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스페셜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 일기의 영화
김혜리 2025-05-08

※ <콘클라베>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월8일

혁명이나 혁신이라 하면 속도를 높이는 변화를 연상하기 마련이지만, 영화 세계에서는 느린 쪽이 혁명적이다. 전후 네오리얼리즘, 타르콥스키, 차이밍량, 샹탈 아케르만 등 상이한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느림의 미학을 예술적 무기로 삼는다는 사실이 일견 신기하기도 하지만, 전세계 주류 상업영화의 표준인 할리우드영화가 더 짧은 숏과 더 빠른 편집을 향해 질주해왔기에 이에 대한 안티테제들에서 공통점이 발견되는 현상은 자연스럽다. 빠른 시간이 처리되는 시간이라면 느린 시간은 체감되는 시간이고 배우는 시간이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과 미셸 윌리엄스의 <쇼잉 업>도 느릿하다. 현대 예술가의 삶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는 이렇다 할 낙차가 없는 이야기다. 포틀랜드의 세라믹 아티스트 리지(미셸 윌리엄스)는 미대 교직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시간을 쪼개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리지의 집주인인 성공한 설치미술가 조(홍차우)는 이따금 리지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부상당한 비둘기를 돌봐야 하는 뜻밖의 사태까지 발목을 잡는다. 일상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것들을 그러모아 안고 리지는 참을성 있게 테이블에 앉아 심플한 동작으로 물질의 상태를 바꿔나간다. 흙을 빚고 구워 아름다운 사물을 짓는다. 전시회 개막날 그동안 리지에게 스트레스를 준 친구와 가족을 포함해 작은 갤러리에 모여든 오붓한 예술 공동체 멤버들을 지켜보며 우리는 예술가는 혼자 작업할지언정 혼자서는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서로 작업의 계기이고 라이벌이고 관람자다. 있어야 할 자리에 나가 하루치의 일을 하는 자들이 예술가다. 스스로 교수로서 학생을 가르치며 2, 3년에 한번씩 영화를 만들어온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그렇게 예술 행위에 따라붙는 부르주아적 아우라와 신비를 걷어낸다.

현재 서울 리움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피에르 위그의 <휴먼 마스크>(2014)는 ‘인류세’ 이후 세계를 상상하는 작품이 많아진 최근 영화의 흐름과 맞물려 시선을 붙든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버려진 식당에 소녀의 옷을 입고 가면을 쓴 채 방치된 원숭이는 훈련받은 서빙 행동을 목적 없이 반복한다. 인간과 동물, 연민과 소외, 연기와 주체성 사이에서 무한 진동하는 이 비디오는 ‘림보’ 그 자체다.

1월9일

리지는 영화평론가이자 미술가였던 매니 파버(1917~2008)가 창안한 개념에 의하면 ‘흰개미 예술가’다. ‘흰개미 예술’은 ‘흰 코끼리 예술’과 반대된다. 흰 코끼리 예술이 걸작과 거장을 추구하고 거대 담론과 작품의 완성도를 중시하는 반면, 흰개미 예술은 미시적인 것에 몰두하고 과정 자체에 집중한다. 최종 목적을 정하지 않고 어깨를 숙이고 눈앞에 있는 질료를 씹어서 작품을 만든다. 파버의 친구인 장피에르 고린은 “흰개미 예술은 제한된 지형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그 지형의 모든 부분을 어떻게 문제화할 것인가에 관한 탐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쇼잉 업>에서 리지의 예술 세계는 그의 작업 테이블 위에 있으며, 리지는 자신의 팔꿈치 너비 안에 있는 평면과 위에 올려놓은 재료들을 속속들이 안다. 흰 코끼리 예술가들은 고공에서 내려다보는 신적 시점이 진리의 총체를 파악하는 데에 유리하다고 여기지만 정작 높은 곳에서 보는 시야는 넓을지 몰라도 구름과 바람으로 흐리기 일쑤다. 흰개미 예술은 ‘루틴’의 아름다움, 혹은 현대사회의 위태로운 일상을 지탱하려는 안간힘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위에서 말한 느린 영화, 슬로 시네마와 닮았다. 매니 파버와 친구들이 제시한 흰개미 예술의 태도를 당연히 관객에게도 적용해볼 수 있다. 영화의 예술적 테제, 작가적 시그니처, 상징을 추려내 명세서를 만드는 대신, 현실의 표면으로 만들어지는 예술이 영화이기에 끌려들어온 우연한 디테일과 시간의 흔적에 감각을 열어두기. 그래서 한편의 영화에서 더 많은 입구와 출구를 찾아내기.

3월2일

<아노라>가 오스카 작품상을, 마이키 매디슨이 여우주연상을 탔다. 숀 베이커는 편집, 각본, 감독, 작품상을 하룻저녁에 수상해 평생 DIY 감독으로 고생한 보람을 찾았다. 숀 베이커는 미국 자본주의 변두리의 가려진 시장에서 먹고사는 인물들에게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한 감독이 주로 다루는 계급만으로 그의 영화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우선 “왜?”의 물음이 있다. 2018년 <플로리다 프로젝트> 개봉 당시 서울에 온 그는 내게 빈곤층의 서사가 더 흥미롭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했다. 다만 영화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진입 비용’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복한 계층이 필름메이커가 되는 비중이 높고 자연히 영화 속 인물의 계급도 편중되기 마련임을 깨달은 베이커는, 이왕이면 좀처럼 재현되지 않는 인물들을 통해 보편적인 욕망과 우여곡절을 지닌 삶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뿐이라 했다.

다음은 “어떻게?”다. 방법론적으로 <아노라> 이전까지 지역과 주민을 취재하고 캐릭터를 만드는 그의 방식은 마이크 리의 그것과 유사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숀 베이커는 탐욕스러운 영화광이기도 하다. <아노라>에서 테이크 댓의 신나는 노래와 함께 고속촬영으로 클럽 광경을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내가 언제 이 정도 규모로 익스플로이테이션영화를 만들어볼 수 있겠어?”라는 감독의 비밀스러운 흥분도 전해진다. 베이커의 초기작 <테이크 아웃>(2004)은 중국집 폐점 전에 브로커에게 줄 150달러를 벌어야 하는 불법 이민 배달부의 이야기인데, 그의 동분서주는 숨찬 노역이지만 감독은 그의 배달을 틈타 뉴욕 지붕 밑의 다양한 가구(家口)를 엿보는 즐거움을 숨기지 않는다.

한편 숀 베이커의 영화는 ‘츤데레’들로 북적인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그의 인물들은 위기에 취약하다. 간혹 찾아오는 행복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미사여구는 그들의 입에 잘 붙지 않는다. 그들의 친절과 우정은 예쁘게 표현되지 않는다. <탠저린>은 영화 전체가 언쟁이고 <아노라>는 티격태격 스크루볼코미디로 분류해도 손색이 없고 <스타렛>의 나이 차 많은 두 여자는 몇번이나 절교할 뻔한다. 베이커는 서로 다른 둘 이상의 개인이 만날 때 가장 일어날 법한 물리적 작용은 ‘충돌’이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베이커는 끝내주는 라스트신을 욕심내는 엔딩 요정이다. 다른 건 몰라도 엔딩은 알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고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밝힌 그는 작품마다 절묘한 착지법을 찾아낸다. 그의 마지막 신은 첫 장면의 자리에 역방향으로 도착하거나,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궤도로만 다닐 필요가 없음을 입증하거나 구겨진 종이 쪼가리처럼 보이던 인물이 도로 펴지기 시작하는 첫 찰나를 보여준다.

3월9일

평론가 남왈리 세르펠은 최근 <뉴요커>에 기고한 글에서 오스카 작품상 후보를 비롯한 최근 주요 영화들이 신 직설주의(New Literalism)에 물들어 있다고 우려했다. 신데렐라 스토리로 요약되는 <아노라>, 문자 그대로 젊은 신체가 50살 여성의 등뼈에서 태어나는 <서브스턴스>, 자유의 여신상을 뒤집어놓는 노골적 상징을 쓴 <브루탈리스트>, 성전환수술 과정을 고스란히 가사로 쓴 뮤지컬 <에밀리아 페레즈> 등은 불분명한 뉘앙스와 아이러니를 제거하려는 강박적 재현으로 점철돼 있다고 세르펠은 비판한다. 반복은 예술의 기초이고 부정확한 반복으로부터 창조가 시작되는데 신 직설주의의 반복은 중복에 가깝고 역사를 동시대적 경험으로 재연하는 대신 ‘복붙’할 뿐이라는 요지다. 그러면서 세르펠은 <키메라> <챌린저스>와 더불어 에드워드 버거의 <콘클라베>를 호평했다. <콘클라베>는 가톨릭 도상과 의례의 시각화는 선명하기 이를 데 없지만 예측 불가한 드라마와 계시적 표현으로 관객의 미디어 리터러시를 신뢰했다는 이유다.

최근작 영화들을 구분하고 평가한 남왈리 세르펠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콘클라베>가 자명한 진리와 확신을 경계하고 현대 종교가 처한 위기의 돌파구를 경계를 흐리는 간성(intersexual)의 존재에서 찾는 이야기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전 시대 영화에서 인터섹슈얼이나 트랜스젠더는 위장이나 속임수의 플롯과 관련됐다. 주인공이 사랑한 여성이 간성의 신체를 드러내는 <크라잉 게임>(1993)의 결말부는 부정적 충격으로 묘사됐다. (진실을 안 남자는 구토한다.) <콘클라베>는 반대로 젠더 이분법 밖에 있는 베니테스 주교의 육신과 거기에 깃든 영혼을, 교회의 관용을 넓히고 현 질서에 대한 겸허한 회의(懷疑)를 북돋을 수 있는 반석으로 간주한다.

영화는 베니테스가 수술을 통해 완전한 남성의 몸으로 전환하지 않은 이유를 확정하지 않는다. 당사자의 대사는 “신이 준 것을 바꿔야 할 불가피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이나, 선종한 진보적 선대 교황은 간성 정체성이 교회의 혁신에 유용하리라는 전망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새 교황 이노켄티우스의 정체성은 로렌스 주교(레이프 파인스)와 베니테스 사이의 비밀로 남는다. 공표되지 않은 교황의 정체성은 얼마나 교회를 바꿀 수 있을까? 현재 가톨릭은 트랜스젠더의 사제 서품을 금하는 한편 간성인의 그것에 대해서는 전면적 금지 입장을 취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안정적 성정체성을 강조하는 교회 전통에 의해 당사자에게 양성 가운데 보다 우위에 있는 젠더를 택일하기를 종용하고 그것이 여성일 경우 성직에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럴 리 없지만- <콘클라베>의 속편이 베니테스의 커밍아웃 스토리가 된다면 영화가 본격적으로 현실을 추월하는 셈인데 적어도 남왈리 세르펠 평론가는 기꺼워하지 않을 것 같다.

밥솥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사진제공 그린나래미디어

종교가 달라 몰래 사귀는 연인이 모르스부호처럼 종일 타전하는 문자, 마음에 둔 여자를 향해 한편씩 써내려간 시, 어느 날 UFO처럼 날아온 전기밥솥.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의 뭄바이는 희미한 신호로 웅성인다. 간호사 프라바는 중매결혼 직후 독일로 취업 간 남편의 침묵을 어찌 판단할지 알 수 없던 중 독일제 전기밥솥을 소포로 받는다. 쪽지는커녕 발신인 이름도 없는 무뚝뚝한 선물을 받은 날 밤 프라바는 다른 남자에게 받은 사랑의 시구를 가만히 읽어본다. 마치 둘을 결합하려는 듯. 또 다른 공허한 밤 프라바는 팔다리를 접어 온몸으로 가만히 밥솥을 안아본다. 감정적 허기와 욕망이 담긴 이 몸짓은 온후한 작별 인사이기도 했음을 우리는 나중에 알게 된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