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보>가 일본 박스오피스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한국인 감독 최초 누적 관객수 1천만명을 넘은 데 이어 흥행 수익 170억엔(약 1600억원) 돌파, 역대 일본 실사영화 흥행 2위 등 다소 주춤했던 개봉 첫주 성적을 가뿐히 넘어선 결과가 꾸준히 이어지는 추세다. 이상일 감독이 <유랑의 달>에 이어 3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자 제78회 칸영화제 감독주간 부문에 초청돼 선보인 <국보>는 키쿠오(요시자와 료)와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 수십년에 걸쳐 이어진 두 가부키 배우의 인연을 그린다. 17세기 무렵 시작된 전통 연극이자 일본의 인류무형문화유산인 가부키는 영화 소재로 기피되어왔다. 무대를 구현하기 위해선 적지 않은 예산이 필요하고 가부키 팬인 높은 연령층의 관객만 타기팅이 가능할 것이란 전망 때문이다. 단순히 가부키 공연을 재현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들어맞는 예측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보>는 무대 위와 더불어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가부키 배우들의 사투와 예술에 대한 열망을 주요하게 다룬다. 완벽한 공연을 올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결여된 부분을 채우려 하며 타인의 재능을 시기하는 배우와 관객의 탐미의 순간이 밀도 높게 기록되어 있다. 유명 가부키 배우들이 연이어 호평을 남기고, 영화를 본 뒤 실제 가부키 공연을 찾는 관객마저 증가한 이유도 여기서 기인할 것이다.
정점의 미학에 도달하기 위하여
‘온나가타’는 가부키에서 여성 역할을 맡는 남성배우를 일컫는다. 1620년대 풍기 문란을 우려해 여성배우의 출연이 전면 금지되면서 남성배우가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전통이 생겼다. 극 중 야쿠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키쿠오의 취미는 온나가타로서 무대에 서는 것이다. 가부키 명문가의 배우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겐)가 키쿠오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사고로 부모를 잃은 그를 거둬들인다. 키쿠오는 한지로의 아들 슌스케를 좋은 라이벌이자 동료로 여기며 최고의 온나가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나간다. 극의 분위기가 바뀌는 시점은 한지로가 다리를 다쳐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되면서부터다. 아들인 슌스케가 아버지 한지로의 대역으로 서는 것을 당연한 이치라 여겼지만, 정작 한지로가 자신의 대타로 지목한 것은 키쿠오였다. 키쿠오가 큰 무대를 훌륭히 소화해내는 모습을 본 뒤 슌스케는 돌연 자취를 감춘다.
<국보>에선 이상일 감독의 이전 필모그래피와의 유사점, 차이점을 모두 발견할 수 있다. 탄광촌에서 춤으로 희망을 논한 <훌라걸스>로 일본 아카데미 4관왕을 안은 이상일 감독은 이후 방향을 틀어 <악인><분노><유랑의 달>에서 인간의 이중성과 내면의 딜레마를 탐구해왔다. 요시다 슈이치 작가의 소설을 영상화한 <악인><분노>처럼 <국보>또한 그의 원작 소설에서 출발했다. 이상일 감독은 “인간을 향한 허무와 애정이 공존하는 시선”(<씨네21> BIFF 데일리 7호 인터뷰)이 요시다 슈이치 작가와 닮았다고 밝힌 바 있는데, 둘은 과거 ‘가부키 소재의 영화’에 관해 논했었다고 한다. 이후 요시다 슈이치 작가가 3년간 가부키에 관해 취재한 정보를 바탕으로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발간된 소설을 바탕으로 2년여의 각본 개발 과정을 거쳐 <국보>의 토대가 마련됐다. 그래서인지 <악인><분노><국보>에선 갈망하는 대상을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인물상이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이상일 감독이 ‘가부키가 주제인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고 생각한 시점이 <악인>이 개봉할 무렵이었으며, 실화를 바탕으로 한 <훌라걸스>로 춤이 지닌 힘을 체감한 것 또한 <국보>를 가늠할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국보>에서 보다 강조된 것은 인물의 결핍, 좁힐 수 없는 간극을 집요하게 건드린다는 점이다. 가부키 세계에선 소속된 가문과 대를 잇는 역사를 중요시한다. 슌스케는 실력으로 밀릴지언정 ‘하나이’라는 명망 높은 가문의 정식 계승자이며 키쿠오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가문의 양자에 불과하다. 실력으로 넘어설 수 없는 가문의 벽이 때때로 키쿠오의 앞을 막아서고, 슌스케는 하나이라는 이름의 무게에 짓눌려 방황하다 무대를 떠난다. ‘천재’와 ‘후계자’라는 키쿠오, 슌스케의 정체성은 서로가 가장 열망하는 것이며 끝내 올라설 수 없는 자리다. 한 차례씩 무대를 떠났던 키쿠오와 슌스케는 결국 다른 태도로 가부키를 대한다. 키쿠오에게 무대는 자식을 외면하고서라도 반드시 쟁취해야만 하는 존재이지만 슌스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무대로 돌아왔다고 말한다. 슌스케와 달리 자신이 무대에 설 이유를 매 순간 증명해내야 하는 키쿠오의 입장에선 불가피한 결정이었을 테다. 최고의 온나가타가 되기 위해 키쿠오는 결국 자신을 내려놓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부키 공연은 과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화려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와 대비해 대다수의 관객이 알지 못할, 극을 끝낸 배우의 감정과 시선도 여운을 두고 배치한다. 공연의 아름다움은 일회성이라는 숙명에서 기인한다. 배우의 움직임과 말은 실시간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공연을 마친 뒤의 성취감도 이내 허무함으로 대치된다. 그럼에도 키쿠오는 반복해 속삭인다. 오직 공연을 마친 자신만이 바라볼 수 있는 무대 위의 풍경이 더없이 “아름답다”고. 영원히 소유할 수 없고 그래서 아름다우며 평생을 갈급할 수밖에 없는 것. 어린 시절부터 온나가타를 동경해왔으며 마침내 정상에 오른 키쿠오의 고독, 자신만이 빚어낼 수 있는 가부키의 아름다움과 희열을 여전히 갈망하는 그의 모습이 영화에 초연하게 묘사되어 있다.
<국보>는 인간 국보의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한 인간이 겪어낸 의미를 되새긴다. 예술과 예인에 대한 헌사가 짙게 자리한 작품으로, 이를 강조하기 위해 놓인 몇몇 클리셰가 주는 기시감이 아쉽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예술이라는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끝없이 올라서는 예인의 서사에 어떻게 몰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름답다”는 키쿠오의 대사에 함축된 그의 감정을 되새겨본다.
‘진짜’ 가부키를 재현하기 위해
1년 반 동안 배우들이 몸소 가부키를 배우고, 3개월이 넘는 촬영 기간을 거쳐 <국보>속 공연 장면들이 완성됐다. 사랑에 빠진 두 여성의 감정을 드러낸 <도죠지의 두 사람>, 맺어질 수 없는 두 남녀가 다음 생에 함께하기 위해 동시에 삶을 포기하는 <소네자키 동반 자살>에서 특히 정점에 오른 키쿠오, 슌스케의 연기를 만날 수 있다. 참여한 제작진도 화려한데 <킬 빌><헤이트풀8>등에 참여한 다네다 요헤이 미술감독이 공간을 꾸렸으며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소피안 엘 파니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들었다. 유명 가부키 배우인 4대손 나카무라 간지로는 직접 배우들의 훈련을 돕고 현장에도 함께해 공연 신의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