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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호, 60개피 담배, 그리고 잠들지 마라, <소름>의 장진영
사진 오계옥최수임 2001-04-03

510호의 멍든 여자는 촬영이 끝나갈 무렵 많이 ‘회복’돼 있었다. 사라진 아이와 남편의 구타. 엄마로서 여자로서 지극한 불행을 겪는 여자, <소름>의 선영을 연기하면서 많이 앓았던 장진영은 사내 스튜디오에서 만난 기자에게 “끝나간다니 실감이 안 나요” 하며 씩 웃었다.

깨어 있을 때는 하루 세갑에 달하는 골초로, 잘 동안은 불길한 꿈에서 깨어나곤 하는 불면으로, 촬영장을 떠나서도 늘 영화의 배경인 미금아파트 510호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못하고 마음이 갇혀 있던 그였다.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악몽 같던 한 인물에게서 서서히 빠져나오는 중인 장진영에게선 회복기 환자가 내뿜는 원초적인 생기 같은 게 봄날의 풀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그녀를 감금한 것은 지독한 배역에의 몰입이었다. 가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가 마치 줄타는 광대의 장대라도 되는 양, 담배 한 개비 한 개비에 깡다구를 기대는 선영 역은 밤낮으로 장진영을 상하게 했다. 거친 기운이 묻은 피부가 그 증거. 하지만 어두운 인물 연기가 그녀에게 해롭지만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의 커다란 두눈은 전보다 훨씬 깊은 표정을 얻었고 헝클어진 듯 짧은 머리는 긴머리의 치렁치렁한 겉치레를 잘라버리고 그에게 잘 어울리는 얼굴 하나를 조각해냈기 때문이다. 어느 때보다 멋져보이는 장진영과의 오후. “정말 어디든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촬영이 끝나면 본래의 쾌활한 기분을 되찾으러 여행을 떠날 거라는, 시간이 나도 왠지 우울해 집안에서만 지내곤 했다는 그와 함께 스튜디오를 벗어나 가까운 공원 놀이터로 산책을 다녀왔다.

-악몽을 많이 꿨다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꿈이 있다. 집에 들어가니 남자 세명이 있었다. 막 도망가는데 그들이 쫓아와 내 얼굴과 손을 난도질하는 꿈이었다. 그렇게 리얼한 꿈을 너무나 많이 꿨다.

-<소름>을 찍으며 어려웠던 점은.

=쉬운 장면이 하나도 없었다. 선영은 정신적으로 거의 비정상에 빠진 캐릭터다. 그러면서도 강한. 처음에는 그런 인물에 다가가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차차 그 인물을 알게 됐고, 그러니까 이번엔 가슴이 아프고 답답해졌다. 한번 빠져들고 나니까 걷잡을 수 없어서, 나중에는 그 상태가 너무나 지겨워져버렸다.

-의상학을 전공했는데, 영화 속 의상은.

=선영은 물론 아줌마지만 너무 아줌마처럼 하고 나오면 재미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구제스러움’을 컨셉으로 잡았다. 구제스러우면서 컬러가 매치된 옷들을 입었다.

-아끼는 장면.

=(웃음) 내가 나온 장면은 다 살렸음 좋겠다.

-김명민씨와는 어땠나.

=그 친구 때문에 더 열심히 했다. 윤종찬 감독이 은근히 경쟁을 부추겼다. 그래서인지 서로 얘기도 별로 안 하고 계속 연기연습만 하고 그랬다.

-전작들에 대한 기억.

=<자귀모>는 우연히 얼떨결에 찍은 영화였다. 보러 극장에 못 갈 정도였다. 시사회에도 안 갔다. 숨고 싶었다. 극장서 내리기 직전 친구와 갔는데, 어두운 극장 안에서도 자꾸 어딘가 숨고 싶더라. <반칙왕>은 아쉬운 부분이 많은 영화다. 감독이 생각한 것과 내가 연기한 캐릭터가 많이 달랐다. 하지만 강호 오빠 보면서 배우란 저런 거구나 생각했다. 며칠 밤을 새우고도 불평 한마디 없는 걸 보고 많이 배웠다. <싸이렌>은, 글쎄…. 감독이란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 작업이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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