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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ters’ talk] ‘장르의 규칙을 사수하되 자기복제의 덫을 피하기,’ <베테랑2> 류승완 감독, 시리즈 한준희 감독을 만나다
남선우 사진 백종헌 2024-10-04

류승완 감독이 인용한 이명세 감독의 말에 따르면 형사와 영화감독은 제법 닮은꼴이다. 양쪽 다 목표물을 쫓아 밤낮없이 일하고, 납득할 만한 시나리오를 필요로 하며, 체력과 협력이 관건이다. 두 직업은 자주 낭만화되어 누군가의 설익은 꿈이 되기도 한다. 바람이 적당한 공력을 만나서 무르익을 때, 선배들은 좋은 영향을 받고 자란 새 형사와 감독을 환영할 수 있다.

한쌍의 감독들에게 그 만남의 때가 왔다. <베테랑2> 초반부, 서도철(황정민)이 박선우(정해인)를 ‘내 과’라고 칭했듯, 류승완 감독이 언젠가 대화하길 고대한 후배를 콕 집었다. 신입 형사 역에 정해인을 캐스팅하기까지 한몫을 단단히 한 <D.P.> 시리즈의 연출자이자 학원 액션의 혈기를 소환한 <약한영웅> 시리즈의 크리에이터, 그리고 올여름 유의미한 박스오피스 성적을 거둔 영화 <파일럿>의 제작자인 한준희 감독이다. 류승완 감독의 팬을 자처하며 부름에 응한 한준희 감독은 자신의 감상을 바탕으로 <베테랑2>의 거름이 된 창작자의 속내를 물었다. 그 대답은 영화 개봉 4주차를 지나는 시점에 한번 더 고개를 끄덕여보게 하는 밀도를 지녔다. 덕분에 액션, 윤리, ‘영화적인 것’이라는 주제를 넘나들며 문답이 이어졌다. 그 틈으로 “안락한 내리막길을 걷기보다 가시밭길이라도 약간 더 올라가보고 싶은” 두 사람다운 고백들이 새어나왔다.

한준희, 류승완(왼쪽부터)

류승완 <베테랑2>에 어떻게 정해인 배우를 캐스팅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프로듀서로 참여한 <시동> 때문이었다고 얘기해왔지만 사실 <D.P.> 덕도 컸어요. <D.P.>는 공교롭게도 저와 <모가디슈>를 함께한 구교환 배우가 어떻게 연기했는지 궁금해 보기 시작했다가 정해인 배우에게 완전히 빠져들게 한 드라마예요. 한준희 감독의 <차이나타운>도 너무 좋아하고, <뺑반>도 재밌고, 심지어 최근에 저와 인연이 많은 고민시 배우가 출연한 삼성전자 단편영화 <S24 Hours 무비 시리즈>도 잘 봤어요. 어떻게 짧은 시간에 세 가지 이상의 장르를 뒤섞어 영화를 만들었지? 정말 바짝 긴장해야겠다고 생각했죠.

한준희 제 작업은 늘 감독님의 자장 아래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거든요. <S24 Hours 무비 시리즈>에서 고민시 배우가 했던 액션도 사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피도 눈물도 없 이> 같은 작품들에서 영감을 얻었고, 그동안 작품을 해오면서 감독님처럼 복싱 베이스 액션들을 많이 했어요. <D.P.>에서 (정)해인씨가 했던 액션도 그렇고요. 물론 <주먹이 운다>도 있지만 제가 감독님 작품 중 가장 인상 깊게 봤던 복싱 베이스 액션은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정재영 배우가 했던 액션이에요.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어요. 영화가 나온 지 10년도 넘었지만 지금도 액션 디자인을 할 때 연출부에 <주먹이 운다> 속 감정을 예로 들고, 알게 모르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의식하며 만들어왔죠. 류승완 감독님의 ‘찐팬’으로서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영광입니다.

류승완 액션영화를 만들면서 복싱 베이스 장면을 연출할 때 애를 먹는 것이, 우리가 가진 팔다리 두개씩을 갖고 움직임을 구성해야 하는데 테크닉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에요. 단조로울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컷을 다양하게 구성하거나 화려한 테크닉을 동원하려는 욕망에 빠질 수 있죠. 그런데 <D.P.>는 그걸 안 하더라고요. 인물들이 어디서 어떻게 싸우는지가 명확히 보여서 관객으로서 볼 때 시원했어요. 한준희 감독이 앞으로는 어떤 작품을 보여줄지 기대돼요.

쾌감과 윤리 사이에서

한준희 흔히 형사영화, 경찰영화라고들 하죠? 감독님 작품도 액션의 자장 안에서만 얘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특히 이번 <베테랑2>는 결말로써 경찰영화에 한획을 그었다고 봐요. 장르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장르적 쾌감을 좇으며 길을 갈 수밖에 없고, 당연히 그걸 지향해야 하지만, 어쩌면 감독님이 마지막에 서도철이 박선우를 심폐소생하는 장면을 넣은 것이 이 작품을 만든 이유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었어요. ‘괴물을 잡기 위해 괴물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라는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괴물을 잡기 위해 괴물이 되어야 한다’라는 이야기가 주는 쾌감이 결코 옳은 게 아니라고 말하는 영화적, 장르적 윤리가 느껴져서 그 장면이 좋았어요. 서도철이 그런 선택을 해버리는 순간, 감독님이 선배로서 이 장르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말해주는 느낌이 들어서 감동하면서 엔딩을 봤어요.

류승완 제가 지금 약간 소름이 돋을 정도예요. 아무래도 같이 창작을 하는 입장이다 보니 한 감독이 제 의도를 짐작해주는 것이, 이렇게 정곡을 팍팍 찌를 수 있을 만큼 깊이 감상해준 것이 너무 고마워요. 말씀하신 그 장면은 속편을 만들기까지 9년이 걸린 이유와도 맞닿아 있는데, 전편 <베테랑>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정도의 성공을 거두니 좋으면서도 겁이 났어요. 그전까지 그 정도 크기의 대중적 성공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어요. 숫자가 주는 부담감이 생겼죠. 웬만한 유럽 국가의 국민 수보다도 많은 관객이 <베테랑>을 본 거잖아요. (<베테랑>은 2015년 개봉 당시 약 1341만 누적 관객수를 기록했다.-편집자) 그런데 막 자랑하고 싶어지는 게 아니라 덜컥 두려웠어요. 실은 1편을 만들 때 워낙 호흡이 좋아서 손익분기점만 넘으면 2편을 만들자는 무언의 약속이 있었어요. 크랭크업하자마자 의상팀에 서도철 형사의 옷을 잘 보관해달라고 부탁까지 했었죠. 현장 분위기가 좋다보면 속편 아이디어가 오갈 때가 종종 있잖아요. 그래도 그렇게 구체적으로 뭘 준비한 건 처음이었어요. 하지만 모두 그 속편이 나오기까지 9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고, 거기엔 제 책임이 제일 크겠죠? 너무 큰 성공을 거둔 영화의 다음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대한 부담에 더해 시간이 흐를수록 일종의 정의 구현을 해 관객에게 쾌감을 주는 영화와 드라마가 많이 나왔잖아요. <베테랑>이 굳이 비슷한 통쾌함을 주는 대열에 합류하는 건 의미가 없겠다, 다른 것을 해야겠다 싶었죠.

그 다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는데, 결국 시리즈물의 관건은 주인공의 매력에 있잖아요. 주인공이 관객에게 얼마나 응원받을 수 있는지가 중요하죠. 속편이 나오기까지 5년이 지난 이상 꽤 긴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주인공이 어떻게 변했을지를 고민해봐야 했어요. 실제 시간의 흐름도 무시할 수 없으니 5년이 지나고부터 그게 신경 쓰이더라고요. 그런 장르적 고민부터 시작해 영화 외적인 환경을 생각했어요. 서도철이라는 서민 영웅이 갖는 의미, 형사영화의 역사 속에서 우리 영화가 갖는 개성을 고민하다 생각한 것은 윤리와 도덕의 문제였어요. 고리타분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일을 하면서 자기만의 원칙을 지키는 자의 미덕이 더이상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런 가치가 무너지니 사회가 더 혼탁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죠. 게다가 서도철이 지키려는 건 세계평화가 아니라 자신과 가족의 일상인데, 이 일상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개인의 삶은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말하고 싶었어요. 더불어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어른은 얼마나 고귀한가를 묻고 싶었죠. 그렇게 9년이 흐르는 동안 여전히 거칠지만 관객에게 응원받을 만한, 반보의 성장이라도 이룬 서도철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 것 없이 장르적 쾌감만을 좇기엔 이미 너무 잘 만들어진 장르영화들이 많아 자신이 없더라고요.

한준희 영화적 윤리와 영화적 쾌감은 같이 가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베테랑2>는 감독님이 말씀하신 지점을 다 구현하면서도 영화적 쾌감이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프닝 시퀀스도 그렇고, 메인 테마가 나오는 순간 관객이 영화에 집중하게 하죠. 정해인 배우가 보여주는 계단 액션 신이나 빗속에서 안보현 배우가 슬라이딩하는 장면들은 벌써 회자가 되고 있고요. 지난해 개봉한 <밀수>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류 감독님은 해보지 않은 장르의 액션을 계속 개발하려 노력하는데 나는 오히려 반복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어요.

류승완 과찬의 말씀이고요, 다른 재주가 별로 없으니 액션을 찍을 때만큼은 기를 쓰고 다른 방향으로 비집고 들어가려 합니다. (웃음) 방금 한 감독이 얘기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제게 <D.P.> 시즌2가 무척 흥미로웠는데, 한 감독은 <D.P.>의 성공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럼에도 극이 흘러갈수록 ‘이런 선택을 한다고?’ 싶은 지점이 많았어요. 감독은 그 길이 가시밭길이라는 걸 알았을 텐데 말이죠. 시리즈가 응원받을 수 있는 포인트는 명확했잖아요. 주인공들을 방해하는 자들만 시원하게 제거해줘도 성공이 보장되는데, 전편에서 다룬 쟁점을 확장해서 주인공들이 그들을 둘러싼 세계, 그러니까 시스템과 대결하는 구도로 이야기가 펼쳐지기 시작할 때 이 감독은 믿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자기 성공을 재탕하려는 욕망에 빠지기 쉬운데, 한준희 감독은 성공을 자신이 본질적으로 가보고 싶었던 여정의 발판으로 삼는 유형의 연출자라는 점이 흥미로웠거든요. 저도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었으면 해요. 안주하는 순간 죽는다는 생각이에요.

한준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류승완 진심이에요. 저도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해봤지만, 우리가 사실 다 알잖아요. 성공 패턴에 안주하면 당대에는 주목받을 수 있고 주머니도 두둑해질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걸어가고 있다라는 걸요. 우리는 안락한 내리막길을 걷기보다 좀 가시밭길이라도 약간이라도 더 올라가보고 싶은 생각이 있잖아요?

한준희 감독님이 서도철 형사의 성장을 고려했듯, 제가 <D.P.> 시즌2를 할 때도 안준호(정해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뀔 거라는 짐작을 했었어요. 그의 생각과 상황이 바뀌었으니 해야 할 일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서도철은 직관적으로 얘기하잖아요. 나쁜 놈이 죽는다고 모두가 통쾌하고 유쾌한 게 아니라고. 그런데 많은 장르영화에서 그런 죽음들을 개의치 않아요. 감독님은 이런 종류의 대중영화에서 어떠한 장르적 쾌감보다도 ‘이야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려는 게 느껴졌어요. 대중영화를 할지언정 그 가운데서 무언가 논의할 거리를 던지는 게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류승완 1편을 만들 때만 해도 내 안의 분노를 일으키는 사건들을 조합해 영화 안에서라도 정의를 구현하고, 대리로 복수해서 관객에게 쾌감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어요. 그 마음이 컸고, 대중이 거기에 반응해줬죠. 그 이후에도 어떤 사안의 가해자를 비난하며 감정적인 반응을 했던 적이 있는데, 시간이 흘러 진실을 보니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적이 몇번 있었어요. 제가 당사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판단하기 좋았던 거예요. 그리고 더 섬뜩했던 건, 제가 처음 가해자라고 믿은 대상에게 퍼부었던 만큼의 비난을 실제 가해자에게 하고 있지 않더라고요. 이미 그 분노의 온도가 식었으니까요. 그러면서 내 안의 분노가 과연 정당한지 묻게 되었어요. 제가 만든 영화 중 <부당거래>도 일종의 분노 마케팅을 해버린 거란 말이죠.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는 표현 뒤에 숨어서 더 중요한 문제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어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주인공 가족도 자신들이 악을 저지른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들에게는 나치의 기준이 사회정의였으니까요. 시간, 지역, 문화에 따라 정의의 개념이 달라질 수 있는데, 내 안의 가치관이 생겨서 그 선을 넘을 때 분노하는 게 옳은 걸까 의문이 들었죠. 내가 가진 정의의 개념 자체가 잘못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저는 요즘 너무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무섭거든요. 저 스스로도 확고한 신념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좋은 장르영화 중에는 시원하게 마침표, 종지부를 찍어주는 영화도 있지만 우리에게 물음표를 던져주는 영화들도 있잖아요. 예를 들면 <기생충> 같은 영화가 훌륭한 미스터리 서스펜스 스릴러면서 물음표를 던져주는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능력은 부족하지만 <베테랑>이라는 전작의 힘, 그리고 9년이 흐른 만큼 어떤 식으로든 성장했을 대중들을 믿었죠. 그래서 제가 택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도 소통의 방법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한준희 그 의도가 장르적 쾌감이 거세된 채작품에 들어갔다면 관객의 동의를 얻어내기 어려웠을 텐데, 우리가 한번도 보지 못한 액션 시퀀스와 정해인, 안보현의 새로운 얼굴이 군데군데 드러났어요. 그래서 저는 충분히 가볍고 경쾌한 마음으로 극장에 가서 <베테랑2>를 봤는데, 내 안에 있던 <베테랑> 시리즈에 대한 인식 위에 감독님이 말씀한 의도가 더해지는 경험을 했어요. 제가 기대한 극장 경험을 하면서 나온 거죠. 그런 기회를 주는 영화가 많이 적어진 것 같아요. 모처럼 많은 분들이 보게 될 추석 시즌 영화가 이런 의미도 같이 가져갈 수 있어서 저는 너무 좋고 부럽네요.

고전적 영화의 확실한 매력

류승완 관객들이 그렇게 반응해주신다면 영화를 만든 사람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겠지만 저는 400석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면 401편의 영화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영상과 음성이라는 물질 체계로 된 영화가 있고 관객 각자의 마음속에도 영화가 다 다르게 자리 잡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영화를 가벼운 장르영화로 보셔도 무방해요. 영화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관객도 있고 영화에 실망하는 관객도 있겠죠. <베테랑2>가 조금 다른 길을 선택했음에도 잃지 않으려 한 게 있긴 해요. <베테랑>의 주인공들을 다시 끌어온 작품이기 때문에 전작을 응원한 관객들에 대한 최소한의 서비스는 있어야 했죠. 그래서 전작의 경쾌한 방식대로 오프닝 시퀀스의 팀플레이를 선사한 후 본격적인 얘기로 들어가길 택했어요. 무엇보다 여전히 액션영화를 관람하는 걸 좋아하고, 액션영화 만들기에 갈증을 느끼는 저로서는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고 재밌는 액션을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거든요. 영화는 사실 현실을 모사하는 것에서 출발하잖아요. 유튜브의 시대에는 이종격투기 경기도 쉽게 접할 수 있고, 길거리 싸움, 경찰이 범인 검거하는 영상도 많이 볼 수 있잖아요. 카체이스 신도 실제 교통사고 블랙박스 영상만큼 서스펜스가 있을 수 없고요. 우리가 촬영 현장에서 “이게 진짜 같아?”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하고, 가짜 같을 때 엔지를 내는 거잖아요? 사실 우리는 다 가짜를 갖고 사기 치는 사람들인데, 관객이 극장에서 느끼고 싶어 하는 현실감을 가장 최전선에서 고민하는 장르가 저는 액션이라고 생각해요.

한준희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아요.

류승완 오히려 호러는 장르만의 익스트림한 지점이 있어서 그 자체를 관객이 잘 받아들이고, 코미디도 배우가 연기로 잘 구현만 하면 현실과의 경계를 넘나드는 턱이 낮아질 수 있어요. 그런데 액션은 배우들이 진짜로 치고받을 수 없지만 진짜로 치고받는 것처럼 관객이 느껴야 해요. 그 안에서 관객이 품을 감정의 흐름까지 리드해야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저는 어떻게 액션을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이 크죠. 답은 저도 모르고, 이전에 했던 것을 반복하지 않으려 할 뿐이지만 경력이 쌓이면서 데이터가 생기는 건 좋은 것 같아요. 실수한 것과 상대적으로 잘한 것들을 갖고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취사선택하는 거죠.

한준희 이제 모두가 OTT, 특히 유튜브와 경쟁할 수밖에 없는 시대인데, 그렇다면 무엇이 영화적인지를 제 또래 감독들과 많이 이야기해요. <베테랑2>를 보면서는 오프닝에서부터 완벽한 블로킹에 반했고, 각 프레임이 어떤 정보를 어떻게 보여줄 건지를 컷 바이 컷으로 완성해가는 걸 보며 ‘맞아, 이게 영화였지’ 하고 느꼈어요. <밀수>를 볼 때도 그런 느낌이 있었거든요. <베테랑2>는 첫 시퀀스에서부터 완벽한 풀숏과 클로즈업이 등장하고, 언제 무얼 보여줄 것인지, 스코어는 어떻게 들어올 것인지, 배우가 어떤 대사를 할 때 프레임 인 아웃을 할 것인지가 명확하잖아요. 그 콘티뉴이티가 정확해서 좋았어요. 저는 흔히 말하는 ‘고전적’인 영화가 그런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정확하게 보여주는데 관객이 홀린 듯이 따라갈 수 있게 하는.

류승완 제가 유행을 못 따라가는 걸 수도 있죠. (웃음)

한준희 그런 부분이 오히려 사람들이 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봐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준다고 생각해요. 지난해에 본 <서울의 봄>도 그런 영화였거든요. 그런 영화들을 선배들이 계속 찍어주시니 저희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요.

류승완 엄청난 칭찬을 듣네요. 결국 영화를 만든다는 건 무질서한 상태에서 출발해 질서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 때, 세상에 없던 세상을 만드는 거잖아요. 이건 사실 신의 영역인데, 우리는 어쩌면 사이비종교 지도자 같은 걸 수도 있어요. 모든 스태프와 배우에게 나를 믿어달라고, 내 ‘구라’가 맞는다고 속여가면서 작업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유행을 못 따라가는 것 같은 지점들이 뭐냐면, 스토리보드 작업을 하다보면 이상하게 가상선을 넘어갈 때 인물이 왼쪽을 보다가 갑자기 오른쪽을 보면 확 깨요.

한준희 저도 그렇거든요.

류승완 그런데 지금의 현대 관객들은 그걸 개의치 않죠. 이미 어려서부터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보고, 자기가 동영상을 찍은 세대들은 이미지너리 라인(imaginary line) 규칙 같은 것은 아무 상관을 하지 않는데, 저는 그게 그렇게 걸려요. 그리고 액션 장면에서 타격 위치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 사람이 뛸 때 오른쪽에서 출발해 왼쪽을 향하는지 왼쪽에서 출발해 오른쪽을 향하는지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해요. 이런 게 깨지는 걸 못 견디겠거든요. 자유롭게 찍어서 자유롭게 편집할 수도 있을 텐데 저는 좀 꼰대 같은 거죠. 그런 규칙을 위반하면 제가 막 사기꾼이 된 것 같으니까요. 물론 저도 이런 규칙을 넘어설 때가 있어요. 이를테면 조명 위치를 바꿀 수 없어 넘기는 경우도 있고, 어깨선을 오른쪽에 걸었다가 반대로 걸어야 하는데 같은 어깨만 걸고 찍거나 할 때가 있죠. 하지만 선배들이 쌓아놓은 클래식의 영향을 받아 최대한 규칙을 지키려는 태도를 갖추고 있는 거죠. 그래도 현대 영화 중에서 그런 규칙을 넘어서서 흥미로운 결과를 만들어낸 영화를 볼 때 참 대단하다 싶어요. 나는 왜 저런 생각을 못했지? 나는 왜 아직도 이렇게 보수적일까 되묻고요.

한준희 예전에 김성수 감독님이 제게 그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어요. 우리는 그런 규칙들을 좋아하고, 그게 맞는다고 생각하고, 배운 게 그런 것이다 보니 그 안에서 따박따박 잘해내는 게 중요한 거라고. 그게 장르고, 거기서 무언가를 해내는 게 재밌다는 거죠. 어떻게 보면 감독님도 장인이시잖아요? 액션만이 아니라 계속 작품을 만드시고, 계속 무언가를 시도하시고, 좋은 의미로 관객과 세상이 원하는 경향과 항상 싸우시고. 저는 그게 작가고 장인이고 감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감독님 영화 속 특정 장면들이 늘 제 기억에 남아 있어요. 이를테면 <D.P.> 시즌2에서 구교환 배우가 누군가를 잡으려고 야쿠르트 카트를 타고 쫓아가는 장면은 명백하게 <베테랑>의 오마주에 가까워요.

류승완 그 장면만의 독창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연상이 안되는데요?

한준희 완전히 흉내내려 했던 거예요.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류승범 배우가 고깃집에서 뒤집고 싸우던 액션도 자주 떠올려요. 예상치 못한 상황과 공간에서 펼쳐지는 액션의 쾌감도 있지만, 주인공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이 신이 끝난다는 복합성이 지금도 어떤 액션 장면을 구성할 때 떠오르곤 해요. 그래서 제가 무의식중에 계속 감독님의 자장에 있구나 싶어요. 저희 세대는 사실 홍콩영화나 할리우드영화를 보고 자랐다기보다 한국영화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런 색이 묻어 있는 작품들이 너무 재밌어요.

류승완 내 영화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아서 자기 영화를 만들었다는 감독을 만나는 일이 드문데, 그럴 때마다 참 신기해요. 선배들의 기분이 이랬겠구나,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그냥 한 건데 싶을 때도 있고. 저도 이제 경력이 좀 쌓인 감독으로서 앞으로 내가 영화를 만들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신경이 쓰여요. 누군가가 내 영화를 보고 극장 안에서 반응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삶에도 영향받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요. 그래서 더 신중해지려고요. 제 영화, 그리고 저 자신에 대한 불만도 더 심플해졌어요. 물웅덩이에 비친 뼈가 탐나서 자기가 물고 있던 뼈를 놓치는 개처럼 저지른 실수들이 있거든요. 이제는 더 단순 명확하게 영화를 만드는 것이 제 숙제예요. 한 감독의 다음 프로젝트도 너무 궁금해요.

한준희 저도 경찰에 관한 무언가를 좀 쓰고 있습니다.

류승완 다른 거 해! (웃음)

한준희 저도 형사 얘기를 해보고 싶어서…. (웃음)

류승완 이 경쟁자들이….

한준희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경찰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요.

류승완 경찰 얘기는 진짜 매력 있죠. 이명세 감독님이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만들 때 하신 이야기가 생각나요. 형사와 영화감독은 되게 비슷하다는. 형사가 범인을 잡기 위해 사건의 실체를 추적하는 과정이 감독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파고드는 과정과 유사하다는 거죠. 저도 형사영화를 만들면서 비슷하게 느꼈어요.

한준희 또 하나 힌트를 얻네요.

류승완 그리고 제가 볼 때 형사들이 작성한 조서만큼 완벽한 기승전결 구조를 가진 시놉시스가 없어요. 기가 막혀! 그럼 다음 프로젝트는 영화인가요? 드라마인가요?

한준희 지금 쓰고 있는 중인데 어떤 형태로 갈지는 조금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시작하는 단계여서요. 그리고 오늘 꼭 드리고 싶었던 말씀이 있어요. 제가 20년 전에 독립영화 워크숍에서 공부할 때 감독님이 그 워크숍 출신 중 가장 잘된 선배로 알려져 계셨어요.

류승완 저희가 한국독립영화협회 워크숍 동문이에요. 한때는 제가 잘나갔는데 지금은 한준희 감독이죠.

한준희 아닙니다. 그리고 10년 전 제가 전주국제영화제 기획팀 스태프였을 때 감독님의 이름이 박힌 기념품 가방을 제가 기획해서 만들었어요.

류승완 깜짝 놀랐어요. 근데 그 가방 남아 있나요?

한준희 그때 품절돼서 이젠 없을 겁니다. 오늘 이렇게 뵙게 돼서 성덕이 된 기분이에요. 너무 영광이고요. 저도 더 열심히 해서 감독님처럼 재밌는 영화 많이 만들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류승완 한준희 감독은 제가 길게 대화해보고 싶었던 젊은 감독이었고, 항상 작품을 보면서 응원했었어요. 공교롭게도 <밀수>의 두 주인공이 한준희 감독과 작업을 했었잖아요? (한준희 감독이 연출한 <차이나타운>에 김혜수 배우가, <뺑반>에 염정아 배우가 출연했다.-편집자) <밀수> 시사 때 한준희 감독이 두 배우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는 걸 보고 저 감독은 함께 작업한 인연을 되게 소중히 여기는 연출자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더욱 응원하게 됐고, 고마웠습니다. 한준희 감독의 경찰영화 너무 기대됩니다!

한준희 한번 잘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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