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컨벤션센터의 통창은 빅토리아 항구 너머를 비추는 거대한 액자다. 홍콩 필마트 개막 첫날 뿌옇다 못해 간헐적으로 비를 뿌리던 하늘이 둘째 날에 접어들어 쾌청해지자 오후 내리 창가에 인파가 몰렸다. 바삐 움직이는 와중에도 풍경 사진 남기기를 잊지 않은 이들이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지만 실은 첫날 이미 푸른 배경의 ‘인증숏’을 찍어뒀다. 필마트를 주관하는 홍콩무역발전국의 외신 브리핑 자리에서였다. 패트릭 라우 홍콩무역발전국 수석부사장이 아시아 각국에서 온 기자들에게 행사 전반을 안내한 장소는 보션 스튜디오(Votion Studios)의 부스. 홍콩에 본사를 둔 이 회사는 부스 전체를 간이 버추얼 스튜디오로 꾸며 자사가 보유한 기술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뒀다. 패트릭 라우 부사장은 진짜처럼 보이는 화창한 경치를 뒤로한 채 연설했다. “최신 영상 제작 기술을 선보이는 업체들부터 빌리빌리(Bilibili)와 같은 소셜미디어 성격의 플랫폼들이 신규 참가사로 등장한 것을 올해의 경향으로 특별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필마트는 무엇을 위한 곳인가
당혹스러웠다. 그 이름에 걸맞게 ‘필름’을 내세울 줄 알았으나 영화가 뻗을 수 있는 가지들을 한껏 수용하는 자세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필마트의 기조였다. 개막식 전후로 진행된 콘퍼런스 프로그램들의 면면에서도 필마트의 소구점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첫 타자로 중국의 대형 드라마 제작사 화책그룹의 회장 푸빈싱이 생성형 AI를 활용한 프로덕션 경험을 나눴고, 홍콩디자인연구소의 버추얼 스튜디오 오픈을 기념해 삼성, 아리(ARRI) 등 5개사가 무대에 올라 신제품을 소개했다. ‘비디오 스트리밍 시대에서 성공하기’라는 제목의 콘퍼런스에선 아이치이, 뷰(VIU) 등 아시아권 OTT 플랫폼을 대표하는 연사들이 대담을 가졌다. 한국영화 종합 홍보관에서 담소를 나눈 한 홍콩 영화인이 짚었듯 “예전부터 테크 업체들은 마켓에서 PR 기회를 엿봤고, 이번이라고 다를 건 없다”라는 말도 수긍할 만하다. 하지만 콘퍼런스마다 가득 찬 객석을 보고 있자니 분야와 직무를 막론한 동시대 영화인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가늠해볼 수 있었다.
홍콩영화 투자 계획을 발표하는 알리바바디지털미디어·엔터테인먼트그룹.
그럼에도 필마트를 더욱 뜨겁게 하는 건 아시아 주요 제작·배급·투자사들의 ‘빅딜’이라는 점은 변함없다. 먼저 중국 OTT 요우쿠(YOUKU)와 알리바바픽처스가 속한 알리바바디지털미디어·엔터테인먼트그룹은 ‘홍콩 문화예술 산업 활성화 프로그램’을 발표하며 향후 5년간 50억홍콩달러 이상을 홍콩 영상산업에 투자할 것을 약속했다. 활성화 프로그램 기획에 참여한 만다린모션픽처스, 환시미디어그룹, 미디어아시아그룹, 쇼브러더스픽처스, 엠퍼러모션픽처스 등 홍콩의 주요 영화사들이 수혜를 입을 듯하다. 리지에 알리바바픽처스 회장은 “중국 문화에 뿌리를 두고 동양적 미학과 국제적 관점을 겸비한 이들이 글로벌 영화시장에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가진 열쇠가 될 것”이라며 투자 의의를 밝혔다. “홍콩영화의 새로운 황금기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통 크게 홍콩영화에 힘을 보태기로 한 알리바바 부스 곁에는 40여개에 달하는 중국 본토 영화사 및 콘텐츠 기관들이 큼지막하게 즐비했다.
국경을 넘는 협업의 현장
그런가 하면 필마트를 발판 삼아 최초의 전성기를 펼쳐보려는 나라들도 있다.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이 현재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시장”(매리엔 리 뷰 콘텐츠구매·기획 총괄)이라는 평가를 필마트 기간 내내 심심찮게 들었다. 그 선두에 선 국가로 인도네시아를 꼽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중국 후베이성, 마카오와 마찬가지로 2024년 처음으로 파빌리온을 차렸다. 커피 생산국으로 명성이 자자한 만큼 원두 드립백이 초입을 장식한 인도네시아 파빌리온에서 가야트리 나디아 자카르타필름위크 페스티벌 매니저를 만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관광청, 경제부, 교육기술부 등 여러 정부 부처의 지원을 받아 자카르타필름위크, 욕야-넷팩아시아영화제(Jogja-NETPAC Asian Film Festival) 관계자들을 비롯한 인도네시아 프로듀서들이 이곳을 찾았다. 인도네시아에는 동남아시아를 넘어 아시아 전반에서 더 많은 관객을 확보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앞으로 영화제를 넘어 시장에서도 인도네시아의 재능에 주목했으면 한다.” 그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초 공개한 넷플릭스 시리즈 <시가렛 걸>로 그 저력을 확인해보라고 권했다. 실제로 “한류 인기가 크며, 인구가 많고 젊다”(이정하 콘텐츠판다 이사)는 이유로 한국 영화인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인도네시아는 <파묘>가 흥행하고, 바른손이앤에이가 공동 제작을 추진 중인 나라이기도 하다. 지난해 말 바른손이앤에이는 비시네마픽처스의 <자카르타: 13번의 폭탄 테러>와 베이스엔터테인먼트의 <레스파티>에 투자했으며, 이 두 인도네시아 제작사 또한 올해 필마트에 동행했다.
이제 막 협업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 인도네시아가 참고할 만한 사례를 태국 파빌리온에서 발견했다. 태국 영상 업계는 필마트 첫날 ‘타일랜드 데이’를 개최해 홍콩, 중국 영화계와의 파트너십을 강조하고, 홍콩무역발전국과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중에서도 2016년 태국의 최대 미디어 기업 트루비전스와 CJ ENM이 합작한 트루CJ 크리에이션스는 <스타트업> <로맨스가 필요해> 등 한국 드라마를 리메이크할 뿐 아니라 <쇼미더머니> 태국판을 제작하는 등 각본 없는 포맷의 현지화에도 앞장서고 있다. 아리 아리지사티엔 대표가 한국 IP를 현지화해온 전략을 곱씹었다. “트루CJ는 태국에서 보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리메이크 대상으로 선정하는 편이다. 제작사와 함께 전체 시즌의 구조를 분석하며 무엇을 각색할지 10개 이상의 주제를 놓고 토론하고, 원작 스튜디오의 승인을 받는다. 그렇게 개발한 시나리오 중 <시그널>의 리메이크판인 <23:23>이 제일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한다.”
‘비디오 스트리밍 시대에서 성공하기’ 콘퍼런스가 끝난 후 인사를 나눈 뷰의 매리엔 리 총괄에게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홍콩에 본사를 두고 인도네시아, 태국 등 16개국에 서비스 중인 OTT 뷰에서 콘텐츠 구매와 기획을 관장하는 그는 “데이터, 인사이트, 현지 전문성을 바탕으로 플랫폼에서 끊임없이 진화하는 사용자 선호도를 파악하고, 이러한 수요에 적합한 콘텐츠에 투자한다”고 밝혔다. “최근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말레이시아에서 호응을 얻은 <W> <그녀는 예뻤다> 등 성공한 한국 드라마의 각색판, 필리핀의 <김비서가 왜 그럴까> 리메이크 작품이 있다. 향후 태국에서 제작될 <재벌집 막내아들> 리메이크 작품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뷰 신규 사용자의 약 80%가 한국 콘텐츠를 플랫폼에서 시청할 첫 번째 콘텐츠로 선택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뷰는 한국 제작사와 협력을 강화하고 리메이크를 통해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할 예정이다.”
팬데믹 이후의 아시아영화
인도네시아영화 <자카르타: 13번의 폭탄 테러> 포스터.
이처럼 해외 프로덕션과 긴밀히 소통하며 통로를 넓히는 중인 한국 업체들도 영화진흥위원회가 꾸린 한국영화 종합 홍보관 주변을 둘러싸고 각국의 손님을 맞았다. CJ ENM, 쇼박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등이 부스를 마련한 가운데 MBC, KBS미디어, SBS콘텐츠허브 등도 눈에 들어왔다. 그중 부스를 가장 넓게 차린 곳은 콘텐츠판다(NEW). 이정하 콘텐츠판다 이사는 “올해부터 콘텐츠판다가 영화와 TV시리즈를 아우르고자 부스에도 힘을 줘봤다”라며 미소지었다. 그는 배우 강동원의 스릴러 <엑시던트>(가제), 배우 이성민·이희준의 오컬트 코미디 <핸섬 가이즈>, 배우 조여정의 주연작이자 덱스(김진영)의 연기 데뷔작이 될 시리즈 <타로> 세일즈에 공을 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인도네시아, 필리핀, 튀르키예에서 리메이크됐을 뿐 아니라 유럽과 아랍권에서도 문의가 오고 있는 <7번방의 선물>(2013)의 성공 사례처럼 단순 세일즈를 넘어 공동 제작, 투자와 같은 기회도 엿보고 있다.”
오랜만에 듣는 ‘7번방’에 놀랄 찰나, 고개를 돌리니 두개의 ‘하이브’ 틈에 서 있었다. 그 사이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인 듯했다. 한쪽은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 다른 한쪽은 BTS와 뉴진스 포스터로 부스를 채웠기 때문이다. 우선 영화사 벌집(Hive Filmworks)은 홍경·노윤서 주연의 <청설>과 더불어 <거짓말> 제작사 신씨네와의 인연으로 한국영상자료원이 4K 리마스터한 <거짓말>의 해외 세일즈를 맡고 있다. “<거짓말>이 오전 10시에 마켓 스크리닝을 가졌다. 아침에 보기에는 ‘매운맛’인데, 예상보다 많은 관객이 들어왔다. 그들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남아 있느냐가 관건인데, 다 남아 있더라! 부스를 찾은 바이어들에게는 <거짓말>을 ‘오리지널 코리안 <님포매니악>’이라 설명했다. <님포매니악>의 철학적 면모가 그보다도 13년 앞서 세상에 공개된 <거짓말>에도 있다. 한국에서 왕가위 감독 영화의 리마스터 버전이 잘됐듯 <거짓말>도 해외에서 다시 주목받았으면 한다.”(박수정 영화사 벌집 해외사업부) 한편 아티스트에 기반한 콘텐츠를 제작하고 연관된 사업을 전개하는 하이브(HYBE) 미디어 스튜디오는 올해 처음 필마트에 참가했다. “우리는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를 제작하고 다양한 플랫폼에 배급하고 있는데, 특히 영화 카테고리에서는 공연 실황 영화와 아티스트의 월드투어를 기록한 다큐멘터리영화가 있다. 이외에 예능 장르도 제작하고 있어 동남아 및 중화권의 OTT, 극장, 방송 등 플랫폼 파트너사들에 하이브 미디어 스튜디오의 콘텐츠와 진행 중인 사업을 알렸다.”(김민주 하이브 판권사업파트장)
플러스엠의 <리볼버> <야당>, 쇼박스의 <파묘> <더 킬러스>, 화인컷의 <보스> 세일즈 비화까지 전해 듣다 보니 너른 창밖이 금세 어두워졌다. 퇴근길에 올해 필마트에서 만난 영화인들의 상반된 두 반응을 생각했다. 예전 같지 않다는 낙담도, 앞으로가 진짜라는 전망도 모두 애정 어린 진단임을 안다. 팬데믹 이후에도 2월의 베를린(유러피안필름마켓)과 5월의 칸(칸필름마켓) 사이를 굳건히 파고든 이곳 홍콩은 아시아영화 허브로서의 존재감을 쉬이 잃지 않을 전망이다. 그 근거를 다음 장부터 나올 창작자들의 인터뷰에서도 더듬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