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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변혁을 위한 신념은 영화가 되고

<정원사>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영화세계

마흐말바프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사회주의 예술운동에서 벌어졌던 리얼리즘 논쟁의 문화적 협소함을 새삼 느낀다. 실제와 환상의 자유로운 결합과 시간과 공간을 창조해내지만 냉철한 현실인식을 잃지 않는 그의 영화들을 통해 미학적 한계와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동시에 확장해가는 새로운 종류의 리얼리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투쟁과 투옥, 혁명과 추방으로 이어진 그의 삶과 동궤를 이룬다. 영화나 여타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던 그는 팔레비 왕정에 반대하는 지하조직의 투사였고 자신의 신념을 실현시키기 위해 호위병의 배에 칼을 꽂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 변혁을 위해서는 문화와 사상의 변화가 우선 실현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영화를 선택했다.

환상적 우화, 현실적 도큐먼트

<순수의 순간>은 그러한 변화의 과정을 시적으로 포착해낸 작품이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투쟁’의 장면을 다루고 있지만 서사의 궁극적인 추동력은 ‘사랑’이다. 마흐말바프에게 칼을 맞았던 사나이가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며 찾아오는 데서 영화는 시작된다. 그는 습격당하기 직전 자기에게 시간을 물었던 소녀를 20년 동안 마음에 품어왔고 그 미지의 사랑은 그 이후 그의 삶을 지배했었다. 마흐말바프는 ‘인류를 구원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청년에게서 젊은 시절 자신을 발견하고 캐스팅한다. 젊은이들은 중년 남성들의 과거를 재연하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섰지만 그들과는 다른 과거를 쓴다. 망설이기만 했던 청년은 소녀에게 꽃을 내밀고 칼을 꽂았던 손은 빵을 내민다. 직선의 시간을 해체하고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은 독특한 서사구조의 이 작품은 마흐말바프의 정치적 색깔과 미학적 특질을 흥미롭게 펼쳐낸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빵이 필요하다’는 단순한 명제는 그의 영화를 통해 반복되는 모티프 중 하나이다. 그의 영화에서는 이란인들의 주식인 ‘눈(nun)’을 나누는 모습이 빈번하게 나오는 데 그것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이 존재하는지를 알려주는 지표이다. <칸다하르>에서 ‘신’(神)을 찾아 아프가니스탄에 왔다가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무서운 욕망만을 목격하게 된 미국인은 자신을 찾아 온 환자들을 약 대신 ‘눈’으로 치료한다. 그들의 병은 가난과 기아에서 비롯되었고 신의 이름을 빌어 벌어지는 전쟁으로 인해 그들은 병든 육체로부터 벗어날 희망을 잃었다. 그의 초기작 <사이클리스트>도 부당하게 인간에게 부과된 삶의 규범과 편견의 굴레들을, 멈출 수 없는 자전거를 탄 사내의 모습을 통해 풀어내었다. 돈이 없어 병원에서 죽어가는 아내, 그녀를 위해 1주일간 쉬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 서커스의 주인공이 된 왕년의 사이클 챔피언. 이란 사회에서 노동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한 아프간 난민들의 참상을 고발하면서 돈과 정치권력의 노예가 된 이란인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청력에 의지해 세상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시각장애인 소년을 다룬 <고요> 역시 일상에 숨어있는 음악들을 찾아내는 아름다운 감수성과 미적인 경험을 압박하는 경제적 곤경을 시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는 인간의 삶이 처한 비극적 현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고도의 상징들이 자유롭게 결합하고 있다. 모든 영화는 하나의 환상적인 우화이자 현실에 대한 도큐먼트들이다.

이슬람 여성을 위한 전복

마흐말바프의 영화들이 환기하는 가장 끔찍한 현실 문제 중 하나는 이슬람 사회 안에서 여성의 육체 위에 재현되는 억압 정치에 관한 것이다. <칸다하르>는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이후 더 이상 삶을 지속해야할 희망을 잃어버리고 자살을 선언한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칸다하르로 향하는 나파스의 여정을 보여준다. 그녀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아름다운 육체를 부르카로 감싸고 ‘나파스’라는 이름 대신 ‘검은 머리’(아프간 사회에서 여성을 낮추어 부르는 일반명사) 중 하나가 된다. 이란의 전통 카펫을 둘러싼 판타지 <가베> 역시 하나의 주체로서 선택권을 박탈당한 여성의 삶에 관한 통찰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부조리함에 대해 마흐말바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영화를 통한 전복을 꾀한다. 하나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그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발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아내와 딸들로 하여금 영화를 통해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사회 안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개체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들은 그의 영화를 통해 목소리와 비전을 찾아 가고 있다. 마흐말바프 가족은 영화학교를 만들었고 가족 구성원은 모두 영화의 실질적 스탭이 되었다. 아내와 딸은 감독이 되어 <내가 여자가 된 날>, <사과>, <오후 5시> 등을 통해 여성의 삶을 기록하고 증언함으로써 성별과 연령을 초월하여 ‘감독’이라는 직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작업의 결과는 혹독했다. 가족은 이란을 떠나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촬영현장은 수시로 폭탄테러와 암살 위협에 노출되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마흐말바프들의 카메라를 멈출 수 없었다. 마흐말바프의 말에 따르면 ‘이란 사회는 익사’하고 있으며 그는 그것을 목도한 ‘화가’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는 것보다 익사자를 살리는 것이 더 시급하다.

마흐말바프 부자의 종교 토론

마흐말바프가 자신의 아들 마이센과 대화를 나누듯 완성한 영화 <정원사>가 월드 프리미어로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다. 이 영화와 부산의 인연은 애틋하다. 그는 감독과 선생의 자격으로 부산영화제에 수차례 초청되었을 뿐 아니라 2000년에 가족 회고전을 갖기도 했다. 여러 나라를 떠돌며 집시처럼 살면서 완성한 <정원사>는 부산영화제의 아시아영화펀드(ACF) 후반작업 지원에 선정되어 색보정, 사운드믹싱, 35mm 프린트 전환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신정일치’ 국가인 이란에서 가장 민감한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종교’ 문제를 정면에서 논의했다.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나라, 종교의 교리가 인간의 욕망을 극도로 억압하는 일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민족의 종교적 우월성을 빌미로 타민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모순에 대해 두 대의 카메라가 부자(父子)의 시선을 대신하여 서로를 담았다.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전 인류의 융합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바하이 신앙의 본부가 있는 하이파의 바하이 정원에서 마흐말바프 부자는 세계, 종교, 영화에 관해 토론을 벌인다. 둘은 세대차로 인해 갈등을 보이기도 하지만 감독은 그중 무엇을 특별히 주장하기보다는 둘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고 관객이 판단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망명기간 동안 힘겹게 구축된 마흐말바프가(家)의 새로운 영화 <정원사>가 펼쳐 보일 세계가 자못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