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의 13번째 영화 <시간>이 8월7일 서울 스폰지하우스(구 씨네코아)에서 기자시사를 가졌다. 이 영화는 애초 일반개봉이 불투명했던 작품. 김기덕 감독은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시간>은 국내에서 개봉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후 관객들 사이에서 <시간>의 개봉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영화사 스폰지가 국내 판권을 구입하면서 개봉이 확정됐다.
<시간>은 권태기에 빠진 한 커플을 그린 이야기다. 세희(박지연)는 사귄지 2년이 지난 남자친구 지우(하정우)가 몹시 불안하다. 잠시라도 다른 여자를 쳐다보면 그 여자에게 관심이 있냐고 따져 묻는다. 커피숍 여직원도, 주차 문제로 우연히 마주친 여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얼굴이 지겹고, 남자친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새롭게, 다르게 태어나겠다는 다짐으로 그녀는 성형외과를 찾는다. 수술 후 새 얼굴이 자리잡기까지 6개월의 시간이 걸린다는 말을 듣고 세희는 그 시간동안 자취를 감춘다. 6개월 후. 세희는 새로운 모습의 새희(성현아)가 되어 돌아오지만 지우는 과거의 세희를 바랄 뿐이다.
<시간>에서 성형수술로 대체된 육체는 원본의 육체를 대신하지 못한다. 권태기에 빠진 세희의 얼굴과 그런 세희를 대신할 수 없는 새희의 얼굴. 육체성에 대한 해체는 김기덕 감독의 전작인 <빈 집>과 <활>을 연상케하면서도 보다 노골적이다. 표현하는 방식도 보다 날것에 가깝다. 성형수술을 하는 장면은 여과 없이 제시되고, 인물들의 감정은 항상 과하게 표출된다. 대사도 전작들에 비해 많이 늘었다. 동일한 모티브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빈 집>과 <활>이 육체성을 넘어선 화해를 제시한 반면 <시간>은 남녀의 이야기를 파국의 시간 속에 봉인한다(영화의 처음과 끝은 같은 장면이다). 김기덕 감독의 초기작들이 연상되는 지점이다.
영화의 상영이 끝난 뒤 이어진 간담회에는 김기덕 감독과 두 여자배우 성현아, 박지연이 참석했다. 하정우는 영화 촬영차 미국에 있는 관계로 참석하지 못했다. 동일 인물을 연기한 성현아와 박지연은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 출연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김기덕 감독과의 작업이 어땠냐는 질문에 성현아는 “매우 빠르게 진행됐지만, 감독님이 배우가 감정을 이입할 수 있도록 고려해주셔서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연기자는 감독의 스타일을 따르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답했다. “12시에 시작해 12시에 끝나는 영화”라는 말로 말문을 연 김기덕 감독은 모든 질문에 시종일관 단답형으로 일관했다. 우여곡절 끝에 개봉을 하게 된 소감에 대해 그는 “대한민국도 이 영화를 수출하는 20여국 가운데 한 나라일 뿐”이라고 답했고,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뭐냐는 질문에는 “그건 보는 분이 찾아야죠”라는 말로 응했다. 또한 “스크린쿼터 축소 이후 한국영화가 위기에 빠질 거라 우려했지만, 현재 <괴물>같은 영화의 흥행으로 선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엔 “오늘 나올 질문 중 가장 무서운 질문이 뭘지 어제부터 생각했다. 그게 바로 이 질문이다. 현재 한국관객의 수준과 한국영화의 수준이 최고로 잘 맞은 상태라고 생각한다”며 다소 애매모호한 답변을 남겼다.
하지만 이날 사회를 맡은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가 자리를 정리하려 하자 김기덕 감독은 한 마디만 하겠다면서 마이크를 쥐었다. “나의 태도를 무례하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빈집> 때부터 내 마음에 변화가 있었다. 이건 단지 내 영화들이 국내에서 흥행을 하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 영화의 메시지들이 계속 오해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김기덕 감독은 이어 자신의 단답형 답변에 대한 양해를 구하며 “이 자리가 김기덕의 제삿날인것 같다. 나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영화계에서 나의 느낌은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다. 앞으로 준비중인 작품도 없다. 아무 생각이 없다. <시간>이 20만명만 넘었으면 좋겠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미국에서 30만명이 봤고, <빈집>을 프랑스에서 20만명이 봤다. <시간>의 결과가 이후 내 생각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은 올해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상영된 바 있다. 국내 개봉은 8월24일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