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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회 칸영화제 개막 The 54th International Film Festival
2001-05-16

은막의 여신, 천상의 노래로 막을 열다

■ 5월9일 54회 칸영화제 개막, 개막작은 바즈 루어먼의 <물랑루즈>

지중해에 쏟아지는 햇살은 어딘가 다르다. 빛을 머금은 비취색 바다가 속삭이듯 일렁이면, 칸의 5월은 아직 코트를 벗지

못한 파리 사람들을 비웃듯 여름 분위기를 뽐낸다. 바닷가엔 온통 수영복의 남녀 혹은 토플리스 차림의 여인들이 시선을 현혹시키지만 오래 지켜볼

구경거리는 아니다. 칸의 눈부신 여름이 시작되는 곳은 해변이 아니라 팔레 드 페스티발의 붉은 계단이다. 5월9일 저녁 6시, 제54회 칸영화제의

개막을 알리는 팡파르와 함께 연미복을 입은 남자들과 우아한 드레스의 여인들이 좌우로 의장대가 호위하는 팔레의 계단에 들어서자 약속이라도

한 듯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이날은 특별하다. 신과 여신들이 1년에 한번 지상에 내려오는 때이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신전처럼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며, 영화제 행사 대부분이 열리는 건물인 팔레는 늦은 오후를 밀어내고 신비감과 황홀경에 입맞춘다.

올해 이곳에 모인 이들이 목청높이 부른 이름은 <물랑루즈>의 스타, “니콜”이다. 매끈한 검은 드레스를 입은

금빛머리, 파란눈의 그녀가 군중을 향해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자 칸은 잠시 넋을 잃는다. 이순간, 영화제가 작가의 발굴이나 예술의 전시를

위한 무대라는 사실은 잊어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이건 매혹의 시작일 뿐이다. 니콜 키드먼에겐 이날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군중이 영화 속 상황과 오버랩됐을지 모른다. 개막작으로 선보인 호주감독 바즈 루어먼의 <물랑루즈>에서

그녀는 19세기 파리의 성인클럽, 물랑루즈 최고의 스타 샤틴으로 나왔다. 미끈한 다리를 드러내며 천상의 그네에 올라탄 그녀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에서 마릴린 먼로가 불렀던 노래를 부른다. <다이아몬드는 여자의 가장 좋은 친구>라는 이 노래는 어느 순간

마돈나의 노래 <머티리얼 걸>로 버전업되고 물랑루즈의 무대와 객석은 너바나의 에

휩싸여 열광한다. 캉캉춤이 없는 물랑루즈?

<물랑루즈>, 유쾌한 개막 버라이어티쇼

50년 넘는 칸영화제 역사상 개막작으로서 가장 어울리는 선택 중 하나로 꼽힐 만한 이 영화는 시종 축제 분위기인데다 20세기의 대표적 엔터테인먼트를

한자리에 망라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붉은 커튼이 열리고 카메라가 과거의 파리를 향해 낮게 날아가면서 시작되는 이 영화에는 귀에 익은 팝명곡들이

쉴틈없이 흘러나온다. 이원 맥그리거가 물랑루즈의 스타와 사랑에 빠지는, 젊고 가난하며 아직 남녀상열지사가 뭔지 잘 모르는 순진한 시인으로

나오는데 <머티리얼 걸>을 부르는 요부를 이 보잘것없는 청년이 어떻게 꼬시는지 보면 <물랑루즈>가 어떤 영화인지 감을

잡을 것이다. 존 레넌과 비틀스의 노래말을 속삭이고 엘튼 존의 노래를 부르는 19세기 청년이라면 1899년의 어떤 여자가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엄숙한 자세로 이날 오전 칸영화제 첫 상영을 기다린 기자, 평론가들조차 종횡무진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이 영화를 마냥 진지하게 대할 수

없었던지 버라이어티쇼를 관람하듯 뮤지컬 시퀀스가 끝나는 순간마다 박수를 보냈다. 아마 당분간은 이보다 멋진 개막축하공연을 따로 준비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이런 분위기가 평단의 만장일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버라이어티> <무빙픽처스> 등이 “MTV

스타일의 새로운 뮤지컬”이라는 찬사를 보낸 반면 <르몽드> <리베라시옹> 등 프랑스 언론과 <할리우드 리포터>는

빈약하고 경박한 내러티브와 장식과잉에 대해 야박할 정도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칸이 사랑한, 그리고 사랑할 거장들

올해 칸영화제는 경쟁부문과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모두 개막작을 미국영화로 장식했다. 주목할 만한 시선의 문을 연 작품은 아벨 페라라의

. 극단적 공포와 불안, 폭력과 강박증의 세계를 그려온 아벨 페라라의 이번 작품은 마약거래로 번 돈으로 가족의

행복을 사는 도미니카 출신 이민자 부부의 이야기다. 뉴욕에서 최초의 흑인시장이 당선된 1993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이뤄진 사건을 통해 감독은

범죄로 이룩된 미국식 풍요로움을 비판한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번 영화에 어린이가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아벨 페라라는 “이전 영화들에

나온 어린이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의 아이들이 등장한다”고 말했는데 그 때문인지 에는 아벨 페라라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없던 희망이 엿보인다. 그게 어떤 의미심장한 변화를 의미하는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물랑루즈>를 시작으로 막이 오른 경쟁부문 출품작의 면모를 살펴보면 무엇보다 거장들의 영화가 많다는 게 눈에 띈다. 장 뤽 고다르의

<사랑의 찬가>, 자크 리베트의 <알게 되리라>, 이마무라 쇼헤이의 <붉은 다리 밑의 미지근한 물>, 허우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 에르마노 올미의 <무기를 만드는 사람>,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귀향> 등은 어떤 영화제

프로그래머라도 탐낼 만한 영화들이다. 칸이 사랑하는 감독으로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코언 형제의 <거기에

없는 남자>, 난니 모레티의 <아들의 방> 등도 놓칠 수 없다. 데뷔작으로 경쟁부문에 초청된 감독은 보스니아의 다니스 타노빅

한 사람이다. 그는 1993년 보스니아 전쟁터를 무대로 <주인없는 땅>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감독의 이름만으로 무게가 느껴지는

영화들이 많다보니 너무 안이한 프로그램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오지만 덕분에 심사위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진땀을 흘리게 생겼다. 올해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은 리브 울만은 자신의 심사기준이 다른 심사위원과 다를 것이라고 전제하며 “진심으로 말하는 영화가 최고의 영화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누벨누벨바그’, 칸 2001의 새로운 경향

<르몽드>의 칸영화제 특별판은 이번 칸영화제 경향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으로 일본영화가 대거 진출한 점을 꼽으며 ‘누벨누벨바그’라는

표현을 썼다. 경쟁부문 출품 감독 가운데 쇼치쿠 누벨바그 세대인 이마무라 쇼헤이가 60년대 감독인 반면 아오야마 신지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90년대 감독들로 쇼치쿠 누벨바그의 자식뻘이다. 물론 ‘누벨누벨바그’라는 말이 나온 게 단지 세대 구분의 편리함 때문은 아니다. 올해 칸에는

경쟁부문 3편, 주목할 만한 시선 3편, 특별상영 1편, 감독주간 1편, 비평가주간 1편 등 모두 9편의 일본영화가 등장했다. 이마무라

쇼헤이만 빼면 아오야마 신지, 고레에다 히로카즈, 구로사와 기요시, 고바야시 마사히로, 스와 노부히로, 오시이 마모루, 하시구치 료스케,

만다 구니토시 등 8명이 모두 90년대 데뷔하거나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감독들. 일본영화의 새로운 물결은 확실히 눈에 띄는 현상이다.

또한 올해 프로그램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다시 편집한 <지옥의 묵시록>과 마틴 스코시즈가 만든

이탈리아영화사에 관한 4시간5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이탈리아 여행>이다. 이미 1979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은 당시 칸영화제에 선보인 영화보다 59분 늘어난 상영시간 3시간23분의 영화로 재편집됐다. 개봉 당시 잘린

필름을 덧붙였을 뿐아니라 디지털녹음과 색보정 작업도 새로 한 이 영화는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한편

올해 칸영화제에서 볼 수 있는 한국영화는 단편경쟁부문에 오른 신동일 감독의 <신성가족>과 영화학교 작품들을 선별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 오른 김영남 감독의 <나는 날아가고, 너는 마술에 걸렸으니까> 등 단편 2편이다.

<물랑루즈>로 막을 올린 올해 칸영화제는 5월20일 폐막작인 라울 루이즈의 <강한 영혼>을 상영할 때까지 12일간

계속된다. 그리고 그날까지 팔레는 전세계 영화광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일러주는 안테나로 기능할 것이다.

칸=글 남동철 기자 사진 손홍주 기자

▶ 54회

칸영화제 개막

▶ <물랑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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