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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깡패, 구원의 노래를 듣다, <파이란>의 최민식

최민식(40)의 얼굴엔 세월이 있다. 눈 옆으로 먹물처럼 번져나간 주름은 누군가 건넨 농담에 더 깊은 골을 만들고, 시화호 갯벌을 무표정하게 응시하는 눈동자에는 마흔고개를 넘긴배우의 피로가 묻어나곤 했다. 하지만 잇 사이에 비딱하니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씩’ 하니 웃을라 치면, 어느새 그 세월은 ‘노화’의 의미가 아니라 ‘여유’와 ‘관록’의 동의어였음을 알게 된다. 한때 아줌마들 사이에서 ‘꾸숑’으로 통하던 잘생기고 속눈썹 긴 청년(<야망의 세월>)은 순박한 달동네 총각 ‘춘식’(<서울의 달>)이 되었고, 상소리를 입에 달고사는 조폭 같은 검사(<넘버 3>)에서 시끄러운 가족의 엉뚱한 삼촌(<조용한 가족>)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머릿속에 최민식은 이념을 지키기 위해 불나방처럼 타버리는 북한군(<쉬리>)이거나, 아내의 불륜에 끔찍한 죽음을 계획하는 슬픈 가장(<해피 엔드>)의 모습이다. 그리고 지금 보는 이 얼굴은 그 세월과 그 많은 인생들을 고스란히 새기고 있는 최민식의 얼굴, 혹은 인천의 삼류깡패 강재의 얼굴이다.

“양아치예요. 그렇다고 잘 나가고 쌈 잘하는 양아치도 아니고 나이도 많고 쌈도 못하고 빌붙어 삥이나 뜯고, 술이나 처먹고, 자존심도 없고 무기력하죠. 거의 희망이 안 보이는 놈이에요.” 생에 대한 일말의 고민조차 없던 생짜 날건달이 얼굴 한번 마주친 적 없는 여자의 죽음을 따라가는 과정을 통해 알 수 없는 감정변화에 휘말린다. <파이란>은 그 과정을 조용히, 그리고 세심하게 따르는 영화다. “<쉬리> 같은 경우는 목표와 노선이 정확하잖아요. 하지만 강재는 단선적인 인물이 아니거든요.

어떻게 하면 오버하는 것 같고 어떻게 하면 모자라는 것 같더라고…, 파이란(장백지)이 죽으면서 남긴 편지를 볼 때도 울어야 하나, 절제를 해야 하나 한참 고민했어요. 결국 솔직하게 하자, 울고 싶으면 터트리자 그렇게 했어요. 그러고나니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회한이 밀려오더라구요. 40년 가깝게 살았던 개 같은 인생의 슬픔 같은 게 쏴 하고 올라오는 기분, 파이란은 강재에게 그런 걸 일깨워주는 촉매였죠. 결국 <파이란>은 멜로라기보다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영화인 것 같아요. 신이 해주는 교화말고 인간이 인간에게 받는 ‘구원’말이에요.” “종합검진 받으러 가는 기분입니다. 지금 배우로서 내 상태가 어떤지, 괜한 겉멋이 들어가 있진 않는지, 숙련된 노장의사에게 속까지 내보이기 전이랄까? 다 털어버리고 처음의 마음으로, <구로아리랑> 할 때 옷가방들고 버스타고 전철타고 했던 그 마음으로 할 거예요.”

최민식은 임권택 감독의 차기작 <오원 장승업>에 ‘장승업’ 역으로 부름을 받았다. 친형이 화가인 덕에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환쟁이'들은 주로 ‘꼴통’들이지만 모두 순수하고 다양한 인생역정들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최민식이 생각하는 장승업 역시 시대만 다르지 그런 인물. “장승업이 8살 때인가, 어른에게 ‘천하게 그림 같은 걸 그린다’고 야단을 맞으면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로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타고난 환쟁이죠. 그런 에피소드들을 주워모으다보면 어느덧 하나의 인물에 대한 초상이 그려지겠죠.” 이제 5월이 오면 조선말 화가 장승업이 되겠지만, 아직까진 강재에 ‘쩔어’ 있는 최민식을 보고 있다보니 탐 웨이츠가 부르는 <`Anywhere I Lay My Head`>가 듣고 싶어졌다. 삶의 막다른 골목, ‘머리누일 곳조차 없는’ 절망에 다다른 듯하나 결국 희망적인 브라스협주로 끝을 맺는 이 노래 위로, 생의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경험하는 강재가 겹쳐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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