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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신이 바로 ‘쉬르’ 였구나
2009-10-11

<병사의 제전> 복원 상영과 ‘하길종, 새로운 영화로 향한 꿈’ 세미나에 부쳐

1962년 가을. 하길종은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한 권의 시집을 출판한다. 당시 신문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프랑스의 현역 시인 앙드레 브르통과 르네 샤르를 즐겨 읽는다.’는 서울 문리대 하길종(불문과 4년)군이 스물여덟 편의 자작시로 아담하게 장식된 시집 <태를 위한 과거분사>를 세상에 내놓았다.” 굳이 따져보면, 이 시집은 앙드레 브르통에 가까운, 대학시절부터 입버릇처럼 말하던 쉬르(초현실주의)를 구현한 작품이었다.

<화분>

데뷔작 <화분>, 독재문화에 대한 은유

그 후 하길종은 초현실주의의 본고장인 프랑스로 건너갔다가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UCLA에 입학을 한 것은 1965년 가을의 일이었다. 그에게 아메리카의 생활은 변화의 시절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듬해 전채린과 결혼을 하였고, 졸업 논문으로는 <다큐멘터리 영화에서의 시적 경향에 대한 연구>를 썼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젊은 날 하길종의 관심사는 시적인 것이었고, ‘쉬르’를 구현하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UCLA에서 졸업작품으로 만든 <병사의 제전>이다. 당시 MGM이 우수한 영화학과 졸업생들에게 수여했다는 메이어 그랜드상을 받은 이 작품은 하길종의 관심이 무엇이었는가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그의 글에서 종종 인용되는 뉴욕 아방가르드 감독들의 영화처럼 <병사의 제전>은 실험영화의 범주에 가깝다. 장면의 대부분은 ‘죽음’이라는 존재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시 미국 사회가 베트남 전쟁의 시대였음을 감안한다면 <병사의 제전>에 등장하는 히피적인 배경들이 이채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나체는 저항인 동시에 순수를 대변하는 것이었고, 이에 대한 예찬은 하길종의 시와 글들 속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졸업 후 하길종에게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작업을 할 것인지 아니면 미국에 정착할 것인가. 그는 고민 끝에 가족사적인 이유와 몇몇 사정으로 귀국을 선택한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와 영화들은 전위영화의 분위기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전위라는 뜻을 지닌 ‘아방가르드’가 원래 군대용어인 ‘선봉부대 혹은 돌격부대’에서 유래했음을 감안하자면, 한국은 군사문화가 이미 아방가르드를 압도하는 사회였다. 이효석의 원작을 각색한 장편 데뷔작 <화분>은 이러한 맥락의 의미가 크다. 푸른집으로 대변되는 거대한 저택이나 현마와 단주의 동성애적인 관계는 일종의 성정치학적인 설정을 떠올리게 한다. 권력을 둘러싼 관계를 건드리는 설정은 독재문화의 단면에 대한 은유로 가득 차 있다.

한편 <화분>은 파졸리니를 비롯한 유럽의 당대 감독들과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파졸리니의 많은 작품들이 시대극이나 각색을 통해 일종의 알레고리적인 영화들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는데(그의 <데카메론>이나 <마태복음>과 같은 영화들을 생각해 보라), 이후 <수절> <한네의 승천>과 같은 시대극적인 영화들은 유사한 설정이 엿보인다. 이것은 단순한 모방의 욕망의 차원이 아니었다. 예술가로서 하길종의 가장 큰 관심사는 동시대 감독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이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한국영화의 위상에 대한 고민과 연결이 된다.

‘하길종, 새로운 영화로 향한 꿈’ 세미나

“진실로 영화는 쇼인가” 고민도

“한국영화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완전한 혁명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영화를 예술의 차원에서 다시 식목하는 작업이다. 즉 영화예술에 대한 근본적 해석의 변혁과 체계적 영화이론의 확립 그리고 체계의 개혁 없이는 한국영화의 세계진출이란 아예 상상조차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국영화의 세계영화에의 접근’이라는 하길종의 글은 그의 영화관이 무엇이며, 오늘날까지 하길종의 신화가 진행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영화를 예술의 차원에서 수용한다는 것’은 동시대 유럽의 많은 작가들이 추구한 방향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던 한국 영화의 결핍이었고, 하길종의 갈증이었다.

그의 고민은 영화예술에 대한 갈증과 동시대 영화의 위상 속에 놓았을 때 정당하게 이해될 수 있다. “진실로 영화는 쇼인가. 영화작가는 시장에서 덤핑으로 매매되는 정물화만 그려야한단 말인가. 쉬르(초현실) 계통의 회화가 현대예술계의 흐름이고 또 그러한 흐름을 익힌 작가가, 작업의 현주소가 바뀌었다고 해서 갑자기 정물화를 그려야만 하는가. 쉬르의 작업이 허용되지도 않고 인정되지도 않는 그런 풍토에서 쉬르 작가는 정물화를 그리지 않고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인내할 수 있을 것인가.”(‘백마타고 온 또또’ 중에서)

이러한 고민에도 오늘날 하길종의 영화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의 지점은 과연 그의 영화가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 올려졌는가 하는 점이며, 그가 추구한 ‘쉬르’를 성취했는가 하는 물음이다. <바보들의 행진>을 비롯한 하길종의 청춘영화들은 당대 젊은이를 직접적으로 호명하면서(그는 <바보들의 행진>에서 대학생들을 직접 캐스팅하는 방식을 취했다) 현실과 영화의 접점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 영화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의 대부분은 시대적 상황과 관련한 것이지 작품 자체에 대한 엄밀한 분석이나 새로운 예술적 감성을 열어놓았는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하길종을 ‘미완의 예술가’ 반열에 올려놓는다.

이 지점에서 하길종이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를 음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백마 타고 온 또또>에 수록된 1978년 4월의 에세이에서 “나에게 왜 좋은 영화를 못 만드냐고 묻지는 말아주십시오, 나는 내가 아니 우리 모두가 이렇게 지탱해 있는 것만으로 감사할 뿐이니까”라는 문장을 만나게 된다. 그에게 현실이란 예술을 통한 저항이나 도발보다 더 강력하게 견뎌야 하는 무엇이었다.

그는 7편의 장편 영화와 몇 권의 글을 남긴 채 1979년 2월 28일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타계한다. 그렇지만 하길종의 죽음과 함께 그가 추구한 ‘쉬르’는 폐기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추구되기 위해, 그를 미완의 감독이자 불운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한국 영화 속에 기입하고자 했던 ‘쉬르’의 측면은 어느새 유신이라는 상황 속에서 내면화된 ‘쉬르’로 전환되어, 불운한 천재 하길종이라는 이름으로 재가동 된다. 하길종이 그토록 쫓던 ‘쉬르’가 바로 하길종 자신이 되었다는 역설의 메커니즘이야말로 오늘날 하길종의 신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그의 장편 전작을 만나세요

이제는 그 고리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한국영상자료원의 도움 아래 하길종의 글을 모은 전집을 세 권의 규모로 발간하고, 16미리로 만들어진 <병사의 제전>을 35미리 필름으로 새롭게 복원하고, 그의 장편 전작을 영화제 기간 동안 상영한다. 그것은 시인이자 지식인이자 감독이었던 한 인간의 유산을 전체의 그림 아래에서 새롭게 파악하기 위한 출발인 것이다. 그가 남긴, 그와 함께 하는 ‘쉬르’를 새롭게 추적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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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상용/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백종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