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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급행열차처럼 질주하는 변화의 도시지만 그 방향이 언제나 앞을 향하지는 않았다.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격변을 겪었던 홍콩은 아시아의 맹주와도 같았던 영화의 힘을 잃었고, 왕가위와 주성치 같은 드문 예를 제외하면, 더이상 외국 관객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시아영화의 10년을 돌아보는 다섯 번째 여행지로 홍콩을 택한 건 경이적인 무협과 액션의 내공을 쌓아온 힘이 아직도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동방의 진주라 불렸던 이 도시에서, 과거에 그랬듯 앞으로도 새로운 영화를 건설할 수 있다고 말하는 영화인들을 만났다. 이 글은 인디컴시네마가 기획하는 12부작 다큐멘터리 <아시아영화기행>의 홍콩편 촬영팀과의 동행기다. <씨네21>과 부산국제영화제가 후원하고 CJ미디어가 공동제공하는 <아시아영화기행>은 부산영화제 기간 동안 12편의 각 작품을 1편으로 모아 편집한 버전을 상영하고, 10월3일부터 12일까지는 SBS에서 연속 방영할 예정
아시아 영화 기행: 홍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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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능대로 vs 연출대로
사건 일시: 2005년 6월23일
사건 장소: 경기도 파주 세트장
사건: 정순정이 스탠드를 휘둘러 김우택을 죽이다
“또 죽이기 시작했구나?” 파주 세트장에 들어선, 극중 오성호 형사 역의 문성근이 방 감독에게 인사 대신 농을 던지자, 모이를 놓칠세라 달려드는 병아리들마냥 후배 배우들이 두 사람 주위에 모여들어 왁자지껄이다. 정순정이 휘두른 스탠드에 얻어맞아 머리가 피범벅인 김우택 역의 장현성이 세트 바깥으로 나오자 배우들이 주고받는 만담의 수위는 더욱 높아진다. 문성근이 “빨간 모자를 썼네”라고 말하자 가짜 피를 뒤집어 쓴 장현성은 “한나절 멀쩡했는데 또 이지경이 됐네”라고 웃고, 극중 문성근의 동료 형사로 나오는 권오중이 “연기 너무 어색하더라. 감독님이 마지못해 오케이를 내시던데”라고 장현성을 공격하자 이번엔 방 감독이 “분량도 없는데 오중이는 항상 일찍 오더라!”라고 일침을 놓는다. 방 감독이 문성근에게 “못 보신 코믹액션을 보여드리
<오로라 공주> 사건일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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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정화랑 괜히 싸움 붙이지 마요!” 지난 8월19일 저녁, 인사동의 한 음식점. 김현 편집실에서 감금 생활을 하다 머리도 식힐 겸 인터뷰에 응한 방은진 감독은 몇개의 질문에 답하더니 금세 기사의 방향을 눈치채고 미리 엄포를 놓는다. 일주일 뒤, 이태원의 한 레스토랑. “사진 찍는 거 아니죠”라며 편한 복장으로 나온 엄정화는 “아니, 감독님이 그런 말까지 했단 말이에요?”라며 이내 씩씩거린다. 돈독한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이간질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은 이렇다.
5년 준비 끝에 메가폰을 든 배우 출신 감독은 도대체 배우들과 어떻게 소통할까. 궁금증의 출발은 그러했다. 게다가 엄정화에게 방은진은 선배 배우지만, 신인 감독 아닌가. 촬영현장에서 두 사람이 적지 않은 신경전을 벌일 것이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함구하고 그저 구경만 하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영화사를 설득했고, 이후 <오로라 공주> 촬영현장을 네 차례 방문할 수 있었지만, 매번 야식만 축
<오로라 공주> 사건일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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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발걸음은 논쟁 속으로
황금사자상 밑에 포진한 은사자상(감독상)과 심사위원 대상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던 두 거장의 신작에 돌아갔다. 필립 가렐과 아벨 페라라. 누벨바그의 적자와 미국 독립영화의 대부가 선보인 두 영화는, (다른 모든 경쟁작과 마찬가지로) 모두의 환호를 받은 걸작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간 자신들의 작업에 대한 성찰과 고민의 흔적이 역력한 이 작품들은 상영장과 기자회견장, 이후 리뷰들에서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 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남겼다.
누벨바그는 끝나지 않았다
레 자망 레귤리에 Les Amants reguliers/ 감독 필립 가렐/ 프랑스/ 2005년
68혁명은 프랑스인, 혹은 유럽인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그날 이후. 어떤 이들은 영화에 투신했고, 어떤 이들은 시와 미술을 탐미했다. 1968년 5월에 파리의 거리에 섰고, 그 시기를 전후하여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필립 가렐은 혁명의 열기를
제6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결산 [2] - 수상작·화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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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수상 결과
황금사자상 <브로크백 마운틴>(리안 감독)
은사자상(감독상) 필립 가렐 감독(<레 자망 레귤리에>)
심사위원대상 <메리>(아벨 페라라 감독)
각본상 조지 클루니, 그랜트 헤슬로브(<굿 나이트 앤드 굿 럭>)
남우주연상 데이비드 스트라태언(<굿 나이트 앤드 굿 럭>)
여우주연상 지오바나 메조기오르노(<마음속의 야수>)
특별사자상 이자벨 위페르(<가브리엘>)
신인배우상 메노시 세자르(<남쪽을 향하여>)
기술공헌상 윌리엄 루브찬스키(<레 자망 레귤리에> 촬영감독)
오리존티상 <더 퍼스트 온 더 문>(알렉세이 페도르첸코 감독)
오리존티 다큐멘터리상 <천국의 동쪽>(레흐 코왈스키 감독)
단편 최우수작품상 <간이역>(린 치엔-핑)
단편 특별언급 <라일라 아펠>(레온 프루도프스키 감독)
평생공로상
제6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결산 [1] - 수상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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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에겐 행인 1, 내 인생에선 주인공 - 임창정+황정민
2005.07.07 청담동 웨딩숍 골목
7월7일 청담동의 한 웨딩숍 앞 좁은 골목이 부산하다. 진열된 웨딩드레스를 바라보며 식도 올리지 못하고 함께 살고 있는 선애를 떠올리며 눈물 짓는 창후에게, 중요한 사건을 수사 중인 나 형사가 폴라로이드 사진을 보여주며 뭔가를 묻는 장면이다. 영화상으로도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긴박한 순간이지만,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 진행되는 촬영현장도 뭔가 정점에 달한 듯 팽팽하다. 촬영종료일로 정해놓은 날은 다가오고, 장마와 겹친 촬영은 자꾸만 지연되고, 저마다의 스케줄로 바쁜 배우의 일정을 조율하기는 점점 더 힘들어진다. 지긋지긋한 일상 속에서 아주 사소한 인연 하나가 세상을 밝아오게 만드는 영화를 만드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 역시, 화창한 날씨, 뜸하게 지나다니는 행인들처럼 아주 작은 행운에 불과할 텐데. 관망하는 이마저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창후에게서 별다른 대답을 듣지 못한 나 형사가 주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제작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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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멀티플렉스들 사이에서 재건축의 기로에 선 곽씨네하우스의 곽 회장은 중년의 배우지망생 오 여인을 남몰래 사모한다. 성격 고약한 곽 회장에게 문전박대당하는 외판원 창후는 사랑의 도피 끝에 아담한 가정을 이뤘지만 가난은 젊은 부부의 행복을 호시탐탐 노린다. 창후에게 신용카드 대금 독촉전화를 거는 퇴락한 전직 농구선수 성원은 게임을 통해 어린이돕기 성금을 모금하는 TV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8살 난 꼬마 진아를 만난다. 진아의 남자친구 지석의 부모는 사람도 사랑도 믿지 않는 냉혈한 사업가 조 사장과 씩씩하고 긍정적인 정신과 의사 유정. 조 사장은 세심한 청년 태현을 가정부로 맞이하고, 남편과 이혼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유정은 토론 프로그램에서 만난 중년의 숫총각 나 형사와 옥신각신하며 사랑을 키운다. 유정의 병동에 입원한 두명의 자살미수자, 퇴출 가수 정훈과 수녀 서원을 앞둔 수경은 서로를 위안 삼아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제작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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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겐 희로애락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있잖아요. <토니 타키타니>는 물건으로도 말로도 다 채워질 수 없는, 그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작품이에요.”
이치카와 준 감독은 언제나 미야자와가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은 감독이었다. “자기 신념이 강하고, 테마가 뚜렷하지만 영상이나 대사는 굉장히 절제하는 그의 스타일을 좋아한다.” 다만, 그때마다 “리에씨는 너무 메이저라 내 영화와 안 어울려”라는 반농담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치카와 감독도 “먼 세계로 긴 여행을 떠나는 새가 특별한 바람을 몸에 두르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옷을 걸치고 있”는 에이코의 모습을 미야자와 이외의 배우에게서 찾기는 힘들었다.
감독의 말에서 이치카와는 “막상 영상으로 옮기려 했을 때 하루키의 원작이 인물들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는 것, 극단적으로 말하면 ‘얼굴’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소설에 흐르고 있는 투명감과 낮은 온도
어느 일본 여배우의 초상, 미야자와 리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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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바다 건너온 한 일본 소녀배우의 누드집은 ‘누드냐, 예술이냐’라는 논쟁을 일으키며 근엄한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고 결국 재판정까지 갔다. 한국 서점가에 비닐로 포장된 누드집이 당당하게 진열되었던 건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하긴 아직 배꼽티도 등장하지 않았던 때였다. 92년은 한국 여가수 유아무개씨의 누드 사진집이 나왔고, <즐거운 사라> 사건이 일어났던 해였다. 미야자와 리에의 <산타페>는 꽁꽁 숨겨서 더 음란했던 90년대 한국사회의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잊었던 사이, 그녀는 아이돌에서 자신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배우가 되어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의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서 고혹적인 한순간을 빚어내는 건, 꿈결처럼 흘러가는 영상이나 고독한 시간을 똑똑 두드리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뿐이 아니다. 고스란히 스크린에 재현된 ‘하루키 월드’의 가운데엔, 숨막히는 아름다움과 함께 다 길어낼 수 없는 고독함
어느 일본 여배우의 초상, 미야자와 리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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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가만히, 카메라 앞에서 견디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랑니>의 김정은은, 다른 여자다. 키가 늘씬하고 눈동자는 차고 잔잔하며 동작은 나긋하다. 그리고 <사랑니>의 조인영은 ‘캔디’가 아니라 공주다. 세상은 결국 자기를 중심으로 공전한다고 믿는 진짜 공주. <재밌는 영화> <가문의 영광> 등 김정은을 스크린에 안착시킨 ‘센’ 연기와 <사랑니>의 조용한 모험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그녀의 연기에 두려움이 없다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정지우 감독은 그녀에게 “강을 건넜다”고 말했다. 김정은도 그 표현이 마음에 드는 눈치다. 기슭에서 망설이던 배우는 이제, 사라졌다. <사랑니>는 확실히 이 배우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듯하다. 김정은은 지난 9월9일 출연 중인 드라마의 작업 방식을 견딜 수 없다는 글을 팬 카페에 올려 파문을 일으켰다. “진심없이 이해없이 연기하는 건 배우로서 죽기보다 끔찍한 일이라는
<사랑니>, 정지우의 도약 [4] - 김정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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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를 관찰하면 사람마다 써야 할 도구가 다르다”
-허문영/김정은에 대해 “이 배우다” 하는 확신이 들었던 시점이 어떤 시점인가.
=정지우/김정은을 처음 만난 것이 <파리의 연인> 직후였는데, 아마 칭찬받으며 자기 복제를 계속하려는 유혹과, 벗어나려는 욕구가 뒤섞인 시기였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해 내 이야기를 스펀지처럼 흡수했고 대화가 통했다. 영화 만들며 최악의 순간은 이 배우가 뭘 해도 이 선을 넘어설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그건 정말 감독으로서 “X됐다”고 느끼는 상황이다. 배우를 120% 기다린다는 것은 내 의지 문제가 아니라 배우에게 그 역량이 잠재돼 있을 때 고집할 수 있는 것이다. 도저히 배우가 안 되면, 그 배우가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대사를 줄이거나 상황을 단순화하며, 말하자면 영화적으로 붕괴가 안 되는 미봉책을 찾게 된다. 그러기 시작하면 현장 가는 것이 지옥이다. 나로선 아직까지 그런 경우는 단역 경우에만 있었고 이번에도 단역 한분을
<사랑니>, 정지우의 도약 [3] - 정지우 감독 인터뷰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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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마음이라는 소박한 이야기가 시작이었다”
앞당겨진 <사랑니>의 개봉 일정은 가뜩이나 낯빛이 흰 정지우 감독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었다. 언론 시사를 하루 앞둔 9월20일 오후, 숨가쁘게 믹싱을 마치고 남양주종합촬영소에서 막 ‘출소’한 그를 삼청동에서 만났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 속 인영이 석이의 자전거를 달리던 길 위쪽, 다시 말해 인영과 정우가 함께 사는 한옥의 아래 골목에 자리한 카페에서. 예의 또렷하고 청량한 정지우 감독의 보이스카우트풍 목소리는, 누적된 피로의 더께에도 짓눌린 기색이 없었다. <씨네21>은 <사랑니>가 감독의 전작 <해피엔드>로부터 성큼 나아간 걸음이며 독창적인 경지를 열었다는 의견을 피력한 허문영 편집위원을 질문자로 초대했다. 우리는 아직 프린트로 영화를 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정지우 감독과 마주앉았다.
-허문영/<해피엔드>와 <사랑니>는 6년의 거리만큼 영화적 거리
<사랑니>, 정지우의 도약 [2] - 정지우 감독 인터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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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데뷔작 <해피엔드> 이후 6년 만에 정지우 감독이 복귀했다. 30살 교사와 17살 제자의 대담한 연애담으로 알려진 <사랑니>는, 생의 한가운데 선 도도한 한 여성과 치밀히 조직된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섭리를 성찰하는 수작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랑니>의 성취를 살피고, 감독의 연출론과 배우로서 큰 전환을 시도한 김정은의 모험담을 직접 듣는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이석이 되고 싶어.”(17살 조인영)
도대체 이런 게 언제부터 내 살 속에 들어와 있었을까? 서른살의 어느 날, 내 안에서 희고 날선 것이 불쑥 돋아나더니 몸과 마음을 들볶는다. 유능한 학원 수학강사 조인영(김정은)에게 사랑은 사랑니와 같은 양상으로 찾아온다. 첫사랑의 소년과 이름도 얼굴도 똑같은 열일곱살 제자 이석(이태성)은 인영에게 격심한 매혹이다. “아야!” 여자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다 슬그머니 미소짓는다. 아프지만, 황홀하다.
정지우 감독의 <
<사랑니>, 정지우의 도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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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서 깨어나 영화로 부활하라
이만희는 전설적인 감독이다. 30년 전 그가 편집실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45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졌을 때 이미 그의 전설은 시작되었다. 세상은 그의 남아 있는 작품보다는 사라진 작품을, 그리고 그의 삶보다는 그의 죽음을 더 많이 이야기했다.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가고, 영화를 할 수 없는 절망으로 죽어간 이만희는 이 땅에서 영화하는 이의 영감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영화적으로 역사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다. 사실 누가 감히 전설을, 그의 처절한 삶과 안타까운 죽음 앞에 쉽게 그의 작품세계를 논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을는지 모른다. 이만희의 영화들이다. 세상은 이만희를 한국 영화언어의 신기원을 세운 <만추>로, 그가 마지막 숨결을 쏟았던 <삼포가는 길>을 만든 예술적이며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로 기억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두 가지 문제를 낳는다. 그가
2005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 [9] - 이만희