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없는 가해의 풍경이 신랄하게 펼쳐진다. 지위와 양심이 가리키는 바대로 ‘내 잘못’임을 감각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면 그 혼자 속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가 남기는 것은 슬픔이나 분노가 아니라 그저 암담한 충격파다.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의 도시 클루지 나포카. 번영을 꿈꾸는 도시 개발 프로젝트는 콘티넨탈이라는 이름의 호텔 개발에 착수한다. 부동산 퇴거를 담당하는 집행관인 오르솔리아(에스테르 톰파)는 재개발 예정지의 지하실에 거주하는 노숙자 이온(가브리엘 스파히우)을 퇴거시켜야 한다. 갈 곳을 잃은 남자는 곧 목에 철사를 휘감아 지하실에서의 죽음을 택한다.
이온을 따라가던 시선이 그의 죽음 이후 오르솔리아로 급격히 전환되는 구성이 대담하다. 희생자에서 가해자로, 죽음에서 죄책감으로 초점을 옮기며 관객을 적극적으로 곤경의 자리에 놓는다. 오르솔리아는 점심시간이면 광장 벤치에서 도시락을 먹고 상사의 지시를 대체로 성실히 따르며, 이온에게도 몇번이나 기회를 주었던 여자 오리솔리아는 말하자면 지극히 평범한 노동자다. 그러나 라두 주데 감독이 아이폰으로 촬영한 <콘티넨탈 ’25>에서 잘못한 사람은 그녀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르솔리아가 법적 무죄를 인정받고 주변의 적당한 위로를 받는 일까지도 쾌속이다. 여자는 가족 휴가도 포기하고 도시에 남기로 하며, 영화도 거기서 비로소 시작된다.
라두 주데 감독은 미니멀리즘과 대화 중심의 서사를 구축해 루마니아가 당면한 급속한 젠트리피케이션과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맥락을 드러낸다. <배드 럭 뱅잉><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와 같은 전작에서 선보였던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전술 대신 절제된 카메라워크와 리얼리즘을 택한 영화의 중심엔 전보다 더 광범위한 계급 분열을 목격하는 도시 집행관의 일상이 자리한다. 역사적 건축물과 정치 캠페인, 애니매트로닉 공룡이 배회하는 놀이공원 같은 우스운 풍경 사이에서 포스트사회주의 루마니아의 초상은 갈 곳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오르솔리아는 남편, 친구, 어머니, 사제, 길에서 만난 낯선 남자를 아울러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의 책임과 죄에 관해 토로할 뿐이다. 대화는 반복된다. 질척이는 감정만큼 위로는 공허하고, 처음엔 진솔하기라도 했던 고백이 일종의 자기 면죄부처럼 점차 구태의연해진다.
가슴 아픈 죽음에 관한 단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를 딛고 이 말 많은 희비극은 결국 무력함의 한숨을 뱉어낸다. 라두 주데의 관심사는 애처로운 중간자의 정서적 깊이나 복잡성이 아니다. 냉엄한 리얼리즘은 그녀의 죄의식을 생생하게 품되 특유의 거리 두기로 위선을 포착하며 사회적 책임이 개인의 짐으로 남은 부조리를 감각게 한다. 신자유주의적 제도가 부추긴 개인의 양심적 파산에 관하여 <콘티넨탈 ’25>는 사실상 회생 불가 판정을 내린다. 도덕적 긴장감을 자아내는 장면과 몰입을 방해하는 코미디 사이, 정적인 프레임 안에 강렬하게 누적된 질문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공모성과 씨름하게 만들 것이다. 루마니아의 국경을 넘어 우리 시대의 도덕적 투쟁을 비추는 거울 같은 영화가 등장했다. 잔인하게 우습고, 오래 얼얼하다.
close-up
“법적으로는 괜찮습니다.” 끝이 없는 주인공의 고뇌에 몇 차례 성경을 인용하던 사제가 더이상 할 말이 없자 오르솔리아를 이렇게라도 위로한다. 라두 주데의 아이폰이 인물들의 등 뒤에서 촬영한 이 장면은 이른바 고객 서비스로 전락한 고해성사 앞에서 난감한 정교회 사제와 신성으로부터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하는 오르솔리아의 도돌이표 같은 대화를 들려준다. 끝없는 고백과 무한한 사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온은 여전히 죽어 있고 콘티넨탈 호텔은 건설될 것이다. 고정된 카메라는 이 거북한 무능함을 관객들이 실시간으로 견디도록 강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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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파 51>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 1952
라두 주데의 현대적 비평을 위한 정신적 청사진 역할을 한 작품. 전후 로마를 배경으로 부유하고 자기중심적인 사교계 명사 이렌(잉그리드 버그먼)이 어린 아들의 자살을 마주한 뒤 자기 삶의 부르주아적 관습을 돌아본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네오리얼리즘이 각성한 개인의 초월적 속죄가 세속과 충돌하는 풍경을 제시했다면, 주데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향한 탐색을 차단하고 현대의 윤리적 마비에 관한 황량한 우화에 집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