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취재를 마치고 도쿄로 돌아가는 길에 <키네마순보>의 전 편집장 겸 현 사업담당 책임자인 가케오씨가 <씨네21> 사무실에 들렀다. 그는 일본, 중국, 이란 등을 거쳐온 아시아영화열이 앞으로 몇년 동안 한국 위에 머물 거라고 관측하는 영화평론가다. 그는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할 얘기를 하면서 대중을 휘어잡는 영화가 불행하게도 일본에는 없다고 아쉬워해왔다. 그런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왜 한국에는 허우샤오시엔이나 에드워드 양이 없는 것일까. 사회 자체가 정체돼버려서 영화소재도 빈곤해진 유럽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은 아직 천착할 역사적 정치적 사안들이 풍부한데. 통일이 된다면 한국영화의 폭발이 다시 일어나게 될까. 전주에서 <필름컬처> 임재철 주간과 마주 앉아 영화를 논하던 <카이에 뒤 시네마>의 샤를 테송 편집장도 비슷한 질문을 던져왔다. 한국에는 작가영화의 전통이 없는 것 같다, 왜?
이들에게 모종의 우월감을 품고 한국영화를 재단한다는 혐의는 씌우고 싶지 않다. 질문은 매우 조심스러웠고, 의중에는 <박하사탕>과 <플란다스의 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나 임권택, 홍상수, 그리고 <거짓말>에 애정 또는 경의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아니, 그것보다도 그들의 질문은 또 우리들의 입 속에서도 발견되는 것이었다.
80년대의 민주화 열정이 급속히 해체되어버린 사회전반의 분위기가 영화로 하여금 정치 사회적 의제를 집어드는 데 멈칫거리게 한 점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황금광시대의 모험가마냥 충무로에 뛰어든 대형자본은 ‘이것이 대중정서’라고 금그어놓은 안전지대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막강한 시장을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한편으로는 비대중적 내용을, 한편으로는 비대중적 형식을 기피하는 현상이 당연히 빚어진다. 임재철씨는 대담에서 영화광들의 “취미적 공동체”가 없었다는 점을 작가영화 부재의 이유로 든다. 그래서 상업화의 폭풍 속에서도 자신들의 영화를 지켜나갈 수밖에 없는 소수집단과 개인이 ‘작가’가 되는 과정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허우샤오시엔과 시장을 함께 발전시키는 방도가 없는 건 아니다. 한국영화의 전주들이 외면하는 창의적 영화를 영화정책이 지원해주면 된다. 예컨대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 지원이 그런 영화의 지지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책만으로 영화가 만들어지는 건 결코 아니지만, 이런 잣대로 영진위의 <고양이를 부탁해> 사건을 다시 재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