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권과 언더를 막론하고 모든 언론이 침이 마르게 칭찬한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빌려봤다. 영화만들기의 실제에 대해선 문외한이기 때문에 주요칭찬 품목 중 하나인 “악전고투 만듦새”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정통 액션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점이 새로운 시도인지도 잘 모르겠고, 이것이 왜 그리도 놀라운 작품인지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떤 한 장면 때문에 영화는 내 머리에 꽤 깊이 자기자리를 만들었다. 형이 눈이 쑤셔진 채 비틀대며 피를 쏟는 장면이었다. 무섭고 섬뜩하고 생경했던 그 장면이, 눈이 후벼파졌다는 엽기성 때문인지 신선한 미장센 때문인지 아님 또 무엇 때문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장면은 기이한 사진으로 박힌 채 맘속에 남아 있다.
그 영화를 안 봤다면 절대로 <다찌마와 Lee>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비디오숍에서 절대 안 들르는 코너가 있으니 바로 코믹액션이다. 그 장르를 폄하해서가 아니라 웃기지가 않아서다. 그렇다고 볼 때는 실컷 웃고나서 “그런 웃음은 저질이야”하고 젠 체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처음부터 웃기지가 않을 뿐이다. 어떤 대목에서 웃는 건지를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찌마와 Lee>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만든 팀이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보았다. 하지만 내가 웃을 수 있던 대목은 “이 지긋지긋한 관절염아”와 도끼빗, 그리고 마구 등급이 변하는 키스신, 딱 세 대목이었다. 호쾌하게 빵을 뜯어먹는 장면은 웃을까 말까 하다가 못 웃었다. 웃은 세 대목도 그냥 픽 웃었다는 거고, 왜 웃긴지 알 수 있었다는 정도지, 데굴데굴 굴렀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 우리 신랑은 유쾌하게 마구 웃으며 재밌게 봤다. 웃음소리도 차츰 “음하하하…”를 닮아갔다. 나중엔 두팔을 높이 들고 제스처까지 흉내냈다. 다 보고나서는 “역시 류승완!”하면서 환호했다(이 글을 읽은 남편은 류 감독이 오은하를 바보 멍청이로 보고 불쾌해할까봐 몹시 걱정하고 있다). 신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액션, 특히 한국과 중국(홍콩) 등 동양액션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인데(물론 이론적으로만) 예를 들어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보고는 그 액션이 왜 “액션학”적으로 문제가 있는지를 주절주절 설명하고, 명절이면 명절마다 TV에서 방영하는 액션영화를 절대 빠뜨리지 않고 보는 자다. 성룡이 만든 <쾌찬차>의 경우 13번쯤 봤다는 사람이다. 내가 이번 명절에 비아냥을 섞어 “왜 <쾌찬차> 안 봐?”했더니 화들짝 놀라며 “지금 해?”했을 정도다.
나는 할 수 없이, <다찌마와 Lee>의 무엇이 그리도 웃긴지를 남편에게 물어봤다. 뭐가 웃겨? 그냥 넘 웃겨. 어디가 웃겨? 첨부터 끝까지 다 웃겨. 내가 정색을 하고 취조하듯 거듭 묻자, 내가 평소 액션류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것을 가지고 “인생 헛살았다”고 주장하던 이 사람은 신이 난 듯, 도올 못잖은 열정과 제스처로 강의를 시작했다. 이 작품은 일단 액션영화 계보에서 분류하자면 홍콩액션이 아니라 한국의 60, 70년대 액션물을 사사했으며, 박노식, 황해, 허장강으로 이어지는 신파액션(셋의 순서를 달리하면 안 되며, 여기에 절대 신성일을 포함시켜서도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을 패러디했으며, 국내 팬들을 대대적으로 확보한 계기가 됐던 <취권> 이전의 성룡작품도 섞여 있다고 설파했다. 그리고 음하하하… 웃음과 갑자기 나오는 절(소림사라고 확신되는) 배경, 생경하게 터지는 진지한 대사들의 의미와 위치를 조목조목 내세웠다.
그러나 뜨거운 사자후를 듣고난 기분은 매우 썰렁했다. 응, 그래서 웃긴 거구나. 웃긴 게 왜 웃긴지 설명을 듣는 것만큼 웃기고 또 전혀 안 웃긴 일이 있을까. 왜 웃겼는지 장면장면마다 강의내용을 떠올리며 복기해보는 거야말로 최고로 웃긴 일인 것 같아서 나는 다시 보는 건 포기했다. 웃음의 경우,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다 학습한 다음에 그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긴 어디 웃음만 그럴까. 모든 감동이 다 마찬가지다. 고딩 때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보고 펑펑 운 나는 이 감동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주고 싶다는 선각자 같은 욕심에 친한 친구들을 불러모아 다시 틀었다. 그런데 결과는? 두 번째 보는 나는 오히려 코까지 풀어대며 다시 펑펑 울고, “야, 이렇게 끝이구나” 하던 친구들은 나 때문에 머쓱해져서 한마디씩 했다. “은하는 너무 순진해” “아냐, 우리도 은하처럼 순수한 맘을 가져야 돼” “그래, 넌 왜 그렇게 못됐니?” “아냐, 나도 좀 슬퍼” “근데 은하야, 어디 땜에 운 거야?” 친구들의 대화는 날 창피하고 비참하게 했고 그뒤로도 그런 비슷한 실패(?)를 종종 겪으면서, 나는 결국 깨달음에 이르렀던 것 같다.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때는 소통을 포기해야 한다. 원래 소통이란, 예전에 내가 믿었던 것과 달리 보편적인 것이 아니며 설득과 학습에 의한 것은 더욱 아니다. 소통은, 이미 준비된 사람들끼리 그냥 되는 게 소통이다. 소통할 수 있는 이들과 대목은 그저 다 정해져 있다. 내가 <다찌마와 Lee>를 보고도 어디서 웃어야 될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은하/ 대중문화평론가shimba@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