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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젤라토, 수박, 콩국수… 여름을 기억하게 하는 영화 속 한입
이유채 2026-07-30

동경과 자유의 젤라토

<루카>

이탈리아 소년 루카(제이컵 트람블레이)와 알베르토(잭 딜런 그레이저)가 젤라토를 먹고 느끼는 황홀감은 차원이 다르다. 사실 둘은 바닷속에 사는 바다 괴물, 육지에서 인간 모습이 돼 처음 맛본 인간 세상의 음식이 바로 달콤하고 시원한 젤라토다. 알베르토는 의심스러운 듯 혀끝으로 먼저 맛본 뒤, 유혹을 참지 못하고 콘까지 한입에 먹어치운다. 찰나의 행복을 안겨주고 이내 녹아버린 젤라토는 두 친구가 인간 세계에 품었던 잠깐의 동경을 닮았다. 둘은 곧 아슬아슬한 모험에 뛰어든다. 이탈리아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한 <루카>는 엔리코 카사로사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루카와 같은 13살 무렵에 감독은 친구들과 해변 마을을 뛰어다니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고. 영화에는 여름을 닮은 파스타도 등장한다. 바질 페스토를 듬뿍 버무린 초록빛 ‘트레네테 알 페스토’다. 알베르토가 손으로 퍼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절로 군침이 돈다.

<로마의 휴일>

오드리 헵번이 젤라토를 먹는 장면의 전후 사정은 이렇다. 유럽 순방 중 로마를 찾은 앤 공주(오드리 헵번)는 단 하루, 빽빽한 왕실의 규율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그 일탈 가운데 하나가 젤라토를 사 먹는 일이다. 직접 사서 광장 아무 곳에 걸터앉아 한입 베어 무는 순간의 해방감은 남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영화를 대표하는 자유의 순간으로 남았다. 실제 촬영지는 로마의 스페인 광장이다. 다만 지금 이곳에 앉아 젤라토를 먹었다가는 적지 않은 벌금을 물 수 있다. 관광객들이 남긴 음식물로 문화유산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로마시가 광장에서의 취식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대신 앤 공주의 일탈 목록에는 다른 것도 있다. 노천카페에 앉아 보거나 긴 머리를 싹둑 잘라보는 건 어떨까.

추억의 셔벗

<태풍이 지나가고>

30도를 웃도는 여름 끝 무렵, 아들 료타(아베 히로시)가 집을 찾자 엄마 요시코(기키 기린)는 냉동고에서 작은 유리컵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유리컵의 정체는 칼피스 음료와 물을 섞어 얼린 셔벗이다. 이 소박한 간식을 두고 오가는 대화에는 모자의 미묘한 관계가 담겼다. 요시코는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어 좋다고 말하지만 료타는 연금으로 부족함 없이 생활하면서도 궁상을 떤다며 투덜댄다. 셔벗은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을 다시 불러오는 매개이기도 하다. 꽝꽝 언 얼음을 애써 긁어낸 결과가 겨우 티스푼을 채울 정도인 걸 보고 요시코는 허탈한 듯 웃는다. 모자가 지나온 숱한 티스푼의 여름을 짐작하게 하는 소박한 풍경이다. 칼피스는 일본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국민 유산균 음료다. 탄산 빠진 밀키스에 요구르트를 섞은 듯한 맛을 떠올리면 된다.

욕망의 가스파초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토마토를 갈아 만든 스페인의 차가운 수프 가스파초. 강렬한 붉은색의 요리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특유의 원색적인 세계와도 잘 어울린다. 음식을 정체성과 욕망을 표현하는 장치로 즐겨 써온 감독답게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에서 가스파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스파초에는 떠나간 사랑을 붙잡고 싶은 여인의 절박함과 알모도바르식 블랙코미디의 묘미가 담겼다. 주인공 페파(카르멘 마우라)의 가스파초에는 특별히 수면제가 들어간다. 이 가스파초를 이별을 통보한 연인 이반(페르난도 기옌)에게 먹여 복수하려 하지만 정작 엉뚱한 사람들이 들이켜고 만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잠든 가운데 경찰관이 가스파초의 재료를 묻자 페파는 토마토부터 하나씩 읊기 시작한다. 과연 수면제까지 말할 것인가. 긴장되는 대목이다.

각성의 새우 요리

<아이 엠 러브>

알록달록한 채소 위에 통통한 새우를 올린 파인 다이닝 한 접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관능적인 연출 속에서 선홍빛으로 익은 새우는 그 자체로 욕망의 이미지가 된다. 엠마(틸다 스윈턴)는 새우를 한점씩 썰어 입에 넣으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재료를 손질하고 기름에 튀기는 주방의 분주한 소리까지 겹치면서 오감은 극대화된다. 엠마는 곧 요리를 만든 아들의 친구 안토니오(에도아르도 가브리엘리니)와 이탈리아의 태양처럼 뜨거운 사랑에 빠진다. 이 여름 접시는 모든 사건의 시작이다. 고향인 러시아를 떠나 밀라노 재벌가의 규율에 맞춰 살아온 엠마의 억눌린 감각과 욕망을 단숨에 일깨운다. 이 한 접시의 파급력이 꽤 컸던 모양이다. 영화 개봉 이후 요리를 재현한 메뉴가 유럽 곳곳의 레스토랑에 등장하기도 했다.

우정의 오이 김밥

<우리들>

아삭아삭 씹히는 소리만으로도 더위를 날려줄 것 같은 오이 김밥. 단순하고 상쾌한 맛이 특징이지만 <우리들>의 오이 김밥에서는 복잡한 맛이 난다. 여기에는 친한 친구 지아(설혜인)가 맛있게 먹어주길 바라는 선(최수인)의 우정이 담겼다. 딸 선이 김밥을 싸달라며 애교를 부리자 피곤한 몸으로도 접시 가득 김밥을 말아주는 엄마(장혜진)의 애정도 스며 있다.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지아가 다정한 선 모녀를 부러워하는 마음에, 지아가 오이 김밥을 무시하면서 선이 받은 상처까지 더해진다. 그러니까 오이 김밥 한 접시는 11살 어린이들의 예민한 세계를 <우리들>이 얼마나 섬세하게 그려내는지 말해준다

낯섦과 적응의 콩국수

<남매의 여름밤>

어색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도 있다. 고등학생 옥주(최정운)에게 콩국수는 그런 음식이다. 여름방학 동안 아빠(양흥주), 남동생 동주(박승준)와 함께 할아버지(김상동) 집에서 지내게 된 첫날, 모두가 둘러앉아 먹는 첫 음식이 콩국수다. 먼저 할아버지 수저를 챙기고 어린 동생에게 국수를 덜어주느라 손은 분주하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옥주는 모른다. 넓은 식탁을 채우는 건 후루룩 면발을 들이켜는 소리와 국물을 떠먹는 소리다. 적막한 첫 식사는 가족의 현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함께하는 식사가 늘어날수록 이들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옥주네 가족은 낮에는 텃밭에서 딴 고추를 올린 비빔국수를 먹고, 밤에는 수박을 나눠 먹으며 남은 여름을 보낸다. 늘 가족과 먹던 음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랜만에 그 음식을 함께 먹자고 연락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리틀 포레스트>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틀어 올린 혜원(김태리)의 손놀림이 일사불란하다. 1단계, 냉장고에서 콩국물 병과 방울토마토를 꺼낸다. 2단계, 싱크대에서 수북한 오이채의 물기를 탈탈 털어 그릇에 담는다. 3단계, 오이채가 잠길 만큼 콩국물을 붓고 고명으로 방울토마토를 올린다. 4단계,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 앉아 먹는 일에만 집중한다. <리틀 포레스트> 중반부에 등장하는 오이 콩국수 장면은 혜원이 도시를 떠나 시골 생활에 완전히 적응했음을 보여준다. 직접 기른 제철 재료로 한끼를 차려 먹는 일이 더 이상 그에게는 서툰 일도, 특별한 일도 아니다. 콩국수를 먹는 시간은 집을 떠난 엄마(문소리)와의 기억도 불러온다. 엄마와 나란히 앉아 토마토를 껍질째 베어 물던 그때도, 지금처럼 하루가 천천히 흘러갔다고 혜원은 생각한다.

성장의 수박

<여름정원>

수박을 먹기 위해 필요한 것은? 수박을 자를 만한 칼이다. 그러나 소년 3인방 키야마(사카타 나오키), 카와베(오 다이키), 야마시타(마키노 겐이치)도, 이들이 아지트처럼 드나드는 노인 덴포(미쿠니 렌타로)의 집에도 마땅한 칼이 없다. 적극적인 야마시타가 한낮의 땡볕을 뚫고 칼을 구해온다. 기다리다 지쳐 잠들었던 친구들은 눈을 뜨자마자 두툼하게 잘린 수박 한 조각을 받아 든다. 한입 베어 문 순간의 달콤함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칼을 구해온 야마시타뿐 아니라 두 소년도 덴포의 집에서 크고 작은 성취를 경험하며 성장한다. 수박 장면에는 즐거움만큼이나 슬픔도 어려 있다. 덴포는 가을이 되면 꽃씨를 심자며 미래를 말하지만 소년들이 그의 집을 찾은 이유가 죽음에 대한 호기심이었다는 걸 관객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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