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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가 만난 사람들, 영화들 – 봉준호 감독 인터뷰 ➂
김소미 사진 최성열 2025-04-17

- 시네필로서 감독님의 영화 원년을 채웠다고 할 수 있는 주요 감독들, 그중에서도 동시대에 살아 있는 감독들은- 마틴 스코세이지, 스티븐 스필버그 등- 이제 대부분 직접 만나신 것 같습니다.

노란문 영화 동아리 시절의 저를 생각하면 정말 신기한 일이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님과 영화제 만찬 자리에서 식사할 기회가 있었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님 다 뵈었으니까. 아직도 비현실적이에요. 조지 밀러 감독님도 여러 번 만났고요. 전 동세대 감독들과의 만남도 좋았어요. 특히 올리비에 아사야스, 웨스 앤더슨, 에드거 라이트, 타란티노 형님. <기생충> 오스카 캠페인 기간에 행사장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님을 가까이서 실제로 뵌 것도 기억에 나네요. 그런데 한분 남아 있어요. 미야자키 하야오 옹. 원체 밖으로 다니시는 분이 아니라 어쩔 수 없죠.

- 2020년에 <사이트 앤드 사운드> 2월호 편집을 맡으면서 알리체 로르바케르, 아리 애스터, 한국의 윤가은 감독 등 기대하는 차세대 감독 20인을 뽑아주셨죠. 혹시 지금 추가로 호명하고 싶은 감독이 있나요.

홍의정 감독님. 제가 <사이트 앤드 사운드>에 리스트 보낸 직후에 <소리도 없이>를 봤어요. 팬데믹 기간에 사람이 거의 없는 종로3가 피키디리극장에서. 정말 좋았지요. 그의 두 번째 영화를 기다립니다. 윤단비 감독님의 <남매의 여름밤>을 좋아하고, 미야케 쇼 감독님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도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보고 싶은데 타이밍이 좀 엇갈려 아직 못 봤죠. 하마구치 류스케에 이어 미야케 쇼까지 젊은 감독들이 마땅한 주목을 받고 있다는 점이 일본영화계의 부러운 지점 중 하나죠.

- 밀레니얼세대 감독들이 팬데믹 이후 한국 영화산업에서 살아남는 생존 방식을 고민하는 시대입니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후배 영화인들에 대한 질문도 많이 받으실 텐데요.

외국 나가면 한국의 새로운 재능에 대해 알려달라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아요. 이창동, 박찬욱, 홍상수 감독님, 그리고 나홍진, 연상호 감독님 등이 국제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이후 세대의 부재가 눈에 띄나봐요. 더 젊고 새로운 재능이 ‘왜 안 나오는가’ 하는 식으로 언급되는데 제가 항상 하는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재능은 여기저기 더 많고 들끓고 있는데 우리 세대와 다르게 산업과의 접점이 부족한 거죠. 인더스트리와 평행선을 달리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건 메인스트림이 모험을 회피하는 면이 있어서겠죠. 시장 구조상 복합적인 요인으로 진취적인 프로듀서들의 존재들도 많이 약해졌고…. 장준환 감독이 <지구를 지켜라!>로 데뷔할 때와 같은 기회가 잘 안 생기는 거지요. 그래서 지금 잘 찍는 감독, 정말 섬세하고 영화 잘 만드는 친구들이 인디영화나 단편 작업 안에 머물게 되는 면도 있겠고. 과거에 미쟝센단편영화제 같은 곳이 옛날 식으로 말하면 충무로 복판에서 활동하는 분들과 새로운 재능이 만나는 자리였잖아요. 심사위원, 집행위원인 감독의 영화에 조감독이나 스태프로 들어가거나 시나리오를 같이 쓰기도 하고. 감독과 산업의 연결고리가 되는 영화제의 역할이 중요한 거죠.

- <씨네21>은 앞서 22주년에 봉준호 감독 특별판을 만든 적 있습니다. 이 책에도 실려 있기로, 감독님은 비평 담론의 과감한 투쟁장에 함께해온 창작자입니다. 이를테면 <살인의 추억> 찬반 대담에 합류해서 영화를 지지하는 평론가와 비판하는 평론가 사이에 앉아서 대화한다든가.

제가 그랬다고요? (책 뒤적이다가) 정말 고약한 컨셉이네!

- 네. (웃음) 지면으로 남은 영화지가 전세계적으로 몇 안되는 상황인데요. 감독님께 종이 잡지의 의미는 어떻게 남아 있습니까.

<미키 17>을 하면서 미디어 환경이 바뀐 것을 확실히 체감했어요. 숏폼에 이제는 제가 적응해야 돼요. “미키 17이 좋아 미키 18이 좋아?!” 같은 질문엔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게 좋겠죠. 짧은 영상 형식의 리듬에 맞게. 유튜브 쇼츠뿐 아니라 인스타그램, 틱톡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맞는 매너를 요구받게 되고. 미국의 <필름 코멘트>, 영국의 <사이트 앤드 사운드>, 프랑스의 <카이에 뒤 시네마>, 일본의 <기네마준보> 같은 잡지들이 나라마다 하나씩 상징적으로 남아 있는데 이들과 인터뷰하면 주로 사진 촬영도 최소로만 진행하고, 저보다 먼저 자리 잡고 담배 피우고 있던 평론가와 막힘없이 영화 이야기를 술술 주고받던 시절이 추억으로 떠오르네요. 물론 플랫폼과 별개로 진지하고 전문적으로 영화 담론을 이어가는 분들도 있지만요. <미키 17> 미국 개봉 후 <뉴욕타임스>의 평론가 마놀라 다지스가 리뷰를 썼어요. 신문 지면 분량으로 딱 짜여진, 전통적인 형식의 리뷰 말이죠. 영화 개봉하면 그들의 평이 아주 중요하던 시대가 있었는데. 외람되지만 다지스 선생 연세를 봤을 때 앞으로 이런 리뷰를 얼마나 더 받아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요. <씨네21>에 대한 반가움과 애틋함도 그런 거지요. 제가 기자님을 베를린에서 만났을 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들의 일이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언제까지 지금의 형태와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언제까지 영화 매거진이라는 포맷이 지속될지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제 이렇게 영화 한편을 완성하고, 그걸 두고 만나서 이야기하는 기회가 무척 귀하다고 느낍니다. 이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요.

현남에서 미키, 그리고 심해어에 이르는 어떤 외로움

<플란다스의 개>

- 감독님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가 2000년에 밀레니엄의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25년 뒤 등장한 <미키 17>의 미키가 제겐 문득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는 현남(배두나)과 같은 청년 노동자로 보였어요. 가파르고 극심하게 정치·경제적 상황이 악화된 세계의 현남.

둘 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이 아니죠. 미키는 우주선 관리소에서 현남처럼 끄트머리 포지션에서 일했으면 좋았을 친구인데, 어쩌다 계약서도 제대로 안 보고 사인을 해버려서…. 사실 우리도 다 안 보잖아요. 인터넷에서 계정 만들 때 ‘동의합니다’에 체크하는 것조차 귀찮아서 ‘모두 한꺼번에 동의하기’ 버튼 누르고 있잖아요. 그거 정말 길고 복잡한데. 사실 읽어보면 그 안에 어떤 섬뜩한 문구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모른 채 넘기죠. <플란다스의 개>는 처음 쓸 때 소설이나 영화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사람이 누굴까 고민하면서 썼어요. 사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일이란 민감하고 힘든 일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 영역 밖이죠.

- <플란다스의 개>의 개부터 <미키 17>의 크리퍼까지, 감독님 영화의 액션은 크게 보자면 한 존재가 자기 자신을 비롯해 조금 더 약한 존재를 보호하려는 움직임, 자력구제의 액션 같습니다. 이를테면 비인간 생명체가 어린 새끼를 품고(<괴물> <옥자> <미키 17>), 지원 못 받는 경찰들이 추가 피해자를 막으려 애쓰고(<살인의 추억>), 가정부가 지하에 가족을 숨기는(<기생충>) 식으로요. <괴물> 때는 작품의 테마를 “보호의 모티프”라 표현하셨는데요.

<괴물>

미키도 나샤의 보호를 받고 있죠. 보호와 구출의 레이어 자체를 전면에서 이야기했다기보다 작품마다 가로세로로 결국 얽히게 된 것 같아요. <괴물>이 노골적으로 그런 세팅이죠. <괴물>은 국가나 시스템, 사회로부터 배려받지 못하는 사람들 얘기였어요. 시스템이 강두(송강호)네 가족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핍박하잖아요. 보균자라고 하면서 보건 당국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딸이 괴물에게 잡혀간 것만 해도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데, 그 와중에 당국의 추적을 받고 수배자가 되는 상황이니까요. 자력 구제라는 건 결국 스스로 자기들끼리 보호하고 구출해야 한다는 거니까 보호 이전에 외로움의 공유도 있을 것 같고요. <마더>에서도 김혜자 선생님 캐릭터의 고립감이 저한텐 큰 무엇이에요. 남편이 있고 없음, 아들에 대한 집착을 넘어 이 인물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립감이요. 비좁은 약재상에서 길거리를 바라보는 위치에 앉아 잡초를 썰면서 영화가 시작되는데 저는 그게 영화 끝까지 해소되지 않는다고 봤어요. 부녀회 여성들 틈에서 같이 미친 듯이 춤을 춘다고 해도요. 사실 지금 준비 중인 애니메이션이 <옥자>와도 통하는 데가 있는데요. 옥자든 미자든 그 작명에서 둘을 돌보는 할아버지의 존재감이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아이가 쑥쑥 자랄수록 어린 소녀가 할아버지 세대와 정서적 교감을 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이건 외로움 속에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죠. <더 밸리>도 깊은 바닷속의 외로움, 그 가운데 뜻밖의 사건이 여러 일을 만들어요. 외로운 자들끼리 서로 도울 수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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