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난니 모레티, 기타노 다케시, 우디 앨런…. 이들은 명감독이기 이전에 자신의 영화에 직접 출연한 배우다. 명감독은 저명한 영화학교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사실 가장 훌륭한 영화학교는 바로 현장이다. 연기해본 이들이 배우들을 조율할 줄 알고, 감독과 함께 일해본 이들이 감독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잘 파악하게 마련이다. 최근 할리우드에선 감독과 배우를 겸하는 이런 움직임이 많아졌다. 왕년의 카우보이가 벌써 30여편의 필모그래피를 구축한 거장이 되었고, 액션 블록버스터의 영웅이었던 한 남자는 논쟁작을 또 한편 내놓았다. 연기의 끈을 놓지 않은 채 메가폰을 잡은 이들. 클린트 이스트우드부터 에단 호크까지,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배우 출신 감독 10명을 소개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삶을 꿰뚫는 카우보이
대표작_<용서받지 못한 자>(1992) <퍼펙트 월드>(1993)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 <미스틱 리버>(2003)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 <아버지의 깃발>(2006)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2006)
천하의 마틴 스코시즈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면 지긋지긋할 것이다. 오스카 트로피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이번에도 두 사람은 작품상과 감독상을 놓고 불꽃 튀는 경쟁을 벌여야 한다. 이스트우드는 아카데미위원회의 끝없는 사랑을 받아 작품상과 감독상을 무려 두번이나 수상했다(<용서받지 못한 자>와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러나 이스트우드가 거장으로 불릴 수 있는 까닭은 단지 수상기록 때문만이 아니다. 1971년 4주 반 만에 완성한 데뷔작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부터 올해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오른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까지 30여편의 영화를 완성한 이스트우드. 70살이 넘어서도 그의 창작열은 식을 줄 모르며, 삶을 꿰뚫는 시선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서부극(<평원의 무법자> <용서받지 못한 자>)이건 범죄영화(<선악의 정원에서의 하룻밤> <미스틱 리버>)건 멜로영화(<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건 장르를 불문하고 이스트우드의 관심사는 언제나 ‘인간’이다. 특히 폭력으로 상처받은 인간. 한 전쟁, 두 시선의 영화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에서는 전쟁이 ‘인간’에게 어떤 기억과 상처를 남기는지를 성숙하게 바라본다. 이스트우드는 성숙한 시선이 성숙한 영화를 만들어주는 것을 몸소 증명하는 존재다. 그는 굳이 ‘배우 출신 감독’이란 단서를 달지 않아도 ‘거장’이란 한마디로 불리기에 충분한 사람이다.
멜 깁슨: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대담함
대표작_<브레이브 하트>(1995)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 <아포칼립토>(2006)
멜 깁슨은 미국에서 브리트니 스피어스만큼이나 논쟁적인 인물이다. 물론 다른 종류로. 그는 가끔 할리우드 실력자 중 유대인이 많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 같다. 지난해 만취 상태에서 반유대인 발언을 해 미움을 톡톡히 샀는데, 그가 도마에 오른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때도 반유대적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서 맹렬한 비난을 샀고, 최근작 <아포칼립토>는 라틴아메리카 역사가들한테서 “고대 마야를 야만적으로 묘사했다”는 아우성을 들어야 했다. 이쯤 되면 멜 깁슨은 논쟁을 즐기거나 아니면 영화를 만들면서 고행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영화에 드러난 그의 정치적, 종교적 관점에 100% 동의하긴 어렵지만, 그가 만든 영화가 ‘웰메이드’란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오스카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브레이브 하트>와 예수의 최후 12시간을 재현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마야문명 시대를 배경으로 한 액션 <아포칼립토> 등 그의 영화들은 잔혹하고 극적이며, 강렬한 후유증을 남긴다. 그런데 액션 블록버스터의 히어로였던 그가 논쟁작을 만드는 것이 조금 아이러니다. 사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영리했던 듯하다. 멜 깁슨은 조지 밀러, 리처드 도너, 론 하워드 감독 밑에서 그들의 연출 테크닉을 익혔고, 원하는 장면을 뽑아내기 위해 쌈짓돈을 터는 등 무서운 집착을 보였다. 이런 집념과 완벽주의가 영화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또 영화로 논쟁을 잠식할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닐지.
로버트 드 니로: 제2의 마틴 스코시즈를 꿈꾸며
대표작_<브롱스 이야기>(1993) <굿 셰퍼드>(2006)
명배우는 명감독이 될 수 있을까? 고작 두편의 연출작만 갖고 예측하긴 어렵지만, 드 니로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나 마틴 스코시즈 같은 거장과 작업한 경험은 상당한 밑천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브롱스 이야기>가 만족스런 데뷔작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악에 물들어가는 이탈리아 이민자의 이야기는, 드 니로의 전문이 아니었던가. 그는 메가폰을 쥐고서 다시 비열한 거리에 섰고, 성장영화와 범죄드라마를 결합한 수작을 낳았다. 두 번째 장편 <굿 셰퍼드>는 드 니로가 <디파티드>의 프랭크 코스텔로(잭 니콜슨) 역할을 포기하면서까지 올인한 영화다. CIA 40년사를 통해 냉전시대와 개인의 이상이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탐구한 스릴러인데, 드 니로는 이 영화를 10년간이나 준비했다고 한다. 긴 시간에 대한 보상은 달콤했다. 현지 평론가들은 호의를 표시했고, 올해 베를린영화제는 경쟁부문 초청장을 보내왔다. 조만간 드 니로는 베를린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조지 클루니: 유머와 날카로운 시선의 조화
대표작_<컨페션>(2002) <굿 나잇 앤 굿 럭>(2005)
<굿 나잇 앤 굿 럭>이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오르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조지 클루니를 섹시 아이콘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릴 적부터 정치와 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특히 미디어는 두 대표작 <컨페션>과 <굿 나잇 앤 굿 럭>을 관통하는 주제다. 데뷔작 <컨페션>은 TV쇼 호스트 척 배리스(샘 록웰)의 이중생활을 코믹한 터치로 그렸는데, (시나리오작가 찰리 카우프먼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나) 연출자로서 확신이 느껴지는 탄탄한 작품이다. <굿 나잇 앤 굿 럭>에서는 조금 더 무거운 주제로 나아간다. 매카시 광풍시대, 언론의 도덕성을 묻는 이 작품은 평론가들한테 “작지만 위대한 성과”라는 칭찬을 받았다. 조지 클루니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현재 르네 젤위거와 함께 출연하는 로맨틱코미디 <바보들>(Leatherheads)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는 그가 독자적으로 세운 영화사 ‘스모크 하우스’의 창립작이 될 예정이다.
닉 카사베츠: 명연기를 끌어내는 열정
대표작_<존 큐>(2002) <노트북>(2004) <알파 독>(2006)
한동안 할리우드는 <알파 독>으로 시끄러웠다. <알파 독>은 최연소 FBI 지명수배범, 제시 제임스 할리우드의 삶을 소재로 했는데, 지금도 이 소년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재판결과에 영향을 줄 것을 두려워한 변호사들의 움직임에도 <알파 독>은 제때 개봉했다. 그러나 영화 자체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닉 카사베츠의 영화는 대부분 그랬다. 덴젤 워싱턴에게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존 큐>도, 흥행에 성공한 러브스토리 <노트북> 역시 탄탄한 연출력을 인정받기엔 뭔가 부족했다. 아버지 존 카사베츠가 오랫동안 비타협적인 영화세계를 지켜온 것에 비하면 닉 카사베츠가 갈 길이 아직 멀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긴 배우들의 명연기를 이끌어내는 것도 감독의 능력이라면 능력. 개성파 조연으로 활동했던 경험이, 누구보다 배우들을 배려하고 좋은 연기를 끌어내는 자산으로 작용하니 말이다.
토드 필드: 심리묘사에 탁월한 작가
대표작_<침실에서>(2001) <리틀 칠드런>(2006)
토드 필드는 우디 앨런의 <라디오 데이즈>,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 등에 조연으로 출연했던 배우다. 감독으로서나 배우로서나 우리에게 생소하긴 마찬가지인데, 감독이냐, 배우냐 둘 중 하나만 고른다면 감독으로서의 성과가 훨씬 더 눈부시다. 일단 그는 단 두편의 장편영화로 화려한 상복을 과시했다. 장편 데뷔작 <침실에서>는 아들의 살해범을 찾아 복수하려는 부부의 이야기로, 비극적인 사건을 미묘한 감정들로 채웠다. 이 영화는 오스카, 골든글로브, 선댄스 등 영화제란 영화제는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불륜 로맨스’를 격정적으로 그린 두 번째 장편 <리틀 칠드런>은 올해 오스카가 주목한 작품.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케이트 윈슬럿) 등에 노미네이트되면서 어느 정도 작품성을 검증받은 셈이다. 아직 대중의 폭발적 지지를 받진 못했으나, 토드 필드는 작지만 파급이 큰 문제작들로 작가주의 감독의 길을 밟아가고 있다.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철이 든 브랫팩, 홀로 서다
대표작_<궁둥이에 총을 쏜 남자>(1990) <워 앳 홈>(1996) <바비>(2006)
아버지는 마틴 신, 동생은 찰리 신, 친구들은 숀 펜과 로브 로…. 주름이 깊게 팬 중년이 되어서도, 에밀리오 에스테베즈는 ‘브랫팩’의 정서에 머무는 것처럼 보였다. <바비>를 내놓기 전까지는. 파워 있는 영화계 집안이 그를 안일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나, 적어도 그는 ‘즐겁게 영화 만들기’를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데뷔작 <위즈덤>(1986)을 비롯해 <궁둥이에 총을 쏜 남자> <워 앳 홈> 등 대다수 연출작이 직접 각본, 감독, 출연까지 한 ‘자급자족’ 형태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배우로서도 ‘후카시’ 잡는 청춘 아니면 실없는 남자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바비>로 그의 고정된 이미지는 완전히 전복됐다. <바비>는 영화계 인맥을 총동원한 호화 캐스팅을 바탕으로, 로버트 F. 케네디 상원의원이 암살당한 날을 야심차게 재현했다. 만장일치의 찬사는 아니었지만, 감독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에스테베즈. 다음 영화가 감독으로서의 행보에 중요한 갈림길이 될 듯하다.
스티브 부세미: 인디영화를 수호하는 괴짜
대표작_<애니멀 팩토리>(2000) <론섬 짐>(2005) <인터뷰>(2007)
소심하거나 수다스럽거나, 아니면 신경과민환자 같았던 남자. 영화 속 스티브 부세미는 악역이건 영웅이건(그런 적이 있기나 했나?) 늘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광기를 발휘했다. 사실 그가 연기력을 인정받게 된 계기는 자신이 직접 쓰고 출연한 연극 덕분인데, 일찌감치 그에겐 배우뿐 아니라 감독의 피도 흐르고 있었나 보다. 코언 형제와 타란티노, 제리 브룩하이머 등 별 공통점 없는 감독들과 다양한 작업을 했던 것처럼, 그의 연출작들도 공통점을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그는 교도소를 배경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는 <애니멀 팩토리>를 만들다가도, 소시민의 블랙코미디 <론섬 짐>을 내놓으며 종잡을 수 없는 색깔을 드러냈다(TV시리즈 <소프라노스>의 몇몇 에피소드를 만들기도 했다). 최근에는 퇴락한 정치부 기자가 인기 여배우를 인터뷰하면서 벌어지는 코미디 <인터뷰>를 연출했다. 이로써 인디영화계에 주인을 닮은 괴짜영화가 또 하나 태어났다.
실베스터 스탤론: 어느 영웅의 존재 증명 방식
대표작_<록키2·3·4>(1979·1982·1985) <스테잉 얼라이브>(1983) <록키 발보아>(2006)
실베스터 스탤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게 된 데에는 비정한 현실이 숨어 있다. 록키 발보아만큼이나 별볼일없는 시절을 보냈던 스탤론. 경비원에 보디가드, 심지어 포르노 배우로 일해도 변변한 배역이 주어지지 않자,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직접 시나리오를 쓴 <록키>에 출연하면서 스타덤에 올랐고, 할리우드 최고 개런티를 챙기는 위치에까지 올랐다. 대표적인 연출작은 <록키> 2, 3, 4편 그리고 <록키 발보아>. 최근에는 <람보4>까지 기획하고 있다니 약간 우습기도 하다. 그를 키운 80%가 <록키>와 <람보> 시리즈고, 그래서 자신도 그 그늘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친 것을 기억한다면 말이다. <록키 발보아>가 감동적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스탤론의 연출솜씨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그가 살아온 세월이 묻어 있기 때문일 게다. 직접 메가폰을 잡는 것, 이는 늙은 영웅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에단 호크: 예민한 예술가의 자아 찾기
대표작_<첼시 호텔>(2001) <이토록 뜨거운 순간>(2006)
에단 호크는 자신이 바로 작품의 소재다. 배우로선 자신이 속해 있던 X세대의 표상이었고, 자전적인 소설을 썼으며, 그 소설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1994년 단편작업으로 시작해, 2001년에 우마 서먼과 함께 찍은 디지털영화 <첼시 호텔>로 장편감독으로 데뷔했다. 영감을 얻기 위해 낡은 첼시 호텔을 찾는 영화 속 예술가들은, 에단 호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두 번째 장편 <이토록 뜨거운 순간>은 자신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작품. 각자 꿈을 안고 뉴욕에 온 남자와 여자의 짧지만 뜨거운 순간들을 그리는데, 에단 호크가 젊은 시절 품었을 열정과 혼란을 고스란히 담았다. 배우, 소설가, 극작가, 감독…. 서로 다른 분야에서 전방위적인 활동을 펼치는 에단 호크는 나이가 들수록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아티스트다. 하지만 그는 큰 욕심이 없어 보인다. 그가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단순해 보인다. 오직 자신을 위해, 자신의 삶을 재정비하기 위해.
감독님, 좀더 분발하세요!
걸작을 만들던 실력은 어디 갔는지, 오랜 동면에 들어가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이들도 있다. 가장 먼저 데니스 호퍼.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걸작 <이지 라이더>(1969)로 칸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뒤 두고두고 영화사에 오르내리고 있으나, <뒤로 가는 남과 여>(1989) 이후로는 정말 ‘뒤로’ 가는 중. 쓴소리 잘하기로 유명한 팀 로빈스는 정말 입으로만 쓴소리하기로 결심했나? <밥 로버츠>(1992)에서 보여준 냉소와 <데드맨 워킹>(1995)의 묵직한 시선을 몇년째 찾아볼 수 없다. <늑대와 춤을>(1990)로 오스카 작품상과 감독상을 안았던 케빈 코스트너는 <포스트맨>(1997)으로 말아먹고 <오픈 레인지>(2003)에서 살짝 만회했다. 그러나 <늑대와 춤을>이 영영 그의 최고작이 될 것만 같은 이 불길함은 뭐지? 파릇파릇한 청춘 보고서 <청춘 스케치>(1994)와 인정사정없이 웃긴 영화 <쥬랜더>(2001)의 벤 스틸러, 이제는 박물관에서 나와 메가폰을 잡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스카 감독상을 안겨준 <레즈>(1981)와 신선한 표현방식이 돋보였던 <딕 트레이시>(1990)의 워런 비티도 깊은 겨울잠에 빠진 듯. 그보다 훨씬 나이 많은 이스트우드도 열심히 활동 중인데 자극 좀 받을 필요가 있겠다. 그나마 위안은 할리우드의 대표적 지성 조디 포스터가 돌아온다는 사실. <조디 포스터의 홀리데이>(1995) 이후 10년 만에 메가폰을 잡아, 로버트 드 니로와 함께 <슈가랜드> 촬영에 들어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