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영화제의 슬로건은 ‘우리 시대의 민속지’다. 민속지는 주로 다큐멘터리 방법론을 설명할 때 쓰이는 용어로 탐험을 기반으로 토착민과 관계 맺는 인류학적 접근법을 뜻한다. 이와 관련해 인류학자이자 혼합 다큐멘터리의 대가인 장루슈의 회고전이 마련된다. 장루슈의 개성이 발아한 초기작, <나, 흑인>부터 <조금씩 조금씩>까지 그의 작품 세계를 조망해볼 기회다. 다큐멘터리의 확장성을 실험하는 최신작들도 소개된다. <망대>는 지역과 투쟁을 이야기할 때 상대적으로 배제된 강원도 춘천의 좁은 골목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지역 주민들의 인터뷰와 공간에 대한 조망을 바탕으로 한 작품에 변곡점을 그리는 것은 SF소설을 지향하는 작가적 상상력이다. 삶이 곧 투쟁인 지역 주민들을 미래에서 파견된 시간여행자이자 ‘불법체류자’로 바라보는 시선이 흥미롭다.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를 혼합한 형식의 ‘애니다큐’를 소개하는 섹션도 마련된다. 다큐멘터리에서 애니메이션은 <관타나모 수용소: 단식투쟁>처럼 기억을 재현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며, <아일랜드식 가구 재활용>에서처럼 가구들의 시간을 마술적으로 포착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애니다큐라는 용어 자체에 의문이 생긴다면 메타영화인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그게 뭐야?>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다.
경쟁부문인 글로컬 구애전 섹션에서는 극영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단편의 묘미를 잘 살린 이색적인 작품들이 눈에 먼저 띈다. 코소보라는 낯선 나라에서 온 영화 <발코니>는 4층 높이의 발코니에 걸터앉은 아이로부터 번져나가는 관계망을 원신 원컷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발코니>를 코소보의 정치적 상황과 연관 짓는 해석이 많지만 그와 동시에 영화 관람 방식에 대한 은유로 해석해볼 여지가 있다. 사건의 진원지인 소년이 영화에서 묘하게 배제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앙상블>은 음성 대신 음향효과만 존재하는 시기의 무성영화의 기법을 표방한다. 남녀의 일상적인 다툼을 그리던 흑백영화는 컬러로 전환되면서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이때 두 남녀를 위한 음향적 분신인 탭댄서와 래퍼가 등장하는데 그 순간부터 주객이 전도된 듯 남녀의 이야기가 자꾸만 밀려난다. 디지털 시대의 상징으로도 읽힌다. 올해 특별전은 스페인 비디오아트로, 현재진행 중인 비디오아트의 경향을 가늠해볼 기회다. 5분의 러닝타임 동안 내시경으로 관악기의 내부를 탐사하는 <관>, 결정적인 순간을 되돌리는 방식의 <비상구> 등 단순한 방법을 통해 새로운 시선의 세계를 열어젖히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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