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part2 유운성이 건진 아까운 걸작
2002-01-03

숨은 명작, 머리카락 보인다!

섹슈얼 이노센스 The Loss of Sexual Innocence

감독 마이크 피기스 주연 줄리언 샌즈, 새프론 버로즈 제작연도 1999년 출시사 크림

마이크 피기스의 영화를 볼 때엔, 조금쯤은 의혹의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영화는 뭔가 실험적인 것 같기는 한데 어딘지 모르게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든다. 아마 이런 느낌이 가장 덜한 영화는 <브라우닝 버전>이었을 테지만 그건 또 지나치게 평범하고 점잖은 이야기였다.

라틴어를 가르치는 노교사와 그의 어린 제자간의 따뜻한 우정. 짐작건대 스스로의 유년 시절에서 소재를 끌어온 것인 듯한 <섹슈얼 이노센스>는 아예 거의 스토리는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이미지들의 흐름을 따라 자유로이 전개되는 영화다. 성적 모험기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지는 한편, 아담과 이브의 우화가 지극히 탐미적인 영상을 통해 재구성된다. 결국 신화의 인물들은 점점 현실적 공간으로 이동해오고 현실의 인물들은 너른 사막을 배경으로 한 신화적 공간 속에서 파국을 맞이한다. 일디코 엔예디의 <나의 20세기>와 키에슬로프스키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 적절히 섞인 듯한 한 쌍둥이의 이야기가 갑자기 개입해 들어오면서 우리를 의아하게 만드는데, 결국엔 하나의 내러티브 안으로 무리없이 통합되는 걸 보면 피기스의 재능이 그래도 범상치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넬리 앤 아르노 Nelly & Monsieur Arnaud

감독 클로드 소테 주연 에마뉘엘 베아르, 미셀 세로, 장 위그 앙글라드 제작연도 1995년 출시사 엠브이넷

영화를 좋아하는 주변의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단 한번도 클로드 소테에 관한 언급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영화는 골수 작가주의 영화광들에게는 영 밋밋한 것일 터이고, 영화란 자고로 재미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썰렁하기 그지없는, 그야말로 오갈 데 없는 프랑스영화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본 그의 멜로드라마 몇편은 개인적으론 최고로 꼽을 만한 것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막스 오퓔스의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 데이비드 린의 <밀회>, 그리고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 등과 함께 그의 영화는 영화를 보는 내내 줄곧 공감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소테의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낭만주의가 완전히 거세된 모더니즘 이후의 멜로드라마이다. <금지된 사랑>의 주인공 스테판은 사랑이란 없으며 오직 게임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금지된 사랑>처럼 <넬리 앤 아르노>에서도 이른바 비극적 사랑이라는 낭만적 유희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랑의 도피란 말 그대로 영화에나 나올 법한 것이 된다. 또한 해피엔딩도 비극적 결말도 없으며 오직 관계의 재구성만이 있을 뿐이다. 무언가 놓쳐버린 것, 지나간 것을 아쉬워하지만 결코 크게 동요하지는 않는 인물들을 엄격하지 않은 방식으로 다룸으로써 소테는 역설적이지만 진정 ‘즐거운 인생’을 느끼게 해주는 감독이다.

혐오 Repulsion

감독 로만 폴란스키 주연 카트린 드뇌브, 이언 헨드리, 존 프레이저 제작연도 1965년 출시사 9FILM

올해 출시된 영화 가운데 가장 반가운 영화. 대학 시절 나로 하여금 감탄을 내뱉게 만들었던 두편의 폴란드영화는 안제이 바이다의 <재와 다이아몬드> 그리고 폴란스키의 <물 속의 칼>이었다. 폴란스키는 초기에 만든 영화들에서 인물들을 부조리한 상황으로 내몰고는 거기서 묘한 웃음을 끌어내는 재능- 이 점에선 <궁지>가 단연 압권이다- 을 선보였는데, <혐오>는 이런 그가 정색하고 달려들 때 영화가 얼마나 소름끼치는 것이 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다. 최근작 <나인스 게이트>는 그 강도는 덜하지만 그래도 초반 30분간은 훌륭하다.

원 프롬 더 하트 One from the Heart

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주연 프레데릭 포레스트, 테리 가, 나스타샤 킨스키, 라울 줄리아 제작연도 1982년 출시사 파워 오브 무비

발표된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영화가 왜 갑자기 출시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반가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 시리즈나 <지옥의 묵시록> 정도의 영화를 기대하면서 <원 프롬 더 하트>에 접근한다면 낭패보기 십상이다. 이 영화는 코폴라가 80년대에 만든 자잘한 범작과 실패작들의 첫머리에 놓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돌이켜보면 <아웃사이더>나 <터커> 등은 그리 나쁘진 않다). 오히려 코폴라보다는 음악가 톰 웨이츠의 팬들이 더 반길 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데, 소주 한두어병 걸치고 나면 나올 목소리로 묘하게 심금을 울리는 웨이츠의 광팬이라면 만사 제치고 봐도 괜찮을 영화.

인페르노 Inferno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 주연 이렌느 미라클, 레이 매클로스키 제작연도 1980년 출시사 빅스

몇몇 사람들이 그토록 무섭다고 말한 <서스페리아> 같은 건 사실 어이가 없다 못해 낄낄거리며 봤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공포영화를 보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게 웬만한 코미디영화보다 더 우습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오 바바의 <사탄의 마스크> 같은 영화가 소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르젠토의 이 영화는 제법 볼 만한 고딕호러 가운데 하나다. 양식화된 세트와 조명- 광원이 무엇이냐 따위는 절대로 묻지 말 것- 을 통해 잔뜩 분위기를 고조시키다가는 난데없이 잔혹한 난도질을 선보인다. 아나모픽 렌즈를 이용해 촬영한 영상을 그대로 텔레시네하는 바람에 화면이 위아래로 길게 늘어져 보이니 이를 감수하고 볼 것.

치즈케, 블랙커피 No Looking Back

감독 에드워드 번즈 주연 에드워드 번즈, 로렌 홀리, 존 본 조비 제작연도 1998년 출시사 폭스

원제 ‘No Looking Back’을 이렇게 바꿔놓은 이유가 궁금해지는 영화. 여주인공이 식당 웨이트리스라서? 영화를 잘 보다보면 전개방식이 꽤 흥미롭다는 걸 알게 되는데, 처음엔 고향에 돌아온 한 남자의 연애담처럼 보이다가 점점 그의 옛 애인인 여자의 자아발견에 관한 이야기로 옮아가는 것이다. 즉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가 주인공을 달리하는 셈이다. 이상하게도 요즘엔 소도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다룬 미국영화들이 꽤 재미나게 다가온다. 존 본 조비가 남자 주인공의 친구이자 연적으로 등장한다.

스크리머스 Screamers

감독 크리스천 더과이 주연 피터 웰러, 로이 듀피스 제작연도 1995년 출시사 SKC

우연히 보게 된 B급 공상과학영화. 극중에서 스크리머스란 사람이 가까이 가면 갑자기 튀어올라 공격을 가하는 무시무시한 대인지뢰의 이름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기계장치가 자가 진화를 거듭하여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 외양을 갖추게 됨으로써 인간들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점. 특히 주인공이 소년의 모습을 한 변종 스크리머스를 만나게 되는 장면은 정말이지 섬뜩하기 짝이 없다. 사실 영화가 지닌 흥미의 대부분은 원작소설에서 연유한 듯한데 원작은 필립 K. 딕-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자- 의 단편 <두 번째 변종>으로 국내에도 번역, 소개된 바 있다.

에디 머피의 라이프 Life

감독 테드 드미 주연 에디 머피, 마틴 로렌스, 네드 비티 제작연도 1999년 출시사 콜럼비아

여기서 같이 소개하는 에드워드 번즈의 <치즈케, 블랙커피>가 마음에 든 사람들이라면, 그보다 훨씬 매력적인 테드 드미의 <뷰티풀 걸> 또한 반드시 한번 보기를 권한다. 재미로 따지자면 <라이프>는 <뷰티풀 걸>에 한참 못 미친다. 다만 여타의 영화들에서 엄청나게 빠른 수다로 우리의 넋을 빼놓았던 두 흑인배우가 여기선 적절한 수준에 머물면서 제법 연기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기서 제목 <라이프>는 두 주인공의 인생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극중의 그들이 처한 상황 즉 ‘종신형’을 지칭하는 것.

뛰는 백수 나는 건달 Office Space

감독 마이크 저지 주연 론 리빙스톤, 제니퍼 애니스톤 제작연도 1999년 출시사 폭스

정말이지 제목 죽이는 영화다(새삼 출시사들의 유머에 감탄하는 바이다). 이것도 제목이 하도 괴상해서 호기심에 빌려본 비디오 가운데 하나이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영화는 <비비스와 버트헤드>로 이미 우리에게 소개된 바 있는 마이크 저지가 만든 극영화이다. 여기서 마이크 저지는 다분히 상황에 기댄 유머를 선보인다. 흡사 만화책의 컷 구성과 유사하다고 해야 할까. 굉장히 느린 페이스의 영화인데 어느 순간(약간은 어이없어서이기도 하지만) 폭소를 터지게 하는 힘이 있다. 직장생활에 지친 이들을 위한 영화판 ‘무대리’.

철십자 훈장 Cross of Iron

감독 샘 페킨파 주연 제임스 코번, 맥시밀리언 셸, 제임스 메이슨 제작연도 1976년 출시사 영화랑

물론 이 영화는 국내에서 개봉되기도 했고 오래 전에 비디오로 출시까지 되어 잘 알려진 영화다. 하지만 굳이 여기서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철십자 훈장>이 올해 새로 출시된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쯤 다시 한번 페킨파의 영화들을 되씹어볼 것을 권유하기 위해서이다. 페킨파의 영화는 <고원을 달려라>와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 등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출시되어 있다. <메이져 던디> <와일드 번치> <어둠의 표적> <게터웨이> <관계의 종말> <가르시아> <킬러 엘리트> 그리고 <오스타맨>까지(모두가 출시된 지 상당기간 지난 것들이라 미처 리스트에 포함시키지 못한 영화들임). 유운성/ 영화평론가▶ part1 김봉석이 뽑은 B급영화

▶ part2 유운성이 건진 아까운 걸작

▶ part3 손원평이 사랑하는 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