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욱 사단 <순풍 산부인과> <똑바로 살아라>
많은 이들에게 각인된 배우 박영규의 ‘억울한 사위’나 ‘짠돌이’, ‘빈대’ 캐릭터는 김병욱 PD의 시트콤이 그 출발점이다. <순풍 산부인과>의 성공 이후,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와 <똑바로 살아라>까지 연이은 레전드 급 시트콤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김병욱 PD. 이 세 편의 시트콤 모두에서 박영규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소위 김병욱 사단이라 불리는 배우들의 대열에서 박영규의 존재감이 큰 만큼 최근 2017년 김병욱 PD가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시트콤 <너의 등짝에 스매싱>에서도 그의 반가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미달이 아빠, 오지명의 사위, 오미선의 남편. 동시에 지독할 정도로 지갑 문 꽁꽁 걸어 잠근 짠돌이 역할로 거듭난 <순풍 산부인과>의 영규는 극을 이끈 주인공으로 손색없는 비중으로 출연했다. 극중 배역명도 본명 그대로 ‘박영규’를 사용했는데, 너무나 찰떡같은 연기력으로 배역을 소화한 탓에 배우 박영규에 씌워진 코믹함을 그의 유일한 이미지로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순풍 산부인과>의 종영 이후에는 <똑바로 살아라>를 통해 박미선이 아닌 이응경과 부부로 호흡을 맞췄다. 가족은 달라졌지만 <순풍 산부인과>에서의 캐릭터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캐릭터로 연장선상의 웃음을 유발했고 더불어 김병욱 PD의 시트콤들 사이에 느슨하게 연결된 세계관을 각인시켰다.<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전설의 '소시지 전쟁' 편
두 작품 사이에 낀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서 그는 고정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빈대 때려잡는 끈질긴 할아버지 노구(신구)와의 ‘소시지 전쟁’ 에피소드를 통한 인상적인 카메오 출연으로 시청자들을 웃음바다로 이끌었고 이 에피소드는 현재까지도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레전드 에피소드로 손꼽히고 있다. 침대에 발라당 누워 원통해 하는 모습, 어떻게 하면 돈을 안 낼까 계산하며 눈치를 살피는 내적 독백, 구박을 당하곤 “장인어른(또는 형님), 왜 이러세요. 진짜”를 남발하는 대사들은 모두 시트콤 속 박영규가 일군 웃음의 증거들이다.<주유소 습격사건> 주유소 사장
박영규의 수난은 <주유소 습격사건>에 이르러 제대로 본격화된다. 1999년 충무로의 코미디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던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그는 습격을 당한 주유소의 사장으로 등장했다. 역시 억울한 연기의 대가답게 ‘당하는’ 배역을 기막히게 소화하는 그다. 당시 영화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주유소를 습격하기로 한 일당들의 범죄 행각을 그린 <주유소 습격사건>을
영화 내내 된통 당하기만 하는 주유소 사장. 그는 애초에 악덕 업주였다. 아르바이트생을 향한 윽박은 물론이고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사장이었기에 <주유소 습격사건>이 단순히 대책 없는 폭력 영화로 읽히지 않고 자본과 권력에 대항하는 저항의 메시지로 읽힐 수 있었다. 여기에 박영규의 애처로운 밉상 사장 연기가 절묘하게 통쾌함을 끌어올리는데 일조한다. 세기말 전설적인 한국의 코미디 영화로 분류된 <주유소 습격사건>. 김상진 감독과 배우 박영규가 합심한 속편 <주유소 습격사건 2>가 10년 만에 관객들을 찾아오기도 했다. 다시 주유소 사장으로 호기롭게 나선 박영규의 야심이 돋보였지만 늘어난 캐릭터들을 제대로 조율하지 못했다는 평가와 함께 전작의 유명에는 한참 모자란 관심에서 아쉬운 마무리를 해야 했다.괴짜 Dr. 코왈스키, <남자사용설명서>
숨겨진 코미디 수작 <남자사용설명서>에서 박영규는 반가운 얼굴을 비췄다. 여기에 <순풍 산부인과>의 미달이 아빠나 <주유소 습격사건>의 악덕 사장의 잔상은 없다. <남자사용설명서>는 캐릭터의 매력이 각기 다른 에너지를 내뿜는다기보다 키치함으로 똘똘 뭉친 B급 코미디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영화다. 이원석 감독의 개성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간 이 영화가 “시대를 앞서간 코미디”라는 평을 받는 이유다. 박영규가 연기한 캐릭터 닥터 코왈스키는 <남자사용설명서>의 키치한 감수성을 극대화하는 효과적인 장치다. 주인공 보나(이시영)의 안 풀리는 인생을 뒤바꾼 문제의 ‘비디오’를 만든 바로 그 작자.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하자 화면에 등장한 닥터 코왈스키는 보나에게 ‘남자’라는 제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A부터 Z까지 일러준다. ‘1단계 눈 마주치기, 2단계 바라보기, 3단계 미소’와 같이 너무나 뻔해서 코웃음 밖엔 나오지 않을 방법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방법이 실전에서 효과를 발휘하고, 보나 인생의 엉킨 매듭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한다. 닥터 코왈스키는 이따금씩 보나의 현실에까지 등장해 코치를 해준다. 이토록 매력적인 캐릭터를 반드시 박영규에게 맡겨야겠다고 생각한 이원석 감독의 생각과는 달리 캐스팅은 쉽지 않았다. ‘나까 코미디’(싸구려 코미디)는 안 한다며 손사래를 친 박영규를 설득하는 데 공을 들였다는 그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사실. 박영규가 아니었더라면 코왈스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적당한 무게감, 그리고 천연덕스러운 희극 연기를 누가 감당했을지는 모를 일이다.<정도전>의 숨은 주인공 ‘이인임’
KBS1 채널이 독보적으로 키워낸 정통 사극의 입지가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를 듣던 시기. 대하드라마 <정도전>의 등장은 구세주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른바 여말선초(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의 격동하는 역사를 조명한 드라마 <정도전>에서 박영규의 존재감은 엄청났다. 주인공 정도전을 연기한 배우 조재현은 다른 배역이 더 두드러지는 탓에 ‘드라마 제목이 왜 <정도전>인가’ 원망하기도 했었다고. 그 원망에 일견 수긍이 갈 법도 한 것이 박영규가 맡은 배역 이인임이 실로 굉장히 매력적인 악역이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팬덤까지 생길 정도로 높은 인기를 구가한 사극이었다. 그 인기 비결 중 으뜸은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빚어내는 정현민 작가의 고집이다. 그는 심지어 주인공조차 최선의 편으로 두지 않았다. 절대적 선악을 배제한 그의 캐릭터 구성은 이해할 수 없는 정도전의 행동을 묘사하기도 하며, 악역 이인임마저 40% 정도는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로 만들었다. 현대 정치판의 축소 버전을 보는 듯한 드라마 <정도전>의 전개에 시청자들이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오랜 시트콤 연기로 두드러진 박영규의 희극적인 이미지를 우려했던 정현민 작가는 초반에 그를 캐스팅하길 반대했지만 사극 <해신>을 보고 곧장 마음을 바꿨다. 사실 박영규는 정극 연기부터 사극 특유의 중압감까지 너른 스펙트럼을 소화할 수 있는 뛰어난 배우였다. “<정도전>은 사실상 이인임의 드라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인임이라는 캐릭터는 처세술에 통달한 흥미로운 정치가였다. <정도전>으로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오른 정현민 작가와는 새 정치 드라마 <어셈블리>에서 다시 협업해 원조 보수를 자처하는 5선 의원 박춘섭 역을 탁월하게 소화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