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화시가 지난 6월11일 별세했다. 향년 75살. 비보에 놀란 마음으로 빈소를 찾았다. 작고하기까지 몇년간 투병했음을 유족을 통해 알았는데, 그간 외부에 알리지 않은 것은 고인의 뜻이었다고 한다. 작품 속 강한 이미지와 달리 고고하면서도 겸손했던 생전의 그처럼 정숙하고 담담한 분위기의 장례식이었다. 오래전 한편의 영화를 함께 작업한 인연으로, 겨우 나 정도가 고인에 대한 추모 글을 써도 괜찮을지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전설의 배우를 직접 뵈었던 후배의 아련한 심정으로 한국영화사에 각인된 고인의 지난 궤적을 돌아보려고 한다.
단국대학교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21살 이경덕은 우연히 신인배우 모집에 응모하면서 김기영 감독을 처음 만난다. 감독은 수많은 후보들 중에서도 특히 짙은 눈썹과 총기 어린 눈매의 그녀를 전격적으로 발탁했다. 거기다 중국 4대 미녀 중 서시(西施)의 일화(서시가 미간을 찌푸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뭇 여인들도 그렇게 하면 아름다워 보이는 줄 알고 따라했다는 얘기)를 들려주며 ‘화시’(花始)라는 예명까지 선사한다. 그렇게 이경덕은 이화시가 되었고, 이후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며 그의 1970년대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강렬한 이미지로 남는다.
개봉 순서에 따르면 이화시의 첫 출연작은 1974년의 <파계>이지만 실제 데뷔작은 <반금련>(1981)이다. 고전 <금병매>를 각색한 이 영화는 74년 제작 당시 대규모 세트를 짓고 신성일, 박정자, 김영애, 염복순으로 이어지는 메이저 캐스팅을 앞세운 대작이었다. 그러니까 김기영 감독은 연기 경험이 전무한 생짜 신인을 야심작의 타이틀롤로 기용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촬영 중단과 제작 지연을 거듭하다 검열 강화로 상영 불가 판정을 받는다. 그의 데뷔작은 7년 후 역설적으로 그가 배우를 은퇴하기 직전에야 공개되었지만 30분 이상이 삭제되고 원본은 소실된 만신창이 상태였다. 커리어를 통틀어 이 일은 그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데뷔작이 훗날의 은퇴작이 되어버린 탓으로 그는 대중의 주목을 받았어야 할 신인 시절 없이 곧장 기성 배우로 넘어가버렸지만, 특유의 존재감은 역할을 가리지 않았다. 첫 주연작인 조총련 소재 반공영화 <혈육애>(1976)를 거쳐 이청준 원작 <이어도>(1977)에서 그는 마침내 자신만의 잠재력을 펼쳐 보인다. 피처럼 붉은 치마 위에 검은 저고리를 입고, 신문으로 가린 얼굴 위로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번뜩이며 등장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이 장면은 당대의 문예영화, 아니 이전의 한국영화라는 한계마저 뚫고 완전히 다른 차원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영화 중반까지는 수상한 존재감으로 주변을 맴돌다, 후반부에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인물이 섬 자체를 체화한 듯 격랑처럼 휘몰아친 연기엔 기개와 배짱이 넘쳤다.
감독의 페르소나를 넘어 무리한 서사마저 캐릭터로 능히 관철시킬 일종의 영화적 무기로서 그의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는 역시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의 백골에서 부활한 신라시대 여인일 것이다. “2000년이 됐나요? 벌써? 엊그제 같았는데?”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이화시는 정말로 수천년 만에 부활한 존재처럼 보인다. 10여분 남짓한 출연이지만, 생의 의지에 더할 사랑의 힘을 설파한 이 강렬한 캐릭터는 여전히 한국영화 사상 가장 불가사의하면서도 매력적인 불멸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배우도 자신의 표상을 감당할 서사와 인물을 매번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이화시와 김기영의 협업은 서로가 아닌 다른 대안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화시의 70년대 출연작은 주로 김기영 영화로 한정된다. <반금련>으로 맺었던 동아수출공사 전속 출연은 김기영 감독이 회장으로 나선 신한문예영화사로 이어진 듯하다. 김기영 연출 외에 그의 출연작은 신한문예가 제작한 몇편의 조연에 머문다. 이광수 원작의 <흙>(1978)에서도 이화시이기에 가능했던 캐릭터 해석은 돋보였지만, 갈수록 배역은 주로 성적 매력으로 남성을 휘두르는 이미지로 고착되는 경향을 보였다. <수녀>(1979)와 <느미>(1979)에선 주역의 순수성에 대비되는 조역에 만족해야 했고, 그는 결국 전속 배우의 한계를 느끼고 조용히 은퇴한다. 중앙정보부에서 그를 뇌쇄적·퇴폐적 이미지로 규정해 출연을 막았다는 풍문만 대신 남았는데, 고인은 생전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적은 없었노라고 에둘러 밝혀야 했다.
짧지만 한국영화사에 새긴 이 7년 만으로 그는 전설이었고, 그렇게 남아도 되었다. 하지만 이화시는 2000년대 후반 들어 연기 활동을 재개한다. 캐나다 이민 생활을 정리하고 수십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크고 작은 배역을 마다하지 않고 배우 인생 2막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 것이다. 내가 VHS로 밤을 새우던 시절 목격한 전설의 이미지를 “선배님”으로 직접 만나게 된 것도 이때다. <간증>(2010)에서 그는 과거 고문 기술자였던 주인공 노인을 선의로 대하지만 결국 불가해한 사건으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는 이 권사 역을 선뜻 맡아주었다. 후시녹음의 과거를 뒤로하고 동시녹음에 적응하고자 대사의 발성부터 꼼꼼히 신경 쓰던 그는 다시 신인이었다.
돌이키려니 울컥하는 기억. 한창 촬영 중이던 2009년 겨울, 전설 운운하며 칭송하던 당신께 뻔뻔하게도 죽는 연기를 청하려니 새삼 뜨악하고 죄스러운 기분의 초짜 연출자가 있었다. 그때 선배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죽는 연기 많이 했고, 좋아해요. 멋지게 죽어줄게.” 그 말씀과 목소리가 어찌나 멋있었던지. 마주한 고인의 영정 앞에서 그만 이 기억이 떠올라 잠시 어쩔 줄 몰랐다. 당신은 수천년 전 신라에서 온 사람인데, 저편에 누워 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빈소에 놓인 고인의 사진 액자들 위로 적힌 성경 문구가 보였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나는 믿는다. 당신은 은막에서 영생할 것이므로, 이미 불멸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