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유형이 있다. 매사에 관심있는 사람과 무관심한 사람. 천재 모차르트와 범인 살리에리와의 비극적 관계를 숙명적이고 장엄하게 그린 <아마데우스>를 다시 보면서 이 작품이 천재와 범인의 채울 수 없는 간극을 그린 인간 드라마가 아니라 관심과 무관심을 다룬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퍼뜩. 극중에서 모차르트가 살리에리를 대면하는 자리에서 그의 태도를 보면 궁정음악가의 계급과 지위에 대한 의례적인 칭송이나 겸양일 뿐, 살리에리의 음악적 재능이나 비전에 대해선 도무지 관심 밖이다.
반대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끼적거린 악보를 우연히 집어들고는 그 재능에 놀라워하고 치밀어오르는 시기심으로 악보를 든 손이 떨려오는 것을 견뎌가며 창조주인 신에게 저주를 퍼붓는 장면을 기억해보라. 모차르트는 타인에 대해 지독히도 무관심했고 살리에리는 지나치게 관심이 많았다. 살리에리의 지나친 관심은 재능에 대한 열등감으로, 그 열등감은 시기심으로, 그 시기심은 분노로 변해 평생을 모차르트의 그늘에서 기생하듯 살아야 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된다.
결국,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비극성은 천재와 범인이 한데 묶일 수 없는 범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관심과 무관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예를 들어 살리에리가 모차르트가 끼적거려 둔 악보를 보고 “아니, 이럴 수가? … 이 자식은 천재가 아닌가? … 음…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은 뭘로 먹지?” 하고 시큰둥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살리에리의 삶이 그렇게 비루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다. 여기에서 나는 타인의 재능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지독한 자기 혐오와 타인 부정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다는 것에 섬뜩해지는 것이다.
재능이 없으면 쿨해지기라도 해야 하는데, 살리에리에겐 그런 요량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종종 야심가의 모습을 띠곤 하는데 야심이란 ‘재능은 없고 욕심은 많은 어떤 것’의 또다른 표현이 아닐까 한다. 내가 <아마데우스>를 놓고 관심과 무관심에 대한 이야기를 너저분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두 가지 유형의 인간형들이 존속해 내려오며 비극적 드라마를 만들어오기 때문이기도 하며, 오늘날 이 땅 이 구석에도 살리에리 같은 인간형들이 도처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 두 가지 유형이 한 사람의 내면에서조차 들끓을 때가 있는데, 어느 순간 지나치게 관심적으로 돼버리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 내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면 왜 그런지 그 누군가는 자꾸 나에게서 멀어져가고, 누군가에게 무관심하면 그 누군가는 나에게 가까워져 있는데, 이런 게 다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기 때문에 곤혹스럽고 혼란스러운 것이 아닐까 한다.
다소 엉뚱한 질문 같기도 하지만 타인에 대해, 타인의 재능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 영화를 더 잘 만들까, 아니면 무관심한 사람이 영화를 더 잘 만들까? 관심있는 사람은grimkjw@yahoo.co.kr로 좋은 말씀 남겨주시고 무관심한 사람은 안 보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