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영화를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한 두편 실패하면 수명이 끝나는 게 영화 감독이다. 그래서 성공한 감독들이라도 `영광'은 잠시고 항상 `언제까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최근 충무로엔 죽다 살아난 감독이 잇따라 나온다. 박찬욱, 곽경택 감독은 전에 만든
두편의 영화가 실패해 잊혀지기 직전에 <공동경비구역 JSA>와 <친구>로 대박을 터뜨리는 기적을 만들었다. 데뷔작 <카라>가
은퇴작이 될 뻔했던 송해성 감독도 <파이란>으로 찬사를 받으며 복권에 성공했다.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1992년 데뷔한 박찬욱(38)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 전까지 8년동안 가방에 시나리오를 대여섯편씩 넣고제작자를 찾아 다녔다. 첫번째 시나리오가 싫다고 하면, `이건 어떠냐'며 두번째 세번째 것을 꺼냈다. 외판원처럼 이것저것 꺼내며 제작자를 만난
게 50여차례, 그리고 영화화가 결정돼 자신의 명함을 새로 찍은 게 10여차례에 이른다. 그러나 그중 실제 영화가 된 건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과 <삼인조>(97년) 두 편 뿐이다. 캐스팅이 안 돼 엎어지고, 비슷한 컨셉의 영화가 나와버려서 무산되고,
회사가 망하고…. “충무로가 다 짜고서 나를 골탕먹이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약올리듯 계속 희망은 갖게 하고 그러나 되지는 않고.” <달은…>이나
<삼인조>를 보면 제작자들이 그를 꺼린 이유를 알 만하다. 장르를 교묘하게 비틀면서 B급 영화적 취향을 드러내는 그의 영화에 매력을
느꼈더라도, 흥행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 영화평론과 방송 영화프로 진행으로 생계비를 벌면서 `외판원' 생활을 포기하지 않은 박
감독은 그야말로 헝그리 정신엔 투철한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99년말 명필름을 찾아갔을 때, 박 감독은 이전처럼 5편의 시나리오를 차례로
내밀었다. 역시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명필름 쪽은 대신 소설 의 영화화를 제안했다.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를 세 번 만들려고 했었던 박 감독은
흔쾌히 승락했다. “메시지가 있는 영화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그는 형식실험을 자제하고 관습적 어법을 충실히 따랐다.
그게 터졌다. 서울관객 250만명이라는 사상최대의 흥행기록을 세운 <공동경비…>의 박 감독이 후배들에게 하는 말. “제작자의 각본을
내가 거절한 경우도 많았다. 유혹이 없었겠는가. 하기 싫은 것, 자신 없는 것은 하지 말고 자기가 재밌어 하는 걸 만들어야 한다. 자기가 재밌으면
관객도 재밌다.”
‘친구’ 곽경택
<친구>의 곽경택(38) 감독은 `대박'의 쾌감을 맛보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을 지옥 문 앞에서 서성거려야 했다.장남으로서 의사인 아버지의 직업을 당연히 따르리라 여겨졌던 곽 감독은, 의대본과 1학년 때 “10년 이상 이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는 막막함”이
싫어 “단순무식하게 세계에서 가장 요란한 뉴욕 맨해튼을 택해”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다. 우연한 인연으로 뉴욕대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하고 처음
만든 영화가 <억수탕>(97년)이었다. 평단은 호의적이었으나 흥행은 참패였다. “개봉 뒤 두달 동안 영화쪽 관계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뉴욕 독립영화의 정서를 가지고 우리 관객이 아닌 뉴욕의 입맛을 겨냥한 영화를 만든 게 실패였던 것 같다.”
초조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고 이번에는 상업영화로 승부하기로 했다. 이후 서너달이 지나 내놓은 <닥터K>의 시나리오는 좋은
평가를 받았고, 연출력까지 의심받은 건 아니어서 캐스팅 이외에 큰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하지만 1년여만에 내놓은 두번째 작품은 비평과 흥행
양쪽 모두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그나마 나를 믿었던 이들마저 돌아섰고, 다음 제작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낙인이 찍혔다.” 한달 정도
쉬고 곧바로 <친구> 시나리오를 쓰고는 제작사를 돌아다니니까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앞뒤 못가리는구나'하는 반응”만 돌아왔다.
이 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아버지의 금전적 지원 덕분이었다고 한다. 투자사의 부도 등 3차례의 위기를 넘기고서 간신히 <친구>를
만들었다. “상업적 고민은 전혀 안했다. 그건 프로듀서의 몫이다. 매일, 오늘 찍는 게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했다. 오늘 잘못하면 이 영화는
망한다고 여기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기본'이 가장 중요하더라는 게 곽 감독의 결론이었다.
‘파이란’호평 송해성
송해성(37) 감독의 두번째 영화 <파이란>이 나온 뒤 `아까운 감독 하나가 묻힐 뻔했다'는 말이 심심찮게 나온다. 멜로와판타지가 두서없이 뒤섞여 무엇 하나 사주기가 힘들었던 데뷔작 <카라>(99년) 때와는 정반대다. “<카라>는 시작부터
내 영화 같지가 않았다. 제작사 쪽에서 망하게 생겼다며 주변 인맥을 총동원해 애원하는 통에 떠밀리다시피 메가폰을 잡았고, 배우들은 촬영하다
말고 텔레비전 드라마 찍으러 갔다. 투자자는 시나리오를 못 고치게 했고 겨울장면을 여름에 찍느라 연기가 마음에 안 들어도 배우 얼굴을 클로스업해야
했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충무로에 뛰어든 지 8년만에 데뷔하는 영화가 그렇게 시작됐으니 송 감독 자신의 심정은 어땠을까. “내
삶, 내 미래가 암담해 보였다. 감독을 마감하더라도 내가 만들려는 영화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보여주고 마감해야 할텐데.” <카라>
개봉을 전후해 아사다 지로의 소설 <러브 레터>에서 40대 남자의 바닥인생을 접했을 때 송 감독은 눈이 번쩍 띄였다. 원래 마틴
스콜세지의 <비열한 거리>처럼 바닥인생을 다루고 싶었던 데다, 그때는 <카라>에 대한 절망감으로 자신이 이미 바닥인생의
심리를 몸소 겪고 있었다. 그가 이 소설을 각색하면서 이강재라는, 사실감 넘치는 삼류 양아치의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던 건 동병상련의 결과이기도
했다. “망한 감독이 느끼는 비애는, 사람들이 믿어주려 하지 않는다는 거다. 민식이형(최민식)도 시나리오 좋다고 해놓고 석 달동안 출연계약서에
도장을 안 찍었다. `날 못 믿어서 그러냐'고 다그치니까 비로소 `하자'고 했다.” 28일 개봉하는 <파이란>은 비평에는 성공했지만,
흥행은 아직 모른다. “흥행에 부담이 있지만 조금은 빚을 갚은 느낌이다. 내가 하고 싶은 영화가 이런 거라는 걸 알릴 기회는 생겼으니까.”
임범, 이성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