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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모되지 않는 매혹의 그녀를 만나다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의 배우 김지미

어렸을 적 김지미가 동양최고의 미인이라고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걸 들었을 때도 나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김지미라면 동네 어귀에 붙은 영화포스터에 새겨진, 빛바랜 여주인공의 이미지로만 남을 뿐이었다. 실제 스크린에서 봐도 그다지 감흥은 없었던 것 같다. <토지>와 같은 영화는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김지미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상당히 잘 생긴 여배우라는 인상만 남았다. 언젠가 텔레비전의 나훈아 쇼에서 객석에 있는 그녀를 시청한 적이 있는데 목소리가 탁음이어서 깜짝 놀랐다. 극장에서 들었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뭐랄까,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는 위풍당당한 기개가 있는 목소리였다.

비너스가 아닌 중년의 연기파 배우

철이 들어 자세히 영화를 들여다볼 무렵 내가 본 김지미의 영화는 전부 다 좋았다. 임권택의 <길소뜸>과 <티켓>, 이장호의 <명자 아끼꼬 쏘냐>였다. 그녀가 한 시대를 풍미한 비너스였는지는 몰라도 내게는 중년의 연기파 배우로 보였다. 원래 임권택 감독과 찍기로 했던 <비구니>가 불교계의 압력으로 제작이 중단되었을 때 신문지상에는 그녀가 머리를 하얗게 밀어낸 모습이 사진으로 실렸는데 그때도 참 잘생겼다는 생각만 했었다. 그러나 <길소뜸>에서 동란 시절에 사귄 동네 첫 사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30여년 만에 상봉했음에도 혈육을 포기하는 유복한 중산층 주부 역할의 김지미는 적어도 내게는 처음으로 인간화된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가진 사람의 염치와 치욕이 혈육의 정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걸 애써 누르는 냉정한 모습을 연기하는데 이처럼 복합적인 진동은 과문한 내 소치로는 이전에 본 적이 없었다.

<길소뜸>에서 김지미가 연기하는 화영은 청춘기에 사랑했던 남자와 재회했으나 그는 이미 추레한 중년 남자가 되어있다. 인간적으로 측은지심을 느낄 수는 있으나 과거의 사랑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에서 났으나 전쟁 난리 통에 잃어버린 아들은 무학자에 가난한 무지렁이로 살고 있고 어느 쪽으로나 육친의 정을 되살릴 수 없다. 화영은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옛 애인과 아들, 두 남자와 회자정리 하는 길을 택한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화영이 신성일이 연기하는 동진과 이별할 때 그녀는 동진에게 명함을 준다. 그 명함은 화영의 것이 아니라 남편 명함이다. 명함을 들여다 본 동진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고는 명함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들도 이산가족이긴 하지만 이미 각자 가정이 있는 몸이다. 동진의 입장에선 더 미련이 남을지도 모른다. 고단하게 살아온 듯한 그의 삶에서 지킬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화영에게는 그와 달리 지킬 것이 많다. 남편의 명함을 주는 화영의 행위는 싸늘하게 느껴질 만큼 이성적이다. 이것은 임권택 감독의 연출에 크게 빚진 것이기도 하지만 김지미의 극적으로 과장하지 않는 연기는 오히려 그 때문에 더 극적이었다.

임권택의 또 다른 대표작 <티켓>은 김지미의 연기 인생을 응축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김지미는 지방 소도시에서 다방을 운영하는 민 마담으로 나와 부패한 자신의 인생을 견디며 그녀만큼이나 부패하게 될 젊은 여성들을 데리고 매춘업을 한다. 부패의 숙주이자 동시에 그녀들의 삶을 부패하게 만든 삶에 대해 애증을 갖고 있는 민 마담은 인간적으로 미워할 수 없는, 인생을 잘못 산 여자의 피로와 절박함과 체념과 연민을 동시에 품고 있는 여자다. 가혹하게 다방 종업원들을 생존경쟁으로 내몰아 채근하던 소(小) 권력자로서의 그녀는 동시에 그녀들의 유사 어머니이자 언니와 같은 존재이고 그녀들은 야박한 삶의 전쟁터에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여하튼 꾸리고 산다. 영화의 후반부 한 장면에서 민 마담이 젊은 레지들을 앞에 놓고 다방에서 신세한탄을 하는, 길게 찍혀진 장면에서의 김지미의 연기는 강인한 카리스마 속에 슬쩍 감춰놓은 인간적인 연약함이 드물게 드러나면서 강함과 부드러움이 병렬된 에너지로 분출되는 매우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임권택은 가차 없이 영화 속 인물들을 삶의 구석에 밀어 넣지만 그 인물들은 또한 원초적인 삶의 에너지로 견디어낸다. 이 긴장이 <티켓>에서는 팽팽한 극적 긴장의 심줄로 끝까지 지탱되고 있었다.

스크린에 존재를 새기다

아쉽게도 김지미의 연기 인생 후반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이장호의 필생의 대작 <명자 아끼꼬 쏘냐>에서 김지미는 젊은 시절부터 노역까지 소화하는 의욕을 보이지만 그녀의 본색이 드러나는 것은 영화 속에서 중년 이후의 삶을 연기할 때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좋았다. 한민족의 역사적 외상을 자기 몸에 품고 살아낸 것 같은 영화 속의 명자는 지난한 세월에서도 자기 색깔을 잃지 않고 군림했던 김지미라는 스타배우의 육체를 통해 구현될 때 칼로 찔리는 것 같은 상처의 흔적을 낸다. 종래의 김지미의 스타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던 것은 김기영 감독의 몇 편의 영화들에서도 그랬다. <화녀 82>나 나중에 보게 된 <육체의 약속>과 같은 영화에서 김지미는 괴이한 인간의 마성을 탐구하는 김기영 감독의 일그러진 인간의 초상에 기꺼이 복종하는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이상하게 그 불균형이 시각적으로 진한 잔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김지미가 영화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게 된지 오랜 후에 나는 교육방송의 한국영화특선 프로그램을 3년 여 간 진행하면서 숱한 김지미의 영화를 보게 됐다. 1960년대의 한국영화들을 방영하는 이 프로그램에선 과장을 보태면 한 주 걸러 김지미 주연의 영화를 틀어주는 것 같았다. 김수용 감독 <사격장의 아이들>이나 이성구의 <메밀꽃 필 무렵>과 같은 진지한 드라마에서부터 <댁의 부인은 어떻습니까?>, <팔도며느리> 등의 계도성 오락영화, <내 주먹을 사라>, <홍콩의 마도로스>, <요화 장희빈>, <대원군> 등에 이르기까지 그 시기 한국영화계의 스타들이 다 그렇지만 엄청나게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김지미는 출연하고 있었다. 연기한다기보다 스크린에 존재하는 김지미는 동시대의 다른 여배우들과는 달리 늘 기세가 세고 당당하며 남자들이나 주변 세상에 맞서는 듯한 여성 이미지를 풍긴다. 아름다운데다 기세가 세서 실제로 만나면 왠지 기가 죽을 것 같은 강한 여성의 분위기는 그 이후로도 유례가 없을 것이었다.

늙어, 더 아름답다

이번 회고전에 상영되는 <불나비>는 김지미의 그런 스타 페르소나가 비교적 정돈된 각본을 통해 다양하게 시연되는 점에서 흥미로운 영화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전형적인 요부와 정숙한 현모양처를 상황 별로 오가며 여러 이름을 가진 정체불명의 여주인공으로 나온다. 남성 주인공이 홀린 듯이 그녀를 따라다니며 탐문하는 동안 녹아드는 매혹의 늪, 너무 반들반들해서 닿으면 미끄러질 듯 눈부신 바위를 기어오르는 것 같은 심정으로 김지미를 지켜보는 것이 이 영화의 재미다. 서사의 농도가 치밀해서 빨려드는 쾌감은 없지만 느슨한 서사의 틈을 비집고 나와 메우는 김지미의 존재감은 장르영화에 소용되는 스타의 이미지 파워를 실감하게 해준다.

고전기의 많은 배우들이 그랬듯이 김지미도 숱한 영화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마모시키고 소모해 기진하는 운명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솔직히 말해 전성기 그녀의 출연작들에서 굵직한 대표작을 고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김지미 외에 김지미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는 그녀의 나이가 들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그런데도 엄청난 다작 필모그래피의 수렁 속에서 기진하지 않은 그녀의 존재감, 단지 미모의 카리스마가 뛰어났다는 것을 넘어서는 어떤 강력한 존재감이 김지미를 김지미답게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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