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프런트 라인
[비평] 기억의 육화, 육체의 산화, <되살아나는 목소리>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모녀 관계인 박수남 감독과 박마의 감독의 공동 연출작이다. 모녀가 공동 연출로 이름을 올리는 경우는 드물지만, 두 사람의 협업 자체에 의문을 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랫동안 재일조선인의 삶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박수남 감독은 황반부 변성증을 앓아 시력을 거의 잃게 된 데다 다큐멘터리를 준비할 무렵에는 뇌경색까지 겹쳐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박수남의 신체 곤경은 잠재된 필름을 되살려야 하는 충분하고도 절박한 이유가 된다. 이 과정에서 박수남의 여정을 함께하며 활동을 도와온 박마의의 역할이 강화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느껴진다.

오랫동안 방치된 필름을 꺼내 확인하면서 박마의가 질문하면 박수남이 이에 답하거나 박수남이 먼저 소리로 무슨 상황인지를 알아차리는 방식으로, 두 사람은 촬영본을 일일이 확인하며 작업한다. 다만 협업이 강렬한 불화로 시작된다는 점은 예사로 넘겨지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가족 이야기를 담을 때, 갈등을 전면화하는 경우는 흔하다. 대부분 내러티브의 필요에 의해 갈등이 배치되며, 더러는 리얼리티를 강조하기 위한 전략으로 삽입된다. 반면 <되살아나는 목소리>에서의 갈등은 서사로 수렴되지 않으며, 그렇다고 전략적인 배치는 더욱 아니다.

논쟁의 기록은 박마의 감독의 내레이션을 통해 어머니의 방대한 필름을 복원하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된 장면이라고 설명된다. 화면 속에서 두 사람은 다큐멘터리 작업의 의미에 관해 논쟁한다. 카메라 앞에는 박수남 감독이 앉아 있고, 카메라 뒤에서는 박마의 감독의 목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이유를 두고 논쟁 중이다. 박마의는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관람할 젊은 세대의 관객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박수남은 사실을 기록하는 것으로 의미가 충분하다고 여긴다. 논쟁의 맥락보다 인상적인 지점은 이 과정에서 나온 구체적인 말들이다. 하나는 자신을 어머니라고 지칭하는 박수남에게 박마의가 ‘엄마라고 말하지 말라’고 다그치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박마의의 ‘카메라는 곧 다큐멘터리를 관람할 관객’이라는 말에 대항해, 박수남이 ‘카메라는 나’이고 ‘내가 영화’라고 힘주어 말하는 부분이다.

전자가 인상적인 이유는 이 장면 전후로도 두 사람이 어머니라는 호칭을 자유롭게 주고받기 때문이다. 갈등이 빚어진 건 다큐멘터리 제작의 ‘계기’가 된 초반부이기에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어머니라는 호칭을 받아들였을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이 장면의 흥미로움은 단순히 사실관계의 확인으로 흩어지지 않는다. 둘의 논쟁은 이후 드러날 상호 부정과 인정을 오가는 박마의와 박수남 혹은 재일조선인 n세 가족 이야기를 요약한다. 박수남과 박마의는 각각 어린 시절 어머니를, 혹은 재일조선인 정체성을 부정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박수남 감독은 어머니를 무척 사랑했지만, 길에서 어머니가 공공연한 멸시를 받는 위험한 상황에 직면한 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잃었다고 말한다. 일본 학교에 입학한 박마의는 ‘박’이라는 이름 때문에 모욕과 차별을 당한 뒤, 전학한 학교에서는 일본 이름을 사용한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본명 선언을 하자 차별과 모욕은 다시 시작된다. 재일조선인 정체성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따로 생각할 수 없었던 성장기의 분투가 논쟁 장면 속 어머니 호칭의 거부와 받아들임 속에 축약되어 담긴다.

박수남 감독이 ‘카메라는 나’라고 말하는 대목은 카메라를 사이에 둔 다큐멘터리 감독과 대상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카메라는 나’이고 ‘내가 영화’라는 엄청난 말은 단지 오랫동안 다큐멘터리에 투신해온 감독이기에 할 수 있는 대담한 선언이 아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그 말을 할 때 박수남 감독이 점한 위치다. 그는 카메라 앞, 즉 자신의 삶을 증언하기로 결심하고 카메라 앞에 선 많은 인물이 거쳐간 자리에 앉아, ‘카메라는 나’이고 ‘내가 영화’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피해를 증언하려 아픈 기억을 꺼낸 한명 한명의 인물이 곧 카메라이자 영화라는 말처럼 들린다. 카메라가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한다는 믿음이 작동한 시기를 지나, 90년대 이후 ‘카메라를 든 나’로서의 감독 개인의 시대를 맞이했다면, 박수남의 말은 그 이후를 생각하게 한다. 박수남은 대상을 매개하거나 바라보는 시선으로 존재하기를 거절한다. 그의 영화에서 카메라, 대상, 나, 감독, 관계라는 개념을 따지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카메라 앞의 대상이 곧 카메라이자 영화라는 사실은 그의 영화 속에서 비로소 온전해진다. 카메라-대상들은 ‘(침탈의 증거를) 보여달라면 보여줄 수도 있지만’ 보는 것만으로는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존재로 존중받는다.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가해자를 비추지 않는다. 투쟁하는 영화에서 가해자가 등장하지 않는 건 이례적이다. 물론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가해자는 억압과 차별, 학살로 점철된 역사를 부정하고 책임을 회피하기 급급한 일본 정부다. 가해자에 대한 배제는 적을 가시화하는 데 비정상적으로 몰두하는 영상 시대에 대한 역행이다. 적을 가시화하고 구체화하는 일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더러는 자극적인 유희에 지나지 않을 때도 있다. 가해자 색출 욕망은 피해자를 화면 밖으로 완전히 제거하는 극단적인 방식에 가닿는다. 조너선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일상을 영위하는 가해자에만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피해자의 이미지를 화면에서 몰아낸다. 이는 우리 시대가 학살의 역사를 예술적으로 소비하는 전형적 태도다. 영화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건 단지 제스처에 불과한 윤리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보이는 건, 보고서야 믿느냐는 비판을 등에 업고,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오만함이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빼앗긴 피해자의 자리를 다시 여기로 불러들인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전하는 가운데 이들의 고통과 투쟁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임을 밝힌다. 피해를 증언하는 목소리는 다른 누군가의 방해로 중단되지 않는다. 혐오의 말이나 모욕은 인용의 형태로만 표출된다. 가해자가 등장하지 않는 영화는 ‘카메라는 나’라는 박수남 감독의 말이 가닿은, ‘카메라는 대상’이라는 유추를 뒷받침한다. 영화는 피해의 증언과 남은 싸움을 보여주지만, 이들이 마주한 무례를 담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카메라와 필름의 얼굴과 목소리는 남김없이 피해자들에게 주어야 함을 믿듯이 말이다. 일본에서 박수남 감독의 전작 <침묵>(2016)이 상영될 때 극장 근처 거리에서 발생한 헤이트스피치(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발언)에 관해서도 사실만을 내레이션으로 전할 뿐, 그 내용을 굳이 들려주거나 번역하지 않는다. 다만 그에 대한 명확한 거부로 울려 퍼진 목소리는 생략하지 않는다.

가해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을 누군가는 의아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인 이진우는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인물이다. 그의 인생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그는 가해자도 되고, 피해자도 된다. 그는 1958년, 일본 여학생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4년 만에 사망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정신감정이나 소년법 적용을 받지 못했으며, 집행 속도는 유독 빨랐다. 이 모든 차별의 이유는 그가 재일조선인이었기 때문이다. 박수남 감독은 이진우가 죽기까지 2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교도관의 말 없는 배려로 30분으로 늘어난 면회 시간을 활용해 조선의 역사와 언어를 가르치며 누나, 동생으로 서로를 칭하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박수남의 노력으로 이진우는 조선인의 정체성에 조금이라도 다가간 채 죽는다.

이진우의 존재가 불편한 이유는 그가 성폭력과 살인의 당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가 관객 역시 그의 삶과 연루되어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해자의 삶에 동화되는 만큼 가해자라는 자각을 요구받는다.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할 때만 우리는 피해의 역사를 마주할 수 있다. 가해는 살인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무지에 있다. 박수남은 이진우가 잔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유가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 믿는다. 그가 진심으로 뉘우치게 만드는 일에 전부를 걸었고, 그것이 이진우에 의해 살해된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진실한 속죄라 믿었다. ‘고마쓰가와 사건’을 복기해야 하는 까닭은 그 일이 박수남 개인과 재일조선인 커뮤니티에서 결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국가의 역사에 무심한 누구라도 피해의 역사에 대한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은 피해자, 일본은 가해자가 아니라 한국은 피해의 역사를 지닌 민족이고, 일본은 가해의 역사를 지닌 민족일 뿐임을 강조한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깊이 고민했는가의 여부에 따라 피해와 가해의 위치는 이동한다. 박수남이 만난 인물 중에는 재일조선인의 피해를 증언한 일본인과 재일조선인 차별에 목소리를 높인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존재한다. 시간을 거슬러 가면 박수남의 아버지가 간장 공장에서 일하면서 공부하던 유학생 시절, 학살의 위기에서 그를 구해준 일본인들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에서 복무했던 일본인은 동료였던 조선인을 스파이로 몰아 처단한 참상을 목격했고 이를 증언한다. 한국인 피폭자, 특히 국외 거주자를 차별하는 회사와 정부에 맞서 함께 싸운 활동가는 어렵게 피폭자 건강 수첩을 발급받은 피해자가 얼마 써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을 당사자만큼이나 안타깝게 여긴다. 박수남은 과거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준 일본인이 자신의 목숨까지 살린 것과 다름없음을 잊지 않는다.

필름의 기억과 디지털 육체

디지털로 복원하지 않으면 사라질 위기에 처한 10만 피트, 50시간 분량의 필름은 늙고 노쇠한 몸, 혹은 쇠락하는 기억의 상태를 매개하는 물질처럼 느껴진다. <군함도> 촬영본을 보고 박마의는 칠판에 적힌 글씨라고 생각했지만, 박수남은 칠판이 아니라 벽이라고 고쳐 말한다. 기억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벽을 칠판으로 오인하게 됨을 의미한다. 역사를 망각한 훗날에는 적을 수 있는 도구를 허락받지 못한 이가 벽에 쓴 절박함을 고대 종족이 남긴 신기한 언어처럼 바라볼 수 있다. 군함도에서 강제 노역을 살며 엄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을 수용했던 숙소는 낡아 떨어지고 무너진 폐허가 되었지만, 고향과 이름과 메시지를 적은 글씨나 그림은 박수남의 복원된 필름과 함께 살아남았고, 그 흔적은 새로운 인류가 탄생한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영속할 것이다.

디지털화된 세계 속 군함도는 두개의 미래를 마주한다. 하나는 도쿄 거리 전광판에서 강제 노역을 부정하는 홍보 영상으로 조작되거나, 극장이 아니더라도 소규모 상영을 지속하며 진실을 전한다. 국가가 기획하고 승인한 홍보 영상 뒤편의 가해자는 거리를 스치는 행인들의 무의식을 노린다. 여기에 대항하는 일은 두 감독처럼 멈춰서 그것을 똑똑히 바라보는 데 있다. 기획된 진실을 세뇌하는 화려한 거리가 내세운 전략 반대편에, 디지털로 복원된 필름 영상을 상영하는 소규모 상영회가 자리한다. 그 영상은 감응하는 얼굴을 요청한다. 군함도 생존자 서정우씨의 이야기는 프로젝터를 통해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눈물 젖은 얼굴과 교차하며 다음 세대에게 기억을 이식한다.

영화는 민족의 한을 구전하는 몇개의 노래를 들려준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금을 울리는 건 <봉선화>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로 시작하는 익숙한 그 노래에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학살 현장을 방문한 뒤에는 꼭 그 노래를 불렀다’는 박수남 감독의 설명 때문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촬영은 조선인 학살을 증명하는 그림이 발견된 2023년의 어느 날이다. 가로로 넓게 펼쳐진 대형 그림 속에는 민관이 합심해 조선인을 색출하고 죽인 참상이 낱낱이 담겨 있다. 그리고 박수남의 목소리로 녹음된 <봉선화>가 들려온다. 그 순간 지금까지 본 모든 것이 곧 학살의 현장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는 곧 학살의 장소로서 상흔이 남은 몸과 기억의 증언이다. 피폭으로 한쪽 눈을 잃은 옆얼굴, 굽어 펴지지 않는 손가락, 할 말이 너무 많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순간의 떨림, 언젠가 돌아가기를 꿈꾸며 이름과 고향과 넋두리를 적은 다 허물어진 벽, 무연고자의 묘지와 비석 뒤 빼곡히 적힌 이름들, 바다와 하늘은 고향까지 이어졌을 거라 믿으며 뛰어들었던 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저장된 두개의 육체가 있다. 낡은 필름과 박수남의 정신. 기억을 이식할 새로운 육체를 찾을 때까지, 절대로 산화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목소리와 함께.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