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소비츠 하면, 먼저 악동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매번 엉뚱한 기행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악동. 첫 장편 <증오>로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을 때 그는 천재로 추어올려졌다. 방리유 청춘들의 삶에, 사실적으로 참신하게 접근해간 <증오>에는, 전복의 에너지가 있었다. 그러나 카소비츠는 ‘천재’가 되길 거부했고, 자신에 대한 기대를 조롱하듯, <암살자(들)>이란 애매한 영화로 칸에 돌아왔다. 킬러들의 일상 속에서 세대간의 단절과 미디어의 폭력성을 이야기하려 했다지만, 자극적인 화법으로도 지루함과 거부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런 작품에 맹공을 퍼붓는 기자들에 맞서, 그는 영화제 기자회견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크림슨 리버>. 우생학과 나치즘이라는 심각한 이야기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스타일로 포장한 이 영화는, 카소비츠의 지향점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어떤 것도 제대로 이뤄내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카소비츠를 서면으로 만나봤다. 악동다운 답변, 독설 가득한 답장을 기대했건만, 그는 몇몇 질문에 대해선 답변을 피했다. 기억 속의 악동은, 어느새 평범한 어른이 돼버린 걸까.
▦장 크리스토퍼 그랑제의 소설이 원작이다. 원작의 어떤 점에 끌려서 영화화하게 됐나.
일단 그랑제의 소설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소설에 개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 난 개를 굉장히 좋아한다. 물론 이게 다는 아니다. 나는 장 르노와 함께 스펙터클영화를 찍어보고 싶었다. 감독으로서 모든 스타일의 영화를 해보고 싶은 건 당연한 일 아닌가. 특히 <양들의 침묵> 같은 미국식 액션영화를 하고 싶었다. 그랑제의 소설을 읽으면서 바라던 스타일의 영화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일종의 영감을 받았다. 우생학이나 나치즘 같은 소재에도 개인적으로 흥미를 느꼈다. 이런 요소가 없었으면 작품이 그렇게 흥미롭지 않았을 거다. 나는 그랑제처럼 탁월한 이야기꾼은 못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자작 시나리오가 아닌 영화(처음이다)를 만들기로 한 거다.
▦각색 작업을 직접 했다.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원작은 500 페이지 분량이다. 게다가 내용이 워낙 복잡하다보니,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서 관객의 이해를 위해 이야기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두 시간짜리 영화에 함축해 표현한다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원작자 그랑제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 과정에서 많은 부분을 생략했다. 마지막 부분도 원작과 전혀 다르게 갔다. 이런 작업은 원작자 그랑제, 또 훌륭한 배우들이 공동작업을 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여러 등장인물을 한 인물로 압축하기도 했고, 추리물과 미스터리 장르의 요소를 잘 조화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또 소설을 영상화하는 작업인 만큼 시각적인 부분을 부각시켰다.
▦처음으로 시도한 블록버스터였다. 전과 달리 규모가 큰 작품을 핸들링하는 일, 또 많은 관객을 끌어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진 않았나.
나는 매번 새로운 시도를 한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니까. 이제까지는 프랑스영화계의 풍토에 충실하게, 예술성 있는 영화를 만들려 했다. 시나리오를 직접 쓴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러나 <크림슨 리버>는 할리우드적 성격이 짙은 영화다. 나는 관객을 사로잡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프랑스에서 프랑스영화보다 할리우드영화가 더 많은 인기를 누리는 것은, 프랑스영화가 그만큼 재밌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주말에 친구 또는 연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영화다. 내가 관객 입장에서, 관객으로서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든 것뿐이다. 나 자신을 놀라게 하는 영화,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는 영화가 좋다.
▦뱅상 카셀과의 인연이 각별한 것 같다. 함께 작업하기를 즐기는 이유는.
그와는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다. 어느 날 이 영화 얘기를 하며 장 르노와 호흡을 맞출, 건장한 흑인 배우를 찾고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대뜸 자기가 하면 안 되겠느냐는 거다.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증오> 이후 세월이 흘러, 뱅상은 나이도 들었고 몸무게도 늘었고, 그동안 무게감 있는 훌륭한 배우로 성장했다. 장 르노 같은 경우는 명성으로만 알고 있던 배우였다. 뒷모습만으로도 강한 카리스마를 뿜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형사 니망 역에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장 르노와 뱅상 카셀은 완벽한 콤비다. 체격과 이미지도 좀 비슷하고. 부자지간 같다고 할까. 아마 관객은 다른 영화에서라도 장 르노와 뱅상 카셀의 콤비 연기를 보고 싶었을 거다. 두 사람이 이번에 맡은 배역은 기본적인 체력과 액션 능력이 있어야 했는데, 그런 면에서도 적절한 캐스팅이었다고 생각한다.
▦첫 장면의 사체 클로즈업 장면이 인상적이다. 유기된 사체들을 정면으로 오랫동안 비추곤 하는데, 사실적이고도 충격적이다. 특수분장 부문에서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면.너무 폭력적이라는 비판이 있기는 하지만, 촬영 자체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런 비판에는 덤덤하다. 오프닝 장면은 피조물을 불과 몇 밀리미터 앞에 두고 촬영했는데, 그렇게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도 리얼한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건, 특수분장물치고도 꽤 정교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일 거다. 촬영 당시에도 그 시체가 진짜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산악 지대에서의 촬영 비중이 높은 편이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았을 텐데.
그 어려움이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3일 예정이었는데, 보름이 걸려서야 겨우 촬영을 마쳤으니까. 매순간이 위험천만했고 예측 불가능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하늘을 보면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혹시나 싶어, 빙하로 올라가 보면 9시쯤 날씨가 갠다. 그러다 10시쯤엔 다시 눈보라가 치기 시작한다. 이럴 때 5분 안에 철수하지 않으면, 케이블카도 멈추고 헬리콥터도 운항할 수 없다. 해발 3200m에서 말이다. 눈보라가 칠 때는, 똑바로 서 있을 수조차 없다. 호흡은 곤란하고, 얼음 알갱이는 얼굴을 때려대고…. 진짜 눈물 많이 쏟았다. 겨울철 산에서는 간단한 작업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스탭 수를 최대한 줄여 10명으로 작업하는 대신, 산악 가이드를 8명 두기도 했다. 촬영 크레인을 빙하 있는 곳까지 옮겨서 작업을 하는데…. 눈보라가 치는데도 그 작업을 하느라고…. 상상이 가지 않나. 빙하는 200m의 눈이 땅 위에 쌓여 형성된 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 땅은 200m 아래 있다. 게다가 빙하는 움직인다. 한 예로, 장 르노와 나디아 파레스가 줄을 타고 빙하 50m 아래로 내려가면, 주위에 테크니션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산악 가이드들이 “그쪽은 안 돼요, 낭떠러지가 있어요”라고 소리쳐대고. 이 상황에서 돌풍이 불어오면 온도가 갑자기 떨어진다. 그럼 카메라도, 필름도, 모든 게 얼어붙기 시작한다. 돌발상황에 또다른 돌발상황이 꼬리를 무는 것이다. 많이 힘들었지만,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희열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장 르노와 나디아 파레가 빙벽을 오르다 동굴 속에서 시체를 발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찍었나.
그건 실제 빙하에서 찍었다. 원작에는 니망 형사가 빙하 단층에 매달린 상태로, 눈앞 5cm 빙하 절벽 안에서 햇빛에 반사된 시체를 발견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 장면을 스튜디오 안에서 찍으려면, 20m/50m 규모의 플라스틱 빙하 단층을 만들어야 된다는 얘긴데…. 불가능하다. 엄청나게 비싸고. 인공 빙하를 연출한다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실제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실물보다 좋은 소재는 없으니까.
▦<증오> 이후에 내놓은 두 작품 <암살자>와 <크림슨 리버>는 전작만큼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증오> 이후에 영화를 대하고 생각하고 만드는 방식이 스스로 달라졌다고 느끼는가.
전작과는 전혀 상관없이 관객이 즐길 수 있는, 오락성이 강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DVD로 소장하고 싶어지는 그런 영화들 말이다.
▦언젠가 “내 의도는 부르주아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관객이 내 영화를 보고 충격받지 못하면 모든 게 헛수고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영화 역시 그런 의도에 부합했다고 생각하나.
서점에 가서 돈을 주고 책을 사서 읽는 것처럼, 관객은 극장에 가서 돈을 내고 영화를 본다. <크림슨 리버>는 그런 관객들을 위한 영화다. 관객이 내 영화를 두고, 화면은 끝내주는데 깊이가 없고 연출이 엉망이다, 라고 느끼지 않았다면 좋겠다. 나는 그런 부류의 영화가 싫다. 반면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는, 같은 장르의 영화로서 본보기가 된다고 하겠다. 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런 맥락에서 스필버그 영화도 좋아한다. 스필버그 영화를 보고 있으면, 관객을 우습게 생각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으니까.
▦당신은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다. 배우로서 영화를 접하는 것과 감독으로서 영화를 접하는 것의 서로 다른 매력을 꼽는다면.
본업이 연기가 아니기 때문에 다시 연기를 한다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독에 한해서 일을 하고 싶다. 장 자크 주네, 마르크 카로, 에미르 쿠스투리차, 코스타 가브라스, 스티븐 스필버그 등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이 나를 배우로 섭외해 준다면, 언제든지 어떤 역할이든지 가리지 않고 출연할 준비가 돼 있다. 나는 거짓말을 못한다. 아닌데 좋은 척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아주 솔직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감독들과 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거장의 작품에서 실수하거나 어설프게 보이는 건 민폐다. 스스로의 연기에 대해 완벽을 기하는, 일종의 도전이자 모험인 셈이다.
▦영어 대사 영화 <데자뷔>를 먼저 찍을 예정이었던 것으로 안다. <크림슨 리버>를 먼저 시작하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데자뷔>는 현재 얼마나 진행이 됐는가.
이와 관련해 많은 소문이 떠돌고 있는데….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릴 것 같다. 시나리오 작업이 매우 느리게 진행되고 있으니까. 프랑스에서는 아무래도 일정 예산 이상의 블록버스터영화를 만드는 것이 어려우니까, 해외로 널리 수출할 수 있도록, 영어 대사로 영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은영 기자 cinepar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