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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살며 관찰하며 지지하며, <룸 넥스트 도어> 배우 줄리앤 무어
정재현 2024-10-31

불안과 우울에 사무치는 연기로 줄리앤 무어를 넘볼 자가 있을까? 그는 수많은 작품에서 스틸레토힐을 신은 채 유리로 만든 바닥을 질주하는 듯한 여성을 연기하며 스크린에 위태로운 균열을 내왔다. 올해 초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신작에 줄리앤 무어가 캐스팅됐다는 뉴스가 들리자, 평자들은 검붉은 죄의식에 사로잡힌 여성들을 일관되게 포착해온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줄리앤 무어를 만나 얼마나 위험한 영화를 만들어낼지 기대하며 군침을 흘렸다. 하지만 <룸 넥스트 도어> 속 줄리앤 무어는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사려 깊다. 그가 분한 잉그리드는 수십년 만에 만난 친구 마사(틸다 스윈턴)가 죽음을 향해 위엄 있는 행진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인 동시에 상대의 말에 진심 어린 반응으로 화답하며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흐름을 보조하는 훌륭한 말 상대다. <씨네21>이 국내 언론 중 단독으로 줄리앤 무어와 일대일 인터뷰로 만났다. 잉그리드 못지않은 대화의 명인인 줄리앤 무어가 영화, 연기 그리고 삶에 대해 느끼는 진심을 전한다.

SHUTTERSTOCK

-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으로부터 처음 출연 제의 이메일을 받은 후 그의 집에서 첫 미팅을 했다고 들었다. 그날의 기억을 들려준다면.

지난해 이맘때쯤 리허설을 위해 처음 페드로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그의 집은 ‘색들의 폭발’이라는 설명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탐미적 컬러 조합으로 배치된 러그와 의자가 있고 선홍빛 부엌을 지나면 집 안 곳곳엔 수많은 책과 DVD, 작은 피규어들이 쌓여 있다. 스피커에서는 장엄한 오페라가 흘러나오고, 집 전체의 조도는 약간 어둡다. 페드로가 만든 수많은 영화 속 세트를 방문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집을 다녀온 이후 페드로의 영화가 무척 사적이란 것을 깨달았다. 페드로가 사랑하는 색과 물건, 좋아하는 음악이 그의 작품에 빼곡하고 그가 삶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캐릭터가 등장한다. 페드로의 영화와 그의 인생이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 잉그리드는 좋은 대화 상대다. 마사나 데이미언(존 터투로)과 이야기를 나눌 때 늘 경청하고, 두 사람이 어떤 폭탄 발언을 하든 우선 수용하는 자세를 보인다. 수많은 대화 시퀀스를 연기할 때 염두에 둔 잉그리드의 태도가 있나.

잉그리드의 직업이 작가라는 점이 주효했다. 잉그리드는 사람을 관찰하는 일에 익숙하다. 달리 말해 대화를 주도하거나 대화 사이에 자신의 말을 끼워넣으려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특히 마사처럼 특수한 상황에 놓인 친구와 대화할 때 잉그리드는 상대가 무슨 주제를 꺼내놓고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는가에 관심이 많다. 그는 작가로서 논점에서 벗어난 대화를 용납하지 못한다. 이를 위해 보통 사람들보다 더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며 대화의 흐름이 깨지지 않도록 상대를 지켜보고 기다린다.

- 듣다 보니 타인을 관찰하는 자세는 배우가 배역에 접근하는 방식과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이다. 배우는 타인의 행동을 불가피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기표(記標)를 읽어내는 일에 가깝다고 할까. 내가 관찰 중인 상대는 왜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지, 어쩌다 이런 행동을 이행하는지 그 의미를 늘 고민한다. 하지만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타인을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상대의 인생에 지지를 보내는 일은 배우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하고 흥미로운 작업이다. 누군가의 심연을 응시하고 그들의 생각과 말을 나의 표현으로 돌려주는 일은 연기든 대화든 매한가지다. 우리는 스스로를 잘 모르지 않나. 살다 보면 내 이성과 감정을 분간하지 못할 때도 많고. 하지만 나를 향한 타인의 반응을 통해 비로소 ‘내가 지금 이런 감정을 느끼는구나’ 혹은 ‘내가 미친 게 아니었군’이라며 자신의 처지를 객관화할 수 있다. 인간은 그렇게 서로를 도우며 살아간다.

- 영화 초반 잉그리드는 죽음을 비정상적 상태로 인지한다. 하지만 친구 마사가 자발적 안락사를 결심하자 마다하지 않고 그 여정에 동행한다.

좋은 친구가 되고자 하고, 본인이 추구하는 인도적 견지를 행동으로 이어가려는 열망이 죽음에 대한 잉그리드의 두려움을 넘어섰다. 잉그리드는 여전히 죽음을 공포의 존재로 여기지만 그럼에도 진정한 인간애에 도달하기 위해 두려움을 무릅쓰려는 의지를 보인다. 잉그리드는 도움이 필요한 누구에게든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이다.

- 여정의 끝에서 잉그리드는 죽음을 전과 달리 인지하게 됐을까.

이 정도의 강렬한 체험을 지척에서 경험했다면,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잉그리드가 그걸 모르고 마사와의 여정에 뛰어들었을 리 없다. 앞으로도 무섭고 어려운 상황이 삶에서 닥칠 테지만, 적어도 난관에 맞서는 능력이 생겼음을 자각할 것이다. 영화 후반 잉그리드가 데이미언에게 “비극 속에서 사는 방법은 아주 많거든. 당연히 고통스럽지. 하지만 견딜 수 있어”라고 일갈하는 대사가 이를 방증한다.

- 공동 주연배우인 틸다 스윈턴과 카메라 밖에서도 수많은 대화를 나눠 알모도바르 감독이 촬영 막판엔 “아직 말할 주제가 남았나?”라고 말할 정도였다던데. 스윈턴과 어떤 시간을 보냈나.

틸다는 훌륭한 대화 상대이자 이야기꾼이고, 쉽게 마음을 열고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나는 틸다가 비밀스러운 사람이 아니라서 좋다. 내가 비밀이 많은 사람들을 좀 어려워하거든. (웃음) 상대가 속내를 다 털어놓는 것까진 바라지 않지만, 비밀뿐인 사람을 볼 때면 그들의 미스터리에 매혹되기보다는 오히려 ‘왜 저럴까?’ 하며 주저하게 된다. 틸다와 나는 서로에게 관심이 깊었고 삶의 일부를 공유하길 몹시 즐겼다. “그 신발 어디서 샀어?” “네가 쓰는 정원 호스 나도 알려줘”와 같은 사소한 정보 공유부터 각자 자녀의 진로나 노후 대비 등 무궁무진한 대화가 프로덕션 내내 이어졌다. 이번 작업을 통해 틸다와 정말 좋은 친구가 됐다. 아직 틸다와 못다 한 이야기가 많다.

- 평소에도 카메라 밖에서 동료와 맺은 관계가 자연히 연기에 반영된다고 믿는 편인가.

당연히. 카메라 안팎에서 함께하다 보면 친밀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서로를 정서적으로 편하게 느끼면 촬영 현장에서 긴장이 풀리고 신체적으로도 편안함을 느껴 행동이 한결 자연스러워진다. 과소평가할 수 없는 영역이다.

- 인장이 확실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미술 세계가 어떤 자극을 주었나.

미술과 의상은 그 자체로 페드로의 언어다. 페드로의 드높은 미적 감각은 배우를 즐겁게 한다. 페드로는 내가 녹색 터틀넥을 입으면 틸다는 푸른 재킷을 입게 했다. 이미 그 대비만으로 멋진 구도인데 카메라까지 켜지자 ‘세상에, 우리가 페드로의 세계로 들어왔어! 우리가 페드로의 머릿속에 있어!’라는 느낌을 받았다. 페드로의 세계는 마법 같고 또 동화 같다. 우리의 눈이 회색빛으로 일상을 본다면, 페드로의 눈은 총천연색의 테크니컬러로 세상을 감각한다. 그 세계 안에 발을 디디는 순간 새로운 눈이 열리고, 말초적이라 오히려 인간적인 감정이 내 깊은 뿌리를 자극한다. 관객이 페드로의 영화에 느끼는 반응과 비슷하다. 일상의 삶과 거리를 두는 상상적인 세계가 펼쳐지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감정의 근원만은 관객의 마음에 특별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가닿듯 말이다.

-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소설 <죽은 사람들>의 결말부가 영화 속에서 세 차례 인용된다. 잉그리드는 소설 속 문장을 변주한 대사를 마지막 장면에서 낭송한다. 독백인 듯 편지인 듯 쓰인 대사를 처음 읽었을 때 느낀 감상이 궁금하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동시에 한 공간에 존재한다는 개념으로 죽음을 노래하다니. 서로 분리돼 있는 듯 느껴지지만 실상 죽음이 얼마나 삶에 맞닿아 있는지를 깨우치게 만드는 구절이었다. 죽음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많은 예술가들이 지속적으로 영화나 문학, 연극 등의 방식으로 죽음을 탐구해온 까닭도 이에 근거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 삶이 일시적이라는 명제는 받아들이지 않나. 삶은 일시적이지만 죽음은 영원의 상태다. 그래서 죽음은 삶이라는 임시적 상태의 다음 층계다. 영원에 진입하기 이전 단계, 곧 유한과 무한의 이음매에서 벌어지는 일을 제임스 조이스가 묘사한다. 눈은 내리고, 새들은 노래하고, 밤이 찾아오고, 해는 다시 떠오른다고. 이 개념을 작품 속 캐릭터들이 온전히 앓도록 만든 페드로의 선택이 놀랍다. 영화 속 일원으로 참여해 연기를 하면서도 이 시구가 등장하는 순간만큼은 나 또한 영화 속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룸 넥스트 도어>엔 죽음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삶을 긍정하고 인생을 낙관한다. 영화를 촬영하며 죽음과 삶에 대해 새로 깨달은 진리가 있나.

오히려 인생으로부터 배운 교훈이 더 크다. 지금 내 나이에 이르기까지 겪은 모든 상실과 환희, 집 안에선 가족의 일원으로 기능하다가도 집 바깥에선 배우로 활동한 모든 시간이 나를 구성하는 재료가 됐다. <룸 넥스트 도어>의 잉그리드는 내가 삶에서 배운 수많은 가치를 표현할 기회였다. 이 작품을 촬영하며 명상의 과정을 떠올렸다. 상념을 정제한 후 거기서 출발한 영감을 고양하는 게 명상 아닌가. <룸 넥스트 도어> 또한 나와 당신이 살면서 세공해낸 모든 깨달음을 스크린에 확장, 투사하는 영화다.

줄리앤♥틸다

수많은 미국 독립영화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인 두 배우가 한 작품에 출연한 건 놀랍게도 <룸 넥스트 도어>가 처음이다. 단편영화 <휴먼 보이스>(2020)로 한 차례 틸다 스윈턴과 작업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룸 넥스트 도어>의 시나리오를 스윈턴에게 이메일로 보내며 “내가 생각해둔 배우가 있긴 하지만 다 읽은 후 누가 잉그리드를 연기하면 좋을지 회신해주세요”라고 적었다고 한다. 스윈턴은 읽자마자 단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고, 그 이름이 알모도바르가 염두에 둔 배우와 다를까 초조했다. 스윈턴이 답을 적은 메일의 전송 버튼을 누른 동시에 알모도바르로부터 추가 메일 한통이 도착했다. 두 메일엔 똑같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내가 생각한 이름은 줄리앤 무어입니다.” 스윈턴은 “줄리앤과의 협업은 축복”이라며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그동안 줄리앤과 영화제 파티장의 복도에서 몇번 스친 게 전부였다. 그때마다 줄리앤도 나도 서로 함께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는 좋은 직감을 동시에 느꼈다. 우리는 금방 좋은 친구가 됐다. 마침 동갑이어서 서로 공감할 수 있는 화젯거리도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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