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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아직 시간이 도착하지 않았을 때, 김예솔비 평론가의 <고독의 오후>
김예솔비 2026-06-17

<고독의 오후>

누군가의 응답으로 인해 글의 지리가 연장된다고 느낄 때가 있다. 드물지만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난다. 홍상수의 <그녀가 돌아온 날>을 다룬 지난 글에서 나는 쪼그려 앉은 정수의 몸을 가린 원피스의 형상을 두고 ‘몸을 감싼 껍질’ 같다고 적었고, 이에 대해 김소희 평론가로부터 흥미로운 응답을 받았다. 김소희 평론가는 이 형상을 무대 위의 ‘커튼’에 비유한다. 무대 위에 커튼이 내려간 인터미션을 표기하듯, 배우는 이 휴지부의 시간에서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른다. 배우와 커튼, 그리고 인터미션. 이 목록은 <그녀가 돌아온 날>과 인접한 시기에 보게 된 알베르트 세라의 신작 <고독의 오후>에서도 감지되는 것들이다.

세계적인 투우사 안드레스 로카 레이에 대한 다큐멘터리영화로 알려진 <고독의 오후>는 네번의 투우 경기 장면과 그사이(실제로 이 네번의 경기는 시간 순서대로 제시되지는 않지만 영화가 반복과 그 사이라는 시간의 구조를 제시하고 있음은 분명하다)의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이’를 우선 인터미션이라고 해보자. 가슴을 한껏 부풀리고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는 투우사를 일종의 배우로 볼 수 있다면, 그의 손에 들린 카포테나 물레타는 순간적으로 무대라는 단상을 만들어내는 커튼과 유사한 장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커튼이 인터미션을 발생시키지는 않지만 배우의 몸 가까이에 붙들려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경기가 끝나고 밴에 탄 안드레스가 조명을 끌 수 없냐고 묻는 말은 눈이 안 좋으니 커튼을 내리겠다는 정수의 대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익히 알려져 있듯 알베르트 세라가 홍상수 영화의 지지자 중 한명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두 영화가 같은 목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우연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알베르트 세라는 2010년 스페인의 배급사 인테르미디오(Intermidio)가 출시한 홍상수 영화 DVD 박스세트에서 영화 소개를 맡기도 했다. <해변의 여인>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그는 홍상수 영화에 나타나는 대사의 기술에 대해 언급한다. 이를테면 홍상수 영화에서는 인물이 다른 인물의 대사에 반문을 달거나 화답하는 대신 그 대사에 포함된 단어를 반복한다. 알베르트 세라는 이에 대해 인물이 준 정보에 ‘불안정한 터치’ 혹은 주의를 더하는 것이라 표현한다. 홍상수 영화에 있는 문학적 웅변을 읽어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영화에서 무언가가 반복될 때 감지되는 어떤 종류의 불안을 묘사한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예측 가능한 반응을 벗어난 단순한 반복은 영화에 이상한 리듬을 부여한다. 반복은 세계를 정합성으로부터 탈각시키고 어딘가로 한껏 치우쳐 있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결핍된 현실의 한 양상을 드러내는 주문이다. 세계를 애써 변형시키지는 않으면서 거기에 ‘불안정한 터치’를 더해 세계의 불균형을 누설하는 것. <돈키호테>를 변주한 <기사에게 경배를>과 카사노바와 드라큘라를 함께 다룬 <나의 죽음의 이야기>가 극적인 요소들을 따르는 대신 지극히도 잉여적인 몸짓들을 현시함으로써 분명히 거기 존재하지만 표면으로 보이지 않는 어떤 정념의 총체를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고독의 오후>에서 투우 경기 장면이 반복된다고 말하면, 이는 정확한 설명은 아닐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여기서 반복의 양식은 페드로 코스타가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에서 잔 발리바르의 공연 연습과 리허설, 녹음 장면을 반복해서 기입하면서 연습이라는 유일무이한 사건의 장으로서의 영화 만들기를 시도했던 것에 좀더 근접하다. 물론 <고독의 오후>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연습 장면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투우 경기지만, 막상 영화에서 경기라는 규모의 사건을 감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예컨대 안드레스의 움직임에 따라 호응하는 관객의 함성이 들려오지만 화면상에서 이 함성의 규모에 상응하는 군중의 모습을 확인할 순 없다. 안드레스는 황소와 함께 프레임 내부에 유폐된 채 몸에 새겨진 의례와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감각민속지 영화와 나란히 두고 비교하는 관점도 있지만, 이런 독해는 어딘가 석연찮다. <고독의 오후>가 주는 감각적인 충격은 이미지를 매개로 세계의 위상을 전복시키는 데에서 오는 게 아니라, 유일무이한 것과 반복 사이의 긴장 속에서 세계 자체의 괴물성을 감지하게 되는 일에서 비롯된다.

<고독의 오후>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알베르트 세라의 전작들에 대한 성실한 관객은 아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고독의 오후>처럼 단순한(것처럼 보이는) 구조를 가진 영화가 이토록 전위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 좀더 골몰해보고 싶다. 이와 관련지어 떠올렸던 건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의 소설 <목요일이었던 남자>에서 무정부주의자 시인과 사임이 벌이는 언쟁이다. 무정부주의자 시인은 예술가란 무정부주의자와 같고, 모든 예술가들은 폭탄을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가는 모든 관습을 파기하고 무질서에서만 기쁨을 느낀다. 그러자 사임은 그의 말을 반박하며 지하철이야말로 오히려 가장 시적이라고 주장한다. 지하철이 예정된 역에 도착할 때, 그건 지하철이 향할 수 있는 다른 수천 가지 가능성 중에서 바로 그 역에 도착한 것이기에, 이는 혼란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뜻한다. 시적인 것은 신성하고도 말없이 작용하는 우리의 소화 기능 같은 것이다. 나는 이것이 양자택일의 문제라기보다는, 모든 시적인 것이 이 두 가지 상태-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언쟁의 동역학이야말로 시적이고 전위적인 것의 토대가 아닐까. 이러한 정의를 의식한 채로 <고독의 오후>로 돌아와보자. 이 영화에서 전위적인 것은 황소가 투우사를 향해 돌진하는 폭력의 순간도, 죽음을 맞은 황소의 늘어진 몸을 응시하는 순간도 아니다. 영화가 투우라는 형식 속에서 결코 형식화될 수 없는 죽음을 반복해서 표지함으로써 (불)가능한 반복의 동역학 속에 우리를 유폐시켜놓을 때다. 이는 크리스 후지와라가 페드로 코스타의 <호스 머니>를 두고 말했듯 “어렴풋하게라도 그 반복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다시 무언가를 처음으로 마주 보기 위한 반복”과도 같다.

알베르트 세라가 스스로 영향받았다고 언급한 목록 중 한 사람인 아모스 보겔이 쓴 <전위 영화의 세계>에서 그는 전위예술이 “심장으로 경멸이나 공포를 찔러 들어가는 개념”이며 “분리, 단편화, 동시성, 분해- 이것들은 혼란이 아니라 명료화의 적”이라고 말한다. 잔인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불명료함의 공포를 심장에 찔러넣는 것이야말로 현대영화의 전위성이다. 공교롭게도 '찌르는 것'은 <고독의 오후>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몸짓 중 하나다. 투우가 시작될 때 소의 몸에 창과 작살을 찔러넣는 것뿐 아니라, 투우의 마지막 절차는 투우사가 검을 들고 소의 급소에 칼을 찔러넣는 것이다. 누군가가 프레임 밖에서 “이제 자세를 잡아”라고 외치면 투우사가 소를 향해 검을 든다. 그는 시간표대로 도착하는 지하철처럼 동작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 순간, 적의 포위를 뚫고 승리한 듯한 함성이 울리는 그때에, 우리는 이것이 무수히 반복되어온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반복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한 반복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 영화에 비치는 투우의 의례화된 아름다움은 아직 시간이 도착하지 않았을 때, ‘아직’과 ‘다시’ 사이에서 불사의 괴물처럼 되살아나는 이미지의 잔해다.

집요한 반복에 관해서라면 한 가지 영화를 덧붙이고 싶다. 팔레스타인 사진작가 파템 하수나와 이란 출신이지만 반체제 활동으로 프랑스로 망명한 감독 세피데 파르시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영화 <영혼을 손에 품고 걷는다>는 반복되는 두 사람의 영상통화의 기록으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통화가 이루어지는 디바이스의 화면을 녹화한 영상이 아니다. 세피데 파르시 감독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 다른 스마트폰을 들고 영상통화가 이루어지는 화면을 촬영했다. 두 사람이 어떤 경계를 넘어 마주 보기 위해서는 결국 두대의 카메라가 필요하다. 이혜목 감독의 <팔레스타인을 위한 두 대의 카메라>에서 그는 팔레스타인에 관한 연극을 재연하는 영상을 찍지만, 거기서 무력감을 느끼고 다시 또 하나의 카메라를 들고 광장으로 향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마주 보기 위해 때로는 우리 몸을 두 갈래로 찢어야 한다. 이혜목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한 제작기를 담은 책 <응답하는 이미지>에서 하룬 파로키가 <당신의 눈앞에서-베트남>에서 인물의 입을 빌려 한 말을 인용한다. 그 문장을 다시 이 지면으로 옮기면서 글을 끝맺고 싶다. “아름다움은 아직 견딜 수 있는 공포의 시작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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