠듯했거든.” 그나마 받을

출연료도 제작자가 “다음에 줄게” 하고 도망가기 일쑤. 남산에 있는 녹음실까지 쫓아가 성우들 양해 얻고 후시녹음 스튜디오에서 기침소리,

잡소리 내가면서 방해해 억척스럽게 출연료를 받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쉰이 넘도록 해온 단역생활은 늘 죄없는 아내를 경제적인 가장역할로,

일터로 내몰았다. 생일날 미역살 돈이 없어서 시래깃국을 끓여 밥상을 차린 아내는 화장실 뒤에서 숨죽여 울고 있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 웬만한 일에는 눈물 한번 안 보이던 사람인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울었을꼬.” 수유리 살 때는 잠시 집을 지어 파는 장사를

해봤지만, 집값 오를 때 집을 짓고 나면 팔 때는 갑자기 집값이 떨어지곤 했다. “운이 없었던 건지, 배우일을 계속하라고 그런 건지….”

잠시 배우일을 떠난다 해도 멀리 달아날 수가 없었다. “담배 같어. 끊는다 끊는다 하면서도 못 끊거든. 배우생활하다 다른 일한다고 나간

사람들 중에, 뭐 안 돌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10 중 8, 9는 다시 영화판으로 오더라고.”

# 1985년

월드컵축구 32년 만에 본선 진출, 시험관 아기 국내서 첫 탄생. ‘5·23’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

<깊고 푸른 밤> 49만5천명 관객동원하는 기록수립. 하명중의 <땡볕> 베를린영화제 본선진출.

<> 촬영장에서 환갑을 맞았다. 감독이 특별히 차려준 환갑상 덕에 이미숙과 이대근의 술잔도 받고, 잡지에도 나갔다. “늙으니 좋은 날도

있더라고.” 영화가 뭐기에, 지옥 같은 생활고 속에서도 “낭만 하나 만으로” 고생을 감수하는 배우들은 모두 같은 맘이다. “한곳에 촬영이

끝났는데 돈을 안 줘. 그렇다고 다음 촬영을 안 할 수는 없지 않아. 처음엔 모두들 입이 댓발은 나왔지. 그렇게 다음 촬영장으로 ‘오시뗑’

타고 포장도 안 된 길을 털퍽털퍽 가는데, 아무 말 없이 그렇게 한 15분쯤 달렸나…. 누구 하나 나지막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어.

그리곤 하나 둘, 나중엔 모두들 그 노래를 따라 불렀지. 오시뗑 위에서 웃고 구르며 장단까지 맞춰 노래를 부르는데. 그땐 돈이고 마누라고

자식새끼고 머릿속엔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거야. 그런 낭만이랄까. 그런 거 없으면 배우 못했을 거야.”

#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광복 50주년을 맞아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대기업 영화제작참여 본격화. 영화주간지 <씨네21> 창간.

한국영화의 시대극 제작이 뜸하고, 가족이 슬그머니 사라지기 시작한 뒤부터 일흔이 넘은 노배우에게 돌아올 수 있는 역은 그닥 많지 않았다.

배우생활 50년, 500편이 넘는 작품과 함께한 오랜 벗에게 영화는 제33회 대종상 특별연기상으로 그 고마움을 대신했다. 하지만 근 반년을

바쳤던 김호선 감독의 <애니깽>을 마치고 나니, 이젠 더이상 말을 탈 일도, 칼싸움을 할 일도, 상투를 틀 일도 없었다. “요즘 촬영장에

나가면 벙어리가 된 기분이야. <내 마음의 풍금> 찍을 때 왜 강주라고 전도연이 짝꿍, 그 아가 ‘밴또’ 가져다주는 할배 역을 했는데 전라도

고창에 있는 폐교에서 찍었어. 버스에서도 혼자 앉고, 숙소도 혼자 쓰지, 어려워서 그런가 애들이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해. 감독도 한참 어린

사람이고, 사실 우리 같은 단역들이야 촬영 기다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게 낙인데, 이젠 얘기나눌 사람도 없어. 그나마 전조명이라고 촬영감독이

또래라서 다행이었지. 그이마저 없었으면 정말 벙어리된 것 같았을 거야.” 하지만 1967년 <망향천리>를 찍으며 처음 맺어진 임권택 감독과의

인연은 <축제>(1996)까지 이어지며 간간이 일감을 던져주었다. “임 감독하고 하는 촬영은 편해. 연출부들에게는 어떨는지 몰라도 우리한테는

절대 까다롭게 안 하거든. 게다가 그 촬영장에는 감독, 촬영감독, 배우들까지 또래들이 많아서 얘깃거리 나눌 사람도 많고, 옛날 생각이 많이

나.”

# 그리고 2001년

신사해. 32년 만의 폭설. 전국 극장수 600여개, 전국 인구 4686만명.

퇴계로(退溪路)와 명동로(明洞路) 사이, 도심지의 남쪽을 동서로 관통하는 길이 1900 m의 충무로(忠武路). 한때 극장과 영화사, 영화인들의

걸음으로 빽빽이 채워졌던 거리 곳곳에는, 배우를 꿈꾸며 상경한 촌 아가들이 하루아침에 배우가 된 믿지 못할 이야기와 영화를 말아먹고 빚쟁이에

쫓겨다니던 영화사 사장들의 사연이 피고 또 지고, 50년을 한결같이 기다리기만한 단역배우가 밤새 먹은 술로 토악질해댄 부산물 위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지고 또 말랐다. “영화라는 게 늘 기다림의 연속이지. 자기 찍는 거 얼마 안 돼도 계속 기다리는 거야. 연기란 게 주연만

중요한 게 아니거든. 잠깐 나와도 내 역할을 잘해내야 돼. 주연들이야 이번에 잘못하면 다음 작품에서 만회하면 되지만, 우리는 한번 잘못하면

다시는 아무도 안 불러주거든.” 신성일, 최무룡, 신영균의 동네친구로, 수도하는 제자로, 뒤를 쫓는 형사로, 혹은 곱사등이 내시로, 최은희의

인력거를 끌던 손은 정윤희에게 편지를 전하고 전도연에게 도시락을 건네며 그렇게 늙어갔다. 이제 자신보다 늦게 태어난 대한극장이 문을 닫고,

화려한 멀티플렉스로의 변환을 꿈꾸는 거리에 서서, 마지막으로 누렇게 된 사진첩을 건네며 그는 작은 바람 하나를 내비쳤다. “이 사진을 꼭

좀 실어줘, 이때는 주인공이었거든. 연극할 때는 솔찮이 주인공을 했는데….” 인생의 가장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극단 시절, 주인공으로

섰던 연극 <동명성왕>의 사진을 부탁하는 그는, 마지막 커튼콜을 바라는 무대 뒤 배우 같았다. 한국영화의 흐름에, 그 바람에 온몸을 내맡긴

깃발 같은 삶. 정성들여 키운 자식을 사회로, 세계시장으로 내보내면서도 몸종처럼 뒤쪽에 물러앉아 부모대접을 못받을지라도, 걱정마세요, 자식들은

기억합니다. 누가 자신을 키웠는지를.

글 백은하 기자 lucie@hani.co.kr

사진 손홍주 기자 lights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