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유명 투자자는 2025년 1월 미국 <파이낸셜 타임스>에 ‘진실과 화해의 시간’(A time for truth and reconciliation)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트럼프를 열렬히 지지하는 이 투자자의 칼럼은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을 진실로 주장하는 논지 전개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음모론을 따르는 칼럼이 대체로 그렇듯 이 칼럼 역시 (민주당이) 의도적으로 감추어왔던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 칼럼은 계시와 종말을 뜻하는 아포칼립스라는 낱말과 함께 음모론의 수사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가령 이렇다. 2016년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처음 당선되었을 때 버락 오바마는 직원들에게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 승리가 “종말이 아니다”라고 했었다. 하지만 2025년 트럼프의 승리는 아포칼립스, 곧 (진실이 밝혀지는) ‘계시’의 시간이 될 것이다. 2025년 음모론을 신봉하는 적지 않은 한국인이 그러하듯 실리콘밸리 페이팔 창업자도 진실의 담지자를 자처하며 실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수사학적 도구로 계시록의 언사를 차용한다.
때마침 2025년 2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아포칼립스적 상상력의 역사적 궤적과 예술적 해석을 다루는 전시 <아포칼립스. 어제와 내일>이 시작됐다. 아포칼립스는 모호한 의미를 가진 만큼 강렬한 도상학적 전통을 만들어냈다. 중세 시대 아포칼립스 태피스트리와 필사본 속 아포칼립스의 기사단 형상부터 동시대 예술과 대중문화 속 아포칼립스의 형상까지 포괄하는 이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관객은 가장 먼저 영화 <멜랑콜리아>(2011)의 시퀀스가 루핑되고 있는 대형 스크린을 발견하게 된다. <멜랑콜리아>는 거대 행성과 충돌을 앞둔 지구 행성에 살고 있는 두 인물의 내면을 좇는 영화가 아닌가?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눈 속의 사냥꾼> 위로 재가 떨어져 내리는 <멜랑콜리아>의 슬로모션 인트로, 20세기 전반기 세계대전 이후 유지되어왔던 세계질서를 뿌리째 뒤흔드는 트럼프 추종자들의 아포칼립스, 트럼프의 최측근인 일론 머스크가 몰두하는 우주 개발 시나리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한데 어지럽게 생각하다보면 <멜랑콜리아> 감독 라스 폰 트리에가 여러 차례 존경을 표했던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SF영화 <솔라리스> 속 피터르 브뤼헐의 <눈 속의 사냥꾼>과 지구에 대한 근심을 떠올리게 된다.
타르콥스키가 이콘 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전기영화를 만든 직후 만든 작품인 <솔라리스>에서 브뤼헐의 그림 사본은 솔라리스 행성 궤적을 도는 우주선 안 도서관에 다른 브뤼헐의 그림과 함께 걸려 있다. 카메라는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마지막 8분여 동안 루블료프의 이콘을 보여주었던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눈 덮인 마을로 사냥을 끝내고 돌아오는 세 사냥꾼을 전경에 담고 있는 브뤼헐의 그림을 보여준다. 타르콥스키는 <안드레이 루블료프> 말미의 촬영법 선택이 “자기 고유의 동적이고 정적인 규칙이 있는 회화를 영화로 옮기기란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감독은 그림 전체를 한숏에 담는 대신 숏 안에 그림의 세부를 확대했다. 카메라는 몇 시간 동안 스틸 이미지를 들여다보는 관객, 특히 성화를 바라보는 신도의 시선을 상상하며 세부 위를 움직인다. 그런데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도입부는 말미의 회화 시퀀스와 다른 형식, 특히 피터르 브뤼헐의 방식으로 회화적이다. 혹은 브뤼헐이 영화적 구성을 선취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도입부는 종교 갈등이 유럽을 분쟁의 회오리에 몰아넣었던 16세기 플랑드르의 세속적 풍경 속에 종교적 주제와 현대성의 형식을 구현했던 브뤼헐의 화폭을 떠올리게 한다. 농민들이 모여 있다. 열기구를 띄우기 위해서다. 그리고 영화는 열기구에 올라탄 농부의 시점으로 저 아래 대지와 군중을 내려다본다. 이 도입부 시퀀스의 숏, 앵글은 브뤼헐의 대형 화폭의 구성을 떠올리게 한다. 타르콥스키 영화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공중부양 모티프는 브뤼헐 화폭의 파노라마적 시선과 무관할까? 특히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공중부양 숏은 인간의 시선과 중력에서 자유로운 초월적 시선을 과시하는 오늘날의 드론 숏과 온전히 대조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보여준다. 타르콥스키의 숏은 세속 세계, 인간 세계, 물질 세계를 벗어나는 초월적 시선의 숏이 아니라 지상, 인간 신체, 흙의 세계에 묶인 물질적 시선의 숏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브뤼헐의 <이카루스의 추락>, 타르콥스키의 <솔라리스>를 오프 스크린의 형식을 공유하는 근대 예술로 꼽는 질베르토 페레스라면 <안드레이 루블료프> 도입부 공중숏의 시선을 “새롭고 세속적인 유령”의 시선으로 간주할 것이다. 브뤼헐의 <이카루스의 추락>은 초월을 갈구하며 태양에 다가갔던 이카루스가 바닷속으로 곤두박질한 장면을 한켠에 담고 있고,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농민도 열기구와 함께 대지로 곤두박질친다. 페레스가 보기에 브뤼헐 회화를 보는 관람객의 시선은 초월적 시선에 이끌리지 않고도 프레임과 의미의 바깥을 향한다.
<솔라리스>에서 도서관 속 브뤼헐의 화폭을 클로즈업으로 목격하기 전 관객은 이미 브뤼헐의 풍경과 유사한 크리스가 행성에 가져온 비디오 속 지구의 겨울 풍경을 여러 차례 목격한다. 눈 덮인 마을, 파노라마, 잎을 잃은 겨울 나무 가지, 놀이하는 아이 같은 이미지가 그렇다. 얼핏 보아 브뤼헐의 그림은 인간에게 과거의 억압, 죄의식, 기억을 재료 삼아 환각, 방문객, 유령을 불러내는 솔라리스 대양, 황량한 우주선과 대조되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특히 브뤼헐의 그림이 걸려 있는 도서관이라는 장소에 주목할 경우 그렇다. 도서관은 우주선에서 환각을 생산하는 대양을 마주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솔라리스 행성에서 죽은 과학자 기바리언은 지구를 그리워한 나머지 환풍기에 종이 끈을 매달아 나는 소리를 들었다. 종이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지구의 나뭇잎이 내는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뤼헐의 <눈 속의 사냥꾼>은 <솔라리스>에서 단지 이상적인 고향 지구를 표상하지 않는다. 오히려 브뤼헐의 풍경은 타르콥스키의 영화를 시간과 공간의 미로로 설명하는 나리만 스카코브의 주장대로 “솔라리스와 지구라는 두 공간의 현실을 연결”하는 데 사용된다. 이 연결은 궁극적으로 솔라리스와 지구 공간의 성격 자체를 바꿀 것이다. 이 그림은 지구, 솔라리스, 현재와 과거, 미래의 이들, “비영토적 방식으로 세계를 공유하는 이들이 함께”(질베르토 페레스) 모이도록 하기 때문이다. 2025년의 아포칼립스적 상상력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응시해야 할 이미지란 그러한 이미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