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영화가 약진하고 있다! 제10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영화제에는 총 10여 편의 필리핀영화가 다양한 섹션을 통해 소개된다. 최근 필리핀영화는 무궁한 미답의 영역을 품고 있는 디지털영화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영화형식에 대한 실험정신이 눈에 띠는 필리핀 독립영화의 생생한 좌표를 짚어보는 것을 영화제를 즐기는 여러 방법 중 하나로 추천한다. 필리핀 독립영화는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필리핀 역사와 종교, 사회라는 세 꼭짓점에 대한 거시적 시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를 공유하고 있다. 상영시간에 대한 강박을 무장해제 시킨 라브 디아즈 감독의 8시간짜리 대작 <멜랑콜리아>는 그런 성격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삶의 총체적 국면을 포착하는 대작 <멜랑콜리아>
라브 디아즈 감독은 이번에 무려 세 편의 영화를 선보인다. 전주국제영화제의 핵심 프로그램인 ‘디지털 삼인삼색 2009’에 홍상수, 일본의 가와세 나오미 감독과 함께 참여하여 <나비들에겐 기억이 없다>라는 작품을 들고 왔다. 2008년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상을 수상한 <멜랑콜리아>는 과거의 기억과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한 고통을 감내하는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실존적 현실을 롱 테이크의 유장한 카메라워크로 담아낸 영화다. 두 시간 남짓한 시간으로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삶의 총체적 국면을 포착하려는 진정성이 돋보인다.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사유하고 싶은 씨네필이라면 긴 상영시간을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 도전해 볼 만한 영화다. <속죄>라는 16분짜리 실험적 단편영화까지 챙겨본다면 라브 디아즈의 영화세계가 어떤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쉐라드 안토니 산체스 감독의 <하수구>는 다른 12편의 영화들과 함께 국제경쟁 부문에 오른 작품이다. 다바오의 빈민가에 살고 있는 두 사춘기 소년이 주인공으로, 소년들의 삶을 충격적일 만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드랙퀸 소년의 첫사랑에 대한 영화 <소년>은 성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아우라에우스 솔리토 감독의 작품으로 ‘시네마스케이프’ 부문에 상영되며, 20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해 온 카븐 드 라 크루즈 감독의 <짙은 어둠 속의 마닐라>는 ‘영화보다 낯선’ 부문에 선보인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살인자가 된 한 남성의 과거를 추적하는 내용으로 강렬한 영상미가 인상적이다. 브릴란테 멘도자 감독의 <마사지사>는 남자 전문 마사지사를 통해 삶과 죽음의 문제를 탐구하는 영화로, 지난 9년간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을 재상영하는 ‘감독열전’ 부문에 선정되었다.
무성영화부터 뮤지컬까지, 라야 마틴의 다양한 시도
세계적인 감독으로 부상한 라야 마틴 특별전에는 <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필름>, <상영중>, <다음 상영작>, <연인들> 등 네 편이 준비되어 있다. 프랑스에서 개봉되어 2008년 <카이에 뒤 시네마> 베스트영화에 뽑힌 <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필름>은 무성영화의 형식을 차용한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한 남자가 아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남자의 이야기를 흑백의 무성영화로 처리하였다. 자막을 통해 전달되는 짧은 언어는 역설적으로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상영시간이 4시간 반에 이르는 <상영작>은 평범한 필리핀 소녀의 일상을 집안 깊숙이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 밀착취재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극영화다. <다음 상영작> 역시 영화형식에 대한 감독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전반부는 영화를 찍는 감독과 배우, 스태프의 모습을 찍은 부분을 보여주고 후반부는 그렇게 만든 완성된 영화를 보여주어 마치 한 편의 다큐와 한 편의 극영화를 함께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연인들>은 무성 뮤지컬 형식의 러브 스토리였던 최초의 필리핀영화를 소재로 삼은 영화다. 라야 마틴은 영화제 기간 중 방한하여 관객과의 시네토크 행사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