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룡점정’이란 슬로건 아래 치러진 올해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졸업 영화제가 메가박스 성수점에서 3월8일부터 10일까지의 일정을 마쳤다. 짧지만 뜨거운, 작지만 큰 축제가 끝났다. “오랫동안 준비한 영화의 마지막 점”을 찍는다는 의미의 슬로건이라곤 하지만 KAFA의 졸업 영화제는 또 다른 시작점이기도 하다. 이제 막 영화 만들기의 세계에 들어선 신진 영화인들이 31개의 영화를 내놓았고, 이 31개의 흔적은 이후 한국영화계의 초석이 될 전망이다. 정규과정 40기와 장편과정 16기, 그리고 지난해 신설된 KAFA Actors 1기 학생들이 만든 단편 실사 극영화 19편, 단편애니메이션 3편, 장편 실사 극영화 6편, KAFA Actors 실습 작품 3편이 스크린에 걸렸다. 3월16일엔 부산 영화진흥위원회 표준시사실에서도 상영이 이어졌다.
많은 상영작이 ‘타인과의 관계’라는 주제에 천착했다. 관계의 대상엔 가족, 친구, 연인, 사제지간은 물론이거니와 이상한 존재들과의 관계까지도 포함됐다. 곰팡이에서 만들어진 존재를 다뤘던 <다섯 번째 흉추>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갈비뼈>(임하연)는 한 여성이 자신의 갈비뼈에서 태어난 남성과 교류하는 이야기를 그렸고, 애니메이션 <곰팡이>(박한얼)는 남편의 유골에 핀 곰팡이에 집착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이야기를 명확히 끝맺으려는 작법도 공통점이었다. 관계에 대한 의문과 아픔이 어떤 식으로든 명확히 해소되는 경향을 보였다.
15~30분을 오가는 단편영화들도 대부분 서사적인 완결성을 추구했다. 장편영화의 리듬을 습득하기 위한 일련의 과도기일 순 있으나 약간의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10~20년 전 단편영화의 부흥을 이끌었던 <폴라로이드 작동법>이나 <9월이 지나면> <이름들>처럼 하나의 강렬한 순간과 사건에 몰두하는 작품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이러한 면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작품은 영화제의 트레일러 영상이었다. 한 중년 남성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한밤의 수산물 시장을 거니는 1분 남짓의 작품이다. 포장마차의 천막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사람들, 비릿한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뚜렷한 생선들의 이미지, 시퍼런 빛이 서린 작은 항구의 풍경이 특별한 이야기 없이도 강한 정취를 불러일으켰다. 단편영화에서 서사의 밀도를 억지로 채우려는 것보단 자신만의 이미지와 정서를 찾는 단계가 선행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졸업 영화제가 열린 메가박스 성수는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료의 작품을 구경하러 온 듯한 영화인들은 포토월에서 연신 인증숏을 찍어댔고, 신설된 KAFA Actors의 배우들은 번갈아 매표소를 지키며 관객들과 환한 인사를 나눴다. <그 겨울, 나는>의 주연이었던 권소현 배우 등 KAFA와 연을 맺어온 젊은 영화인들이 찾아와 종종 이목을 끌기도 했다. 상영이 끝날 때마다 울려 퍼진 박수 소리가 커다란 국제영화제에서 들었던 박수 소리보다 더 진정 어리게 들린 게 착각은 아닐 것이다.
<씨네21>의 추천작
<연옥> 감독 장재경<연옥>이 끝난 후 두명의 관객은 “영화가 너무 어지러웠다”라는 평을 남기며 유유히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연옥>의 화면은 줄곧 핸드헬드의 거센 흔들림으로 가득하다. 더군다나 30분가량의 러닝타임 대부분엔 두 남녀의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재빠른 템포의 컷 편집과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오가는 플롯의 교차도 대담하다. 초점이 나간 정경 인서트도 종종 개입하며 관객의 어지럼증을 부추긴다. 여기까진 <연옥>이 스타일리시하단 명목 아래 겉멋을 부리는 작품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내실도 단단하다. 주인공 유리와 병우는 6년차 연인이자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를 재구성한 연극의 주연배우이기도 하다. 감독은 갈수록 소원해지는 연인사의 고난을 연극 속 배역의 상황과 맞물리게 하며 자연스러운 감정의 고조를 성취한다. “시간은 둘마저 혼자보다 외롭게 만들어요”라는 에우리디케의 색다른 대사가 평범한 연인들의 평범한 사랑을 적절히 대변한다. 줄곧 빠르게 끌어올렸던 편집의 속도감을 죽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유리와 병우의 표정에 집중하는 전략 역시 탁월하다. 영화 속 연극이란 소재나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재해석하는 시도, 연극과 생활의 묘한 공명을 부추긴단 점과 일부 장면들은 자크 리베트나 알랭 레네 혹은 최근 하마구치 류스케나 장건재의 작업을 곧바로 떠올리게 만든다. 이후 더 뚜렷한 오리지널리티까지 확보했을 때를 고대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