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후반의 시적 리얼리즘 영화부터 클로드 샤브롤의 후기작에 이르기까지 범죄를 소재로 한 프랑스영화의 대표작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갱스터-필름누아르로 이어지는 직접적 혈연전통을 보여주는 미국과 달리, 프랑스의 범죄영화들은 서로 다른 맥락을 지니고 있다. 시적 리얼리즘 경향의 영화들이 사회 문제를 정서적인 어조로 지적하고 있다면, 전후의 영화들은 미국 대중문화와 이중주로 새로운 영화적 형식의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누벨바그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그 흐름은 클로드 샤브롤의 스릴러영화 형식까지 이어진다. 프랑스 범죄영화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배우들, 장 가뱅과 알랭 들롱의 대중적 이미지를 이들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마주할 수 있다.
<망향> Pepe le moko
감독 줄리앙 뒤비비에 ┃ 출연 장 가뱅, 밀레이유 발렝 ┃ 프랑스 ┃ 1937년 ┃ 93분
<무도회의 수첩> <나의 청춘 마리안느> 등으로 시적 리얼리즘을 주도했던 줄리앙 뒤비비에의 이색() 범죄영화. 여기에서는 굳이 범죄가 중심이 아니다. 오히려 전제가 되는 것은 알제리의 카사바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 다큐 양식으로 소개되는 카사바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범죄가 냉기를 띠는 것에 비해, 이국적 장소인 알제리의 카사바를 무대로 하는 <페페 르 모코>는 젊은 날의 장 가뱅을 낭만적 범죄자로 그려낸다. 이국적 장소와 공간화된 미로 세트는 <카사블랑카>에 버금가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망향의 의지와 그 좌절은 주인공 페페를 자살의 비운에 이르게 한다. 아나톨 리트박이 <카사바>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새벽> Le jour se leve
감독 마르셀 카르네 ┃ 출연 장 가뱅, 줄스 베리 ┃ 프랑스 ┃ 1939 ┃ 85분
줄리앙 뒤비비에, 자크 페데와 함께 시적 리얼리즘을 이끌었던 마르셀 카르네의 ‘사회적 환상주의’를 엿볼 수 있는 영화. 사실주의와 시적 서정성을 동시에 취하는 태도를 보인다. 주인공의 계급적, 상황적 소외감이 세트들의 수직구도 속에 갇혀서 드러나고, 사회 의식은 공허한 도시의 재현으로 뒷받침된다. 시적 리얼리즘 시기, 장 가뱅 최고의 연기를 엿볼 수 있다.
<현금에 손대지 마라> Touchez pas au grisbi
감독 자크 베케르 ┃ 출연 장 가뱅, 르네 다리 ┃ 프랑스 ┃ 1953 ┃ 94분
1950년대 품질주의와 사실주의를 동시에 만족시킨 자크 베케르만의 전형적인 프랑스식 갱스터영화. 음울한 공간과 일상적인 갱스터들, 금괴와 우정을 걸고 벌어지는 전투, 긴박한 사건 전개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톤은 낮게 가라앉아 있거나, 한 박자 늦게 뒤따라간다. 인물들은 절제되어 있으며, 다가오는 운명에 대해 자연스럽게 수긍하는 자세를 취한다. 일상화된 묵시록으로서의 갱스터.
<디아볼릭> Les diaboliques
감독 앙리 조르주 클루조 ┃ 출연 시몬 시뇨레, 베라 클루조 ┃ 프랑스 ┃ 1954 ┃ 110분
“하나의 묘사는 비극적이고 혐오감을 줄 때 늘 교훈적이다. -바르베이 도르빌리”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디아볼릭>은 전후 스릴러영화 중에서도 공포의식을 가장 민감하게 포착해낸 영화. <까마귀> <공포의 보수>로도 유명한 앙리 조르주 클루조는 인간의 악이 얼마나 잔인하게 현실화되는가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스릴러라기보다는 공포영화에 더 가까운 <디아볼릭>은 심리의 전개가 영화의 축을 이룬다는 점에서 이후 영화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자벨 아자니와 샤론 스톤이 주연을 맡은 1996년작에 이르기까지 세번에 걸쳐 리메이크되었다.
<리피피> Du rififi chez les hommes
감독 쥘스 닷신 ┃ 출연 장 세르베, 칼 뫼너 ┃ 프랑스 ┃ 1955 ┃ 113분
<야수 같은 무리> <벌거벗은 도시> 등을 만든 1940년대 도시 스릴러의 장인 쥘스 닷신이 매카시즘 선풍에 쫓겨 프랑스로 이주한 뒤 만든 첫 번째 작품. 치밀한 극적 구성과 사실주의적인 톤으로 프랑스 범죄영화들의 파토스와는 어느정도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 피에르 멜빌의 <도박꾼 밥>, 자크 베케르의 <현금에 손대지 마라>와 함께 1950년대 프랑스 스릴러의 주요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쥘스 닷신은 이 영화의 주인공들을 마치 성실한 장인들인 것처럼 다루면서 동정과 연민으로 감싸안는 묘사를 덧붙인다.
<지하실의 멜로디> Melodie en sous-sol
감독 앙리 베르뇌유 ┃ 출연 장 가뱅, 알랭 들롱 ┃ 프랑스 ┃ 1963 ┃ 118분
코미디와 전쟁영화 그리고 스릴러를 오가며 장르영화를 만들었던 앙리 베르뇌유는 <지하실의 멜로디>에서 코미디와 서스펜스를 조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제 막 감옥에서 나온 늙은 갱(장 가뱅)이 감방동료 프란시스(알랭 들롱)와 함께 카지노 지하를 털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는 설정은 장 피에르 멜빌의 <도박꾼 밥>과도 유사하다. 이 섹션의 영화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장 가뱅과 알랭 들롱의 협연을 볼 수 있다.
<사무라이> Le Samourai
감독 장 피에르 멜빌 ┃ 출연 알랭 들롱, 푸랑수아 페리에 ┃ 프랑스 ┃ 1967 ┃ 105분
“르누아르가 누벨바그의 아버지라면, 멜빌은 그들의 대부였다”는 데이비드 보드웰의 말이 상기시키는 것은 멜빌의 미국 문화 인식에 관한 태도이다. 그러나 <사무라이>는 미국영화의 영향권 내에 있으면서도 멜빌만의 독특한 기하학적 형식주의로 일관되어 있다. ‘영도의 미장센’으로 불리는 <사무라이>의 첫 시퀀스가 그 좋은 예. 당시만 해도 흔하지 않았던 줌인-트랙아웃으로 시작하는 이 시퀀스로 주인공 제프 코스텔로의 고독, 그리고 그의 정신분열증적 세계를 표현한다. 미니멀한 구도 속에서 침묵과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킬러의 모습은 기묘하게 뒤틀어진 엄숙주의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의식> La Ceremonie
감독 클로드 샤브롤 ┃ 출연 이사벨 위페르, 장 피에르 카셀 ┃ 프랑스 ┃ 1995 ┃ 111분
누벨바그의 일원이었으며, 한때는 ‘범죄영화의 진화’라는 글을 쓰기도 했던 클로드 샤브롤은 장르에 대해 집착했다. 그는 장르화를 통해 부르주아 계급을 유지하고, 조롱하고 또는 파멸시킨다. 후반기 필모그래피에 작성되어 있는 <의식>은 다소 장르화된 범주에서 벗어나지만, 여전히 부르주아 세계의 관습과 냉소를 한 호흡에 갖춘 클로드 샤브롤이 벌이는 가족 도살극이다. 거대한 저택에 들어간 문맹자 하녀가 그녀의 우체국 직원 친구와 함께 부르주아 가족 한떼를 의식을 거행하듯 살해한다. 갑작스럽게 모든 것이 벌어지고 해결되는 샤브롤식 결말이 충격적이다.정사헌/ 영화평론가 taogi@freechal.com
영화사 다시 보기그의 초상, 애증으로 증언하다
<진 세버그의 일기> From the Journals of Jean Seberg
감독 마크 라파포트 ┃ 출연 진 세버그, 메리 베스 허트 ┃ 미국 ┃ 1996년 ┃ 97분
장 뤽 고다르는 “영화사는, 여자애들의 모습을 찍는 남자애들의 역사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진 세버그의 일기>는 렌즈에 포착된 ‘여자아이들’ 가운데 특별히 불행했던 한 사례를 회상한다. 감추어진 게이의 시선으로 영화들의 의미를 들추어낸 <록 허드슨의 홈 무비>를 만들었던 감독답게 마크 라파포트는 이 영화에서도 배우 메리 베스 허트를 1979년 자살한 진 세버그의 대역으로 내세워 1인칭의 해설을 들려주고 자료화면을 조합하며 대담한 해석의 자유를 만끽한다. 정치운동 단체 ‘블랙 팬더’를 지지한 이후 그녀의 뒤를 따라붙은 FBI의 음해와 보이지 않는 고문으로 마흔살에 자살한 세버그가 살아 있다면 그럴 법한 모습으로 분장한 메리 베스 허트는, 위트와 분노를 머금은 음성으로 17살에 찍은 오토 프레민저의 <성녀 잔>부터 <에어포트>까지 세버그의 출연작과 삶을 설명한다. 한때 정치적 행동에 앞장섰고, 남편이 감독한 영화에서 창녀처럼 그려졌으며 각기 다른 식으로 힘겨운 만년의 커리어를 끌어간 세 여성으로 제인 폰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진 세버그를 나란히 놓은 대목도 누군가가 논문의 착상을 얻을 만한 대목이다.
<조셉 로지: 네개의 이름을 가진 사나이> Joseph Losey: Man with Four Names
감독 나카다 히데오 ┃ 출연 가브릭 로지, 줄리 크리스티 ┃ 일본 ┃ 1996년
매카시 마녀사냥의 광풍은 위스콘신 출신의 미국 감독 조셉 로지를 유럽의 사회파 영화 작가로 만들었고, 세개의 다른 이름을 선사했다. 나카다 히데오가 1992년 떠난 영국 연수를 기회로 4년에 걸쳐 완성한 이 다큐멘터리는, 권력갈등의 탁월한 묘사와 사회비판, 형식미에 대한 만년의 집착으로 잘 알려진 감독 조셉 로지를 겁내고 미워하고 존경하고 사랑했던, 여러 여인과 가족, 스탭들의 회상을 엮어낸다. 망명자 로지가 다른 이름으로 만난 두 번째 아내는 “그를 만나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할 수 있음을 알았다”고 미소짓고, 유년기 내내 로지와 떨어져 살았던 장남은 병상의 아들을 무뚝뚝하게 대하다가 별안간 로마 여행으로 데려갔던 아버지를 떠올리고, <하인>의 제임스 폭스는 “함께 일한 배우의 커리어에 줄곧 관심을 표했지만 듣기 좋은 소리는 한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고 웃는다. 어떤 의미도 영화 속에서 찾기 쉽게 배치하지 않았던 엄밀한 건축가적 태도를 지녔던 감독답게 로지의 초상 역시 애증의 증언 뒤에 가려져 있다.
<도쿄가> Tokyo-Ga
감독 빔 벤더스 ┃ 독일 ┃ 1983년 ┃ 92분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매료된 빔 벤더스는 1982년 16mm 카메라를 들고 도쿄를 찾았다. 도쿄 착륙 전 비행기 창 밖을 내다보며 하는 독백. “영화도 이렇게 찍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이는 어떤 것도 입증하길 원하지 않고 단지 보기만 할 수 있다면.” 그러나 벤더스가 그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가 도쿄에 온 건 오즈 영화에 잡힌 진실한 순간을 실제 도쿄에서 찾기 위함이었다. 도쿄의 풍경과 사람들, 오즈 영화에 나오는 장소들을 지나 찾아간 오즈의 무덤, 묘비에는 이름도 없이 ‘무’(無)자만 새겨져 있었다. “오즈 영화는 진실이 있었다. 사람이, 도시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그런 사실의 묘사는, 그런 예술은 이제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다.” 도쿄에서 만난 베르너 헤어초크는 한술 더 떠 흥분한다. “적합하고 맥락이 있는 이미지는 사라져 버렸다.”오즈에 대한 벤더스의 존경심은 곳곳에 배어 있지만 실제 일본 문화에 대해 그는 겸손하지는 않은 것 같다. 골프연습장에서 밤새도록 골프공을 때리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조롱하듯 길게 비춘다. 도쿄가 오즈 영화처럼 순결한 이미지의 고향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오즈 영화의 배우 류치수, 촬영감독 아쓰타 유하루 등을 통해 들려주는 오즈의 이야기도 재밌지만, 오리엔탈리즘의 혐의가 섞인 이방인의 눈에 비친 도쿄의 모습도 여러 읽을 거리를 던진다.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